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우리에게 젠더를 설명하는 일이 필요한가
-젠더를 논쟁이 아닌 돌봄으로 다시 읽기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다이앤 에어렌사프트와 미셸 저키위츠가 함께 쓴 책 Gender Explained가 “젠더의 경계를 넘는 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번역 출간됐다. 나는 여덟 살 어린이와 함께 젠더를 배우며 살아가고 있는 양육자이자 이 책을 감수한 활동가로서 이 책을 환영하며 추천한다. 이 책은 젠더를 둘러싼 논쟁의 한복판에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젠더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혐오세력 측은 분노와 공포의 언어로, SNS에서는 공격과 조롱의 소재로, 정치에서는 표를 얻기 위한 전쟁터로 소비된다. 그 결과, 성별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실천이 필요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숨어든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분명하다. 젠더는 만들어지는 이념이 아니라, 살아지는 경험이다.
젠더는 고정된 답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과정이다
책은 젠더를 ‘타고나는 것 vs 사회가 만드는 것’이라는 낡은 이분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젠더를 본성, 양육, 문화, 관계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젠더 웹(web)’으로 이해한다. 젠더는 태어날 때 한 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경험 속에서 계속 변화하고 재구성된다는 의미다. 저자들은 “성별정체성은 진짜다. 동시에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젠더 논쟁에서 가장 자주 오해되는 지점을 정확히 찌른다. 젠더가 진짜라는 말은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은 가볍거나 허구라는 뜻도 아니다. 젠더는 살아 있는 경험이며, 그래서 진실하고, 그래서 유동적이다.
성별 확정은 ‘아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안전하게 하는 것’
이 책이 다루는 가장 뜨거운 주제는 성별 확정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의학적 세부를 나열하기보다, 왜 이 논의가 이렇게 왜곡되었는지를 차분히 풀어낸다. 저자들은 모든 트랜스젠더·젠더 다이버스(gender diverse) 어린이들이 의료적 개입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오해와 달리 사춘기 이전 아동에게 수술이나 호르몬 치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별 확정 의료는 충동이 아니라, 오랜 관찰과 협의, 신중한 판단의 결과다.
Affirmation(인정, 지지)은 정체성을(트랜스젠더를) 만들지 않는다. 안전을 만든다. 다시 말해, 어린이의 말을 신뢰하고 지지한다고 해서 어린이가 트랜스젠더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지지는 방향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이 책이 보여주는 수많은 연구와 사례는 하나의 사실로 수렴한다. 양육자로부터(그리고 더 나아가서 교사, 친구에게) 지지받는 어린이는 덜 아프고, 덜 고립되며, 덜 죽는다.
스포츠, 교실, 병원: 논쟁의 장소에서 어린이는 사라진다
책은 스포츠, 학교, 의료 현장을 둘러싼 젠더 논쟁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공정함’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어린이의 ‘삶을 지우는 도구’로 사용되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은 전체 학생 선수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수의 존재는 마치 거대한 위협처럼 과장된다. 실제 연구 결과는 정반대다. 트랜스젠더를 포함하는 정책은 시스젠더 여학생의 참여율도 떨어뜨리지 않는다. 대신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우울과 자살 위험을 낮춘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젠더 교육을 “이데올로기 주입”이라 비난하는 목소리는, 아이들이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젠더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문제는 젠더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젠더를 어떻게 가르치느냐다.
이 책은 양육자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들은 독자에게 질문을 되돌린다. “당신 안의 젠더는 어떤 모습인가?, 당신 안에는 어떤 ‘젠더 천사’와 ‘젠더 유령’이 살고 있는가?”
이 책은 어린이를 스스로의 모습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 어린이를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정치, 어린이의 불안을 이용하는 공포 담론 속에서 어른(비청소년)들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젠더 혁명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일상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저자들은 말한다. 젠더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는 어린이들이 있다. 어른들은 그 뒤를 따라가거나, 발목을 잡을 뿐이다. 이 책이 제안하는 미래는 급진적이면서도 단순하다. 어린이를 통제/관리하지 말고, 알아가자. 정답을 주입하려 하지 말고, 함께 탐색하자. 무지와 두려움 대신, 관계와 돌봄을 선택하자.
젠더를 둘러싼 논쟁이 소음으로 가득 찬 지금, 이 책은 드물게도 조용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한다. 젠더를 설명하는 일은 어린이를 바꾸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어린이를 해방시키고 살리는 작업이라고.
그래서 이 책은 ‘젠더에 관심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일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어린이·청소년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어른을 위한 책이다. 또한 성별이분법, 성역할고정관념, 시스젠더/이성애 중심주의, 정상가족이데올로기 등 젠더체제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젠더에 대한 탐구와 실천은 나를 포함한 모두를 해방하기 때문이다.
