나에게는 한 가지 기묘한 징크스가 있다. 작품의 장르를 불문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은 죽는다. ‘얘는 안 죽고 완결까지 가겠다’라고 안심하면 99.9% 착각이다. 작가들의 투철한 킬 정신을 피해간 최애캐? 그런 건 없었다.
대검을 고속으로 휘두르며 괴물들을 썰어제끼던 꽃분이 언니는 느닷없이 나타난 사자왕 아저씨의 손톱에 세로로 쪼개져 죽었다. 자신의 연구로 탄생한 괴물 상어의 탈출을 막으려고 스스로 미끼가 된 똑순이 언니는 결국 자기가 키운 상어한테 잡아먹혀 상하체가 갈라졌다. 야이씨 상어 인마, 너 이런 패륜을!
작고 약한 신체의 한계를 지성으로 극복하고 인류 최강 전력이 된 천재소녀도 죽었다. 언니를 죽인 악귀에 의해 온몸이 으스러져서. 사후에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원수에게 “이게 사랑일까? 나랑 같이 지옥 갈래?”라는 기묘한 고백공격까지 받았다. 작가님들,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좀 살려달라고요!
내가 네 편이 되어 줄게
내 최애캐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대체 불가능한 자기만의 능력을 하나 이상 지니고 있다. 그리고 숭고한 대의나 이상을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든다. 그렇다. 외모도 성격도 세계관도 다르지만, 하나같이 기량이 뛰어나고 의지가 단단한 인물들이다.
그러니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을 보면서도 불길했다. 루미가 딱 내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원탑 아이돌 걸그룹의 리더. 대결이 성립하는 적이 손에 꼽히는, 압도적인 전투력. 악귀의 마수로부터 인간세상을 지키는 천명을 짊어진 자.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 헌트릭스 - 미라 / 루미(주인공1) / 조이
아니나 다를까. '억까' 빔 제대로 맞았다. 직업은 퇴마사 겸 세계 원탑 아이돌인데 태생이 반은 인간, 반은 악귀다. 실력이라도 평범해서 대체될 수 있는 전력이라면 도망칠 구석이라도 있을 텐데, 그러기엔 너무나 유능했다.
루미는 자신의 ‘전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악귀에게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인 ‘벼락처럼 퍼지는 흉터’가 자꾸 자라니, 동료에게도 대중에게도 피부를 감추느라 바쁘다. 동료들이 목욕탕 가자고 조르고 또 졸라도 루미의 철벽은 끄떡도 없다. 그럴 수밖에. 가기 싫은 게 아니라, 갈 수 없는 거니까.
그나마 태생이 악귀 혼혈이라는 점이 루미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또 다른 주인공, 사자보이스 리더 진우와 어긋난 운명으로나마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

▲ 사자보이스 - 진우(주인공2)
진우. 이 친구도 어쩐지 수상하게 멋있더라. 역시나 억까 빔 정통으로 맞은 케이스였다. 그는 악귀의 왕 ‘귀마’가 계획적으로 타락시켜 부하로 삼은 영혼이었다. 귀마는 진우가 스스로 가족을 버린 패륜아라고 여기며 죄책감에 짓눌리도록 상황을 설계했다. 소식을 영영 모르게 되어버린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진우를 수백년 동안 귀마에게 붙잡아두는 족쇄가 되었다.
그러니 귀마는 진우에게 모셔야 할 보스인 동시에 백 번 죽여 마땅한 원수였을 것이다.
루미는 ‘일부가 악귀임에도 귀마의 통제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사례였다. 귀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서가 그녀에게 있을 수도 있었다. 진우가 굳이 적대세력의 최강자에게 사적인 만남을 요청한 까닭이다.
비록 첫 만남에서 진우가 깔끔하게 두 토막이 날 뻔했지만(…), 루미와 진우는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조각을 발견하고 점점 강하게 이끌렸다. 자기 편을 들 줄 모르던 사람 둘이 서로의 편이 되어주었다. 루미는 진우의 실수와 잘못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진우는 루미의 존재가 ‘실수’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목욕탕 가기 참 힘들다
다행히 케데헌 세계관에서 내 최애캐 루미는 살아남아 해피엔딩을 맞았다. 또 다른 최애캐 진우가 자기 목숨을 희생해 그녀를 지켜준 덕이었다. 그래, 하나라도 살아남은 게 어디냐. 작가님 감사합니다. 조금 일 하고 많이 버십시오.

