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청소년 시기를 떠나보낸 지 꽤 오래 되었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들 중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라는 말입니다.
2011년에서 2012년, 대구 지역 청소년들의 자살 사건이 잇달아 '보도'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2012년 이전에도 청소년들의 자살률은 낮지 않았을 것이 자명한데도, 같은 지역 내에서 '연이어' 자살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움직임 없이 단순한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청(당시 우동기 대구교육감)의 지시에 따라 대구시내 430개 학교에서는 3층 이상 교실의 창문이 24cm 이상 열리지 않도록 '창문 개폐장치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교육청은 '안전사고 예방'이 목적*이라고 밝혔으나, (지금까지도) 저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였습니다.
학교의 창문을 반 만큼 닫아둔다고 누군가 죽지 않을 수 있는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물론, 제가 느꼈던 감정이 순전히 "궁금함"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슬픔과 분노, 좌절과 의문, 의구심, 죄책감이 "왜?"라는 질문으로 저를 오래 괴롭혔지요. "왜?"는 제 안에서 해결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선생님께 "왜?" 창문을 못 열게 하는지, 정말로 창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자살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죽어가는 청소년들은 어떻게 되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을 때, 선생님께서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라고 하셨던 것을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종종 떠올립니다. 아니요. 사실 종종 보다 훨씬 자주 떠올립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인지 물으며 "공부"나 하라고 했던 국어 선생님에게 느꼈던 배신감과 당혹스러움, 절망감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모든 일이 정말로 나와 "무관한가"에 대해서 자주 자문합니다.
어쩌면 저는 10여 년 전, 그 무렵부터 '이렇게' 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나로서 살고 싶고, 내가 공동체나 사회, 국가에 의해 죽지 않고, 죽임 당하지 않고, "잘" 살지 못해도 그저 "누구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제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예민하고 기민하게 슬픔을 발견하고, 참지 않고 슬퍼하는 저의 "재능"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졸업한 학교의 창문이 반만 열리는지 궁금합니다. 창문을 여는 것으로 충분히 환기가 되는지, 깨진 계단이나 운동장 트랙 같은 시설은 얼마나 개선되고 보수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고 글을 쓰고 싶고 음악을 하고 싶고 체육을, 요리를, 미용을 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도 충분히 지원을 받고 응원을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하고, 잘하고, 하기 싫어하고, "못하고", 하지 않기를 선택하거나 하기를 선택하는 청소년들이 모두 충분히 지지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적과 입시 결과에 의해 "여전히" 차별 받고 있는지, 졸음을 참지 못한다는 이유로 벌을 서거나 체벌을 경험하는 청소년들이 "아직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복도에 서서, 소각장 뒤뜰에 숨어서 우는 청소년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학교"에 있는 것이 괴로워서 조퇴하거나 결석하는 청소년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런 게 궁금하고, 그래서 살아 있습니다.
한국다양성연구소 활동가가 되기 이전부터, 저는 제가 졸업한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마주하게 될 청소년들이 무슨 이야기든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충분히 격려하고, 위로하고, 서툴더라도 사랑을 전하고 오고 싶었지요.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국다양성연구소의 활동가가 된 이후, 저는 제가 청소년 시기를 보낸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다양성훈련"을 진행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누구나, 누구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어야 하고, 살기를 원하는 그 누구도 타인에 의해, 사회, 국가, 제도와 규범에 의해 죽임 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모든 일이 이 글을 읽고 계실 여러분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 송지혜, 〈대구 학교 창문은 왜 조금밖에 안 열릴까〉, 《시사IN》, 2012.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29)
* 류상현, 〈우동기 교육감,청소년 잇단 투신에 '보도자제 호소문' 발표〉, 《경북일보》, 2012.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1330)
저는 청소년 시기를 떠나보낸 지 꽤 오래 되었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들 중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라는 말입니다.
2011년에서 2012년, 대구 지역 청소년들의 자살 사건이 잇달아 '보도'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2012년 이전에도 청소년들의 자살률은 낮지 않았을 것이 자명한데도, 같은 지역 내에서 '연이어' 자살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려는 움직임 없이 단순한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청(당시 우동기 대구교육감)의 지시에 따라 대구시내 430개 학교에서는 3층 이상 교실의 창문이 24cm 이상 열리지 않도록 '창문 개폐장치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교육청은 '안전사고 예방'이 목적*이라고 밝혔으나, (지금까지도) 저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였습니다.
학교의 창문을 반 만큼 닫아둔다고 누군가 죽지 않을 수 있는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물론, 제가 느꼈던 감정이 순전히 "궁금함"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슬픔과 분노, 좌절과 의문, 의구심, 죄책감이 "왜?"라는 질문으로 저를 오래 괴롭혔지요. "왜?"는 제 안에서 해결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선생님께 "왜?" 창문을 못 열게 하는지, 정말로 창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자살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죽어가는 청소년들은 어떻게 되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을 때, 선생님께서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라고 하셨던 것을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종종 떠올립니다. 아니요. 사실 종종 보다 훨씬 자주 떠올립니다.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인지 물으며 "공부"나 하라고 했던 국어 선생님에게 느꼈던 배신감과 당혹스러움, 절망감에서는 벗어났지만, 그 모든 일이 정말로 나와 "무관한가"에 대해서 자주 자문합니다.
어쩌면 저는 10여 년 전, 그 무렵부터 '이렇게' 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나로서 살고 싶고, 내가 공동체나 사회, 국가에 의해 죽지 않고, 죽임 당하지 않고, "잘" 살지 못해도 그저 "누구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제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예민하고 기민하게 슬픔을 발견하고, 참지 않고 슬퍼하는 저의 "재능"도 한몫 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졸업한 학교의 창문이 반만 열리는지 궁금합니다. 창문을 여는 것으로 충분히 환기가 되는지, 깨진 계단이나 운동장 트랙 같은 시설은 얼마나 개선되고 보수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고 글을 쓰고 싶고 음악을 하고 싶고 체육을, 요리를, 미용을 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도 충분히 지원을 받고 응원을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하고, 잘하고, 하기 싫어하고, "못하고", 하지 않기를 선택하거나 하기를 선택하는 청소년들이 모두 충분히 지지 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성적과 입시 결과에 의해 "여전히" 차별 받고 있는지, 졸음을 참지 못한다는 이유로 벌을 서거나 체벌을 경험하는 청소년들이 "아직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복도에 서서, 소각장 뒤뜰에 숨어서 우는 청소년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학교"에 있는 것이 괴로워서 조퇴하거나 결석하는 청소년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런 게 궁금하고, 그래서 살아 있습니다.
한국다양성연구소 활동가가 되기 이전부터, 저는 제가 졸업한 학교에서 "수업"을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마주하게 될 청소년들이 무슨 이야기든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충분히 격려하고, 위로하고, 서툴더라도 사랑을 전하고 오고 싶었지요.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국다양성연구소의 활동가가 된 이후, 저는 제가 청소년 시기를 보낸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다양성훈련"을 진행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누구나, 누구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어야 하고, 살기를 원하는 그 누구도 타인에 의해, 사회, 국가, 제도와 규범에 의해 죽임 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모든 일이 이 글을 읽고 계실 여러분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 송지혜, 〈대구 학교 창문은 왜 조금밖에 안 열릴까〉, 《시사IN》, 2012.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29)
* 류상현, 〈우동기 교육감,청소년 잇단 투신에 '보도자제 호소문' 발표〉, 《경북일보》, 2012.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