『젠더의 경계를 넘는 아이들 - 지금 우리의 젠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서』(다이앤 에런사프트, 미셸 유르키에비치(지은이), 조은영(옮긴이), 수오서재, 2026-02-26, 원제 : Gender Explained) 도서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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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우리에게 젠더를 설명하는 일이 필요한가
-젠더를 논쟁이 아닌 돌봄으로 다시 읽기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다이앤 에어렌사프트와 미셸 저키위츠가 함께 쓴 책 Gender Explained가 “젠더의 경계를 넘는 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번역 출간됐다. 나는 여덟 살 어린이와 함께 젠더를 배우며 살아가고 있는 양육자이자 이 책을 감수한 활동가로서 이 책을 환영하며 추천한다. 이 책은 젠더를 둘러싼 논쟁의 한복판에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젠더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혐오세력 측은 분노와 공포의 언어로, SNS에서는 공격과 조롱의 소재로, 정치에서는 표를 얻기 위한 전쟁터로 소비된다. 그 결과, 성별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실천이 필요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숨어든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분명하다. 젠더는 만들어지는 이념이 아니라, 살아지는 경험이다.
젠더는 고정된 답이 아니라, 평생 이어지는 과정이다
책은 젠더를 ‘타고나는 것 vs 사회가 만드는 것’이라는 낡은 이분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젠더를 본성, 양육, 문화, 관계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젠더 웹(web)’으로 이해한다. 젠더는 태어날 때 한 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경험 속에서 계속 변화하고 재구성된다는 의미다. 저자들은 “성별정체성은 진짜다. 동시에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젠더 논쟁에서 가장 자주 오해되는 지점을 정확히 찌른다. 젠더가 진짜라는 말은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은 가볍거나 허구라는 뜻도 아니다. 젠더는 살아 있는 경험이며, 그래서 진실하고, 그래서 유동적이다.
성별 확정은 ‘아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안전하게 하는 것’
이 책이 다루는 가장 뜨거운 주제는 성별 확정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의학적 세부를 나열하기보다, 왜 이 논의가 이렇게 왜곡되었는지를 차분히 풀어낸다. 저자들은 모든 트랜스젠더·젠더 다이버스(gender diverse) 어린이들이 의료적 개입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오해와 달리 사춘기 이전 아동에게 수술이나 호르몬 치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별 확정 의료는 충동이 아니라, 오랜 관찰과 협의, 신중한 판단의 결과다.
Affirmation(인정, 지지)은 정체성을(트랜스젠더를) 만들지 않는다. 안전을 만든다. 다시 말해, 어린이의 말을 신뢰하고 지지한다고 해서 어린이가 트랜스젠더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지지는 방향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린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이 책이 보여주는 수많은 연구와 사례는 하나의 사실로 수렴한다. 양육자로부터(그리고 더 나아가서 교사, 친구에게) 지지받는 어린이는 덜 아프고, 덜 고립되며, 덜 죽는다.
스포츠, 교실, 병원: 논쟁의 장소에서 어린이는 사라진다
책은 스포츠, 학교, 의료 현장을 둘러싼 젠더 논쟁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공정함’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어린이의 ‘삶을 지우는 도구’로 사용되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은 전체 학생 선수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수의 존재는 마치 거대한 위협처럼 과장된다. 실제 연구 결과는 정반대다. 트랜스젠더를 포함하는 정책은 시스젠더 여학생의 참여율도 떨어뜨리지 않는다. 대신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우울과 자살 위험을 낮춘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젠더 교육을 “이데올로기 주입”이라 비난하는 목소리는, 아이들이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젠더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문제는 젠더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젠더를 어떻게 가르치느냐다.
이 책은 양육자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들은 독자에게 질문을 되돌린다. “당신 안의 젠더는 어떤 모습인가?, 당신 안에는 어떤 ‘젠더 천사’와 ‘젠더 유령’이 살고 있는가?”
이 책은 어린이를 스스로의 모습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 어린이를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정치, 어린이의 불안을 이용하는 공포 담론 속에서 어른(비청소년)들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젠더 혁명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일상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저자들은 말한다. 젠더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는 어린이들이 있다. 어른들은 그 뒤를 따라가거나, 발목을 잡을 뿐이다. 이 책이 제안하는 미래는 급진적이면서도 단순하다. 어린이를 통제/관리하지 말고, 알아가자. 정답을 주입하려 하지 말고, 함께 탐색하자. 무지와 두려움 대신, 관계와 돌봄을 선택하자.
젠더를 둘러싼 논쟁이 소음으로 가득 찬 지금, 이 책은 드물게도 조용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한다. 젠더를 설명하는 일은 어린이를 바꾸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어린이를 해방시키고 살리는 작업이라고.
그래서 이 책은 ‘젠더에 관심 있는 사람’을 위한 책일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어린이·청소년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어른을 위한 책이다. 또한 성별이분법, 성역할고정관념, 시스젠더/이성애 중심주의, 정상가족이데올로기 등 젠더체제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젠더에 대한 탐구와 실천은 나를 포함한 모두를 해방하기 때문이다.
『젠더의 경계를 넘는 아이들 - 지금 우리의 젠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서』(다이앤 에런사프트, 미셸 유르키에비치(지은이), 조은영(옮긴이), 수오서재, 2026-02-26, 원제 : Gender Explained) 도서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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