▲ 서로를 구원한 루미와 진우
태생의 절반이 악귀인 것도, 퇴마가 천명인 것도 루미가 선택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공연 중이든 전투 중이든 옷자락이 뜯겨 피부가 노출되면 바로 동료에게 의심받을 처지였다. 후반부에서 루미의 피부를 보고 태생을 짐작한 헌트릭스 동료들은 악귀를 멸하기 위한 무기를 루미에게 겨눴다.
루미의 ‘역린’이 드러날 뻔한 순간. 그녀를 도운 건 오히려 적대세력의 진우였다. 어느 세계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가 자신 외에 또 있다는 사실이 문장으로 정리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던 것 아닐까.
진우는 자신이 영원히 귀마 수하의 악귀로 살아야 마땅하다고 믿으려 했지만, 루미는 진우의 자기 비난을 긍정하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스스로 용서치 못할 잘못을 한 진우도 그가 맞지만, 루미와 진심을 나누며 '네 존재는 실수가 아니'라고 말해주던 이 역시 분명 진우였기 때문이다.

▲ 진우, "난 네 존재가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아."
루미가 자신의 피부를 드러내고 '조각조각 부서져도 빛나는 나'를 노래해 동료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면? 인간세상은 귀마의 광기에 무방비로 노출됐을 것이다. 헌트릭스도, 헌터의 역사도 끝장났겠지.
모든 오해가 풀린 다음에야 루미는 동료들과 함께 목욕탕에 갈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숨기던 피부를 자기 의지로 드러낸 채.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슴 아픈 희생을 거쳐 각성하고, 최종 보스를 토벌하고, 세계를 구해야 하는 목욕탕 입구 컷. 이대로 괜찮은가?
화장실 가기도 참 힘들다
판타지는 기적을 동력으로 움직이지만, 현실에는 기적이 없다. 나의 비밀은 가장 친밀한 사람에게 말해도 치명타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 현실에 귀마는 없다. 있을 필요도 없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다. 표적을 괴롭히고, 따돌리고, 폭행하고, 불태우고, 죽이고, 결국 ‘치운다’.
‘치우기’란, 표적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이다.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빼앗아 “여긴 네 자리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방식.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한 맹렬한 반대는 이 ‘치우기’의 대표적인 사례다. 화장실이 없는 공간에서 사람은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 머무르는 것이 사실상 금지된다. 이게 얼마나 유해한지 나는 잘 안다. 당사자였으니까.
여성 호르몬 맞고, 수술하고, 법적 성별 정정하고, 체력 회복하느라 휴학을 풀로 땡긴 탓에 4년제 대학을 6학년에 졸업한 용자가 바로 나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 트랜지션 중인 트랜스젠더는 등록금 수천만 원을 대학에 갖다 바치고, 강의 성실히 듣고, 학점 관리 빡세게 해도, 재학기간 내내 마음 놓고 갈 화장실이 없을 수 있다는 것.
캠퍼스 구석에 ‘보수 공사가 덜 돼서 우연히’ 성별 표기가 없던 단 한 칸의 화장실. 그 한 칸만이 내 안전지대였다. 교수님 눈치를 살피며 스르륵 빠져나와, 발소리도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그 한 칸으로 질주하던 나날. 곤욕도 곤욕이지만, 돌이켜보면 참 치욕스럽다.
이제 사회인이 된 나는 존재도 능력도 대단치 않다. 언제 어디서나 대체 가능한 인력이다. 내 재주는 밥벌이가 '가능하긴 한' 딱 그 정도다. 재산이 넘치도록 많은 것도 아니고. 루미가 가진 것 중 몇 가지라도 내게 있었다면, 최소한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까지 입술 깨물며 전공책에 필기하던 불쌍한 날들은 없었으려나.
케데헌 세계관의 반인반마는 최종 보스를 무찌르고 이야기의 종막에 이르러서야 동료들과 목욕하러 갈 수 있었다. 현실의 나는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마려움'을 끝의 끝까지 참아야 변기에 앉을 수 있었다. 우연히 방치되었던 화장실 한 칸은 내겐 너무나도 부족하고 하찮은 기적이었다.
매일 치욕을 견디던 과거의 나에게, 지금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또 다른 '나'들에게는 기적이 아닌 해결책이 필요하다. 누구나 필요할 때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화장실이.
+ '덕력'이 부족한 여러분을 위한 첨부 자료.
▲ 꽃분이 언니(클레이모어 - No.8 전사, 풍참의 플로라)

▲ 똑순이 언니(딥 블루 씨 - 닥터 수잔)

▲ 천재 소녀(귀멸의 칼날 - 코쵸우 시노부)
저자 라트리(블로그 바로 가기)
외부 필진 '라트리'
- 前 한국다양성연구소 활동가 '꾸냥'

나에게는 한 가지 기묘한 징크스가 있다. 작품의 장르를 불문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은 죽는다. ‘얘는 안 죽고 완결까지 가겠다’라고 안심하면 99.9% 착각이다. 작가들의 투철한 킬 정신을 피해간 최애캐? 그런 건 없었다.
대검을 고속으로 휘두르며 괴물들을 썰어제끼던 꽃분이 언니는 느닷없이 나타난 사자왕 아저씨의 손톱에 세로로 쪼개져 죽었다. 자신의 연구로 탄생한 괴물 상어의 탈출을 막으려고 스스로 미끼가 된 똑순이 언니는 결국 자기가 키운 상어한테 잡아먹혀 상하체가 갈라졌다. 야이씨 상어 인마, 너 이런 패륜을!
작고 약한 신체의 한계를 지성으로 극복하고 인류 최강 전력이 된 천재소녀도 죽었다. 언니를 죽인 악귀에 의해 온몸이 으스러져서. 사후에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원수에게 “이게 사랑일까? 나랑 같이 지옥 갈래?”라는 기묘한 고백공격까지 받았다. 작가님들,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좀 살려달라고요!
내가 네 편이 되어 줄게
내 최애캐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대체 불가능한 자기만의 능력을 하나 이상 지니고 있다. 그리고 숭고한 대의나 이상을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든다. 그렇다. 외모도 성격도 세계관도 다르지만, 하나같이 기량이 뛰어나고 의지가 단단한 인물들이다.
그러니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을 보면서도 불길했다. 루미가 딱 내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원탑 아이돌 걸그룹의 리더. 대결이 성립하는 적이 손에 꼽히는, 압도적인 전투력. 악귀의 마수로부터 인간세상을 지키는 천명을 짊어진 자.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 헌트릭스 - 미라 / 루미(주인공1) / 조이
아니나 다를까. '억까' 빔 제대로 맞았다. 직업은 퇴마사 겸 세계 원탑 아이돌인데 태생이 반은 인간, 반은 악귀다. 실력이라도 평범해서 대체될 수 있는 전력이라면 도망칠 구석이라도 있을 텐데, 그러기엔 너무나 유능했다.
루미는 자신의 ‘전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악귀에게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인 ‘벼락처럼 퍼지는 흉터’가 자꾸 자라니, 동료에게도 대중에게도 피부를 감추느라 바쁘다. 동료들이 목욕탕 가자고 조르고 또 졸라도 루미의 철벽은 끄떡도 없다. 그럴 수밖에. 가기 싫은 게 아니라, 갈 수 없는 거니까.
그나마 태생이 악귀 혼혈이라는 점이 루미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또 다른 주인공, 사자보이스 리더 진우와 어긋난 운명으로나마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
▲ 사자보이스 - 진우(주인공2)
진우. 이 친구도 어쩐지 수상하게 멋있더라. 역시나 억까 빔 정통으로 맞은 케이스였다. 그는 악귀의 왕 ‘귀마’가 계획적으로 타락시켜 부하로 삼은 영혼이었다. 귀마는 진우가 스스로 가족을 버린 패륜아라고 여기며 죄책감에 짓눌리도록 상황을 설계했다. 소식을 영영 모르게 되어버린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진우를 수백년 동안 귀마에게 붙잡아두는 족쇄가 되었다.
그러니 귀마는 진우에게 모셔야 할 보스인 동시에 백 번 죽여 마땅한 원수였을 것이다.
루미는 ‘일부가 악귀임에도 귀마의 통제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사례였다. 귀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서가 그녀에게 있을 수도 있었다. 진우가 굳이 적대세력의 최강자에게 사적인 만남을 요청한 까닭이다.
비록 첫 만남에서 진우가 깔끔하게 두 토막이 날 뻔했지만(…), 루미와 진우는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조각을 발견하고 점점 강하게 이끌렸다. 자기 편을 들 줄 모르던 사람 둘이 서로의 편이 되어주었다. 루미는 진우의 실수와 잘못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진우는 루미의 존재가 ‘실수’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목욕탕 가기 참 힘들다
다행히 케데헌 세계관에서 내 최애캐 루미는 살아남아 해피엔딩을 맞았다. 또 다른 최애캐 진우가 자기 목숨을 희생해 그녀를 지켜준 덕이었다. 그래, 하나라도 살아남은 게 어디냐. 작가님 감사합니다. 조금 일 하고 많이 버십시오.
▲ 서로를 구원한 루미와 진우
태생의 절반이 악귀인 것도, 퇴마가 천명인 것도 루미가 선택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공연 중이든 전투 중이든 옷자락이 뜯겨 피부가 노출되면 바로 동료에게 의심받을 처지였다. 후반부에서 루미의 피부를 보고 태생을 짐작한 헌트릭스 동료들은 악귀를 멸하기 위한 무기를 루미에게 겨눴다.
루미의 ‘역린’이 드러날 뻔한 순간. 그녀를 도운 건 오히려 적대세력의 진우였다. 어느 세계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가 자신 외에 또 있다는 사실이 문장으로 정리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던 것 아닐까.
진우는 자신이 영원히 귀마 수하의 악귀로 살아야 마땅하다고 믿으려 했지만, 루미는 진우의 자기 비난을 긍정하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스스로 용서치 못할 잘못을 한 진우도 그가 맞지만, 루미와 진심을 나누며 '네 존재는 실수가 아니'라고 말해주던 이 역시 분명 진우였기 때문이다.
▲ 진우, "난 네 존재가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아."
루미가 자신의 피부를 드러내고 '조각조각 부서져도 빛나는 나'를 노래해 동료들을 설득하지 못했다면? 인간세상은 귀마의 광기에 무방비로 노출됐을 것이다. 헌트릭스도, 헌터의 역사도 끝장났겠지.
모든 오해가 풀린 다음에야 루미는 동료들과 함께 목욕탕에 갈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숨기던 피부를 자기 의지로 드러낸 채.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슴 아픈 희생을 거쳐 각성하고, 최종 보스를 토벌하고, 세계를 구해야 하는 목욕탕 입구 컷. 이대로 괜찮은가?
화장실 가기도 참 힘들다
판타지는 기적을 동력으로 움직이지만, 현실에는 기적이 없다. 나의 비밀은 가장 친밀한 사람에게 말해도 치명타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 현실에 귀마는 없다. 있을 필요도 없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다. 표적을 괴롭히고, 따돌리고, 폭행하고, 불태우고, 죽이고, 결국 ‘치운다’.
‘치우기’란, 표적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방식이다.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빼앗아 “여긴 네 자리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방식.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한 맹렬한 반대는 이 ‘치우기’의 대표적인 사례다. 화장실이 없는 공간에서 사람은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 머무르는 것이 사실상 금지된다. 이게 얼마나 유해한지 나는 잘 안다. 당사자였으니까.
여성 호르몬 맞고, 수술하고, 법적 성별 정정하고, 체력 회복하느라 휴학을 풀로 땡긴 탓에 4년제 대학을 6학년에 졸업한 용자가 바로 나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 트랜지션 중인 트랜스젠더는 등록금 수천만 원을 대학에 갖다 바치고, 강의 성실히 듣고, 학점 관리 빡세게 해도, 재학기간 내내 마음 놓고 갈 화장실이 없을 수 있다는 것.
캠퍼스 구석에 ‘보수 공사가 덜 돼서 우연히’ 성별 표기가 없던 단 한 칸의 화장실. 그 한 칸만이 내 안전지대였다. 교수님 눈치를 살피며 스르륵 빠져나와, 발소리도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그 한 칸으로 질주하던 나날. 곤욕도 곤욕이지만, 돌이켜보면 참 치욕스럽다.
이제 사회인이 된 나는 존재도 능력도 대단치 않다. 언제 어디서나 대체 가능한 인력이다. 내 재주는 밥벌이가 '가능하긴 한' 딱 그 정도다. 재산이 넘치도록 많은 것도 아니고. 루미가 가진 것 중 몇 가지라도 내게 있었다면, 최소한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까지 입술 깨물며 전공책에 필기하던 불쌍한 날들은 없었으려나.
케데헌 세계관의 반인반마는 최종 보스를 무찌르고 이야기의 종막에 이르러서야 동료들과 목욕하러 갈 수 있었다. 현실의 나는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마려움'을 끝의 끝까지 참아야 변기에 앉을 수 있었다. 우연히 방치되었던 화장실 한 칸은 내겐 너무나도 부족하고 하찮은 기적이었다.
매일 치욕을 견디던 과거의 나에게, 지금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또 다른 '나'들에게는 기적이 아닌 해결책이 필요하다. 누구나 필요할 때 마음 편히 갈 수 있는 화장실이.
+ '덕력'이 부족한 여러분을 위한 첨부 자료.
▲ 똑순이 언니(딥 블루 씨 - 닥터 수잔)
▲ 천재 소녀(귀멸의 칼날 - 코쵸우 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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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 '라트리'
- 前 한국다양성연구소 활동가 '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