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중증장애인거주시설 색동원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19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색도우언 입소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의혹을 받는 원장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기다리고 있다. 2026.2.19 ⓒ뉴스1
색동원 TF, 그러나 반복되는 ‘시설 뺑뺑이’
김민석 총리는 색동원 사건과 관련해 범부처 합동 대응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구조 개선 의지를 드러냈다. 신속한 조사와 가해자 처벌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장면을 이미 여러 번 보아왔다. 사건이 터지면 엄정 조사와 처벌이 약속된다. 가해자들이 처벌받으면, 그다음은 무엇인가? 피해자들이 다른 시설로 옮겨진다. 이른바 ‘시설 뺑뺑이’다. 이것은 행정의 실수가 아니다. 시설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시설 거주자들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도록 설계된 사회에서는, 문제는 항상 시설 안에서 ‘처리’된다.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보다, ‘비정상’으로 분류한 사람들을 관리하는 편이 더 쉽고,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TF는 사건을 정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설 폭력의 구조를 멈추지는 못한다.
손쉬운 국가 통치방식으로서의 시설
색동원 사건은 충격적이지만 낯설지 않다. 시설만 바뀔 뿐, 구조는 반복된다. 폐쇄된 공간, 외부와의 단절, 위계적 통제, 내부 고발(공익 제보)의 어려움 등의 상황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시설 폭력은 몇몇 개인의 타락 때문이 아니다. 국가가 선택해온 통치 방식이다.
시설은 돌봄의 공간이 아니라, “정상성”에서 벗어난 존재들을 분리·수용·관리하는 장치로 작동해 왔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정상”이라 부르는가? 자립적인 사람, 생산적인 사람, 효율적인 사람, 시장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자본의 이윤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노동하지 못하면 무가치한가? 생산성이 낮으면 존엄도 낮은가?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보호의 대상’으로 호명된다. 그러나 보호의 다른 이름은 관리다. 노동할 수 없는 몸은, 비용으로 여겨진다. 시설은 자본주의가 긋는 정상과 비정상의 선 위에 세워진다.
자본주의적 산업이 되어버린 시설 운영
시설은 도덕의 언어로 설명되지만, 예산의 언어로 유지된다. 국가와 지자체는 토지와 건물을 확보한 법인에 시설을 위탁한다. 입소 인원에 따라 운영비와 인건비가 지급된다. 입소자가 많을수록 지원금이 늘어나고 시설 운영 법인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다. 시설은 보호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동시에 예산이 흐르는 구조다. 종교 법인이 시설 운영의 주요 주체가 된 것도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국가가 시설에 예산을 배정하는 한, 시설은 유지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구조’는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인권적 가치나 윤리·도덕적 기준이 돈을 이기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시설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설 문제를 장애인의 문제, 노숙인의 문제, 중증질환자의 문제로 여기면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로 생각한다. 그러나 ‘언젠가 나도 요양원에 가야 하나?’라는 고민은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돌봄이 필요한 몸이 될 때 우리 모두는 격리와 수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AI를 탑재한 로봇이 대부분의 노동을 대체할 시대에도 인간을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평가할 것인가? 자본을 위한 생산성이 인간 존엄의 기준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 ‘권리의 주체’에서 ‘관리의 대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시설 사회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다. 생산성을 인간 가치의 척도로 삼는 사회 전체의 문제다.
탈시설은 복지정책이 아니라 체제 전환이다
탈시설은 그저 시설 거주자를 시설 밖으로 나오게 하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다. 정상성 중심 사회를 해체하는 정치적 선택이다. 인간을 생산성으로 환원하지 않는 사회, 돌봄을 가족에게만 떠넘기지 않는 사회, 격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가능해야 탈시설 사회가 가능하다. 자본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가를 사람과 생명 그리고 돌봄을 중심에 두는 사회로 전환해야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탈시설은 복지의 일부가 아니라, 체제의 방향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개혁, 집중된 권한의 분리
그러나 체제는 추상적 구호로 바뀌지 않는다. 체제는 권력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의 문제다. 권력이 한 손에 쥐어져 있는 곳에서는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필요한 개혁이 있다. 신고 대상과 조사·징계 권한의 분리다.
2016년부터 2018년 사이, 영등포의 살레시오 청소년센터(6호 시설)에서 신부의 가혹행위와 시설 종사자들의 그루밍, 성범죄가 발생했다.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한 상담사는 괴롭힘 끝에 해고되었고, 공익제보자가 되어 경찰과 구청에 사건을 알렸다. 그러나 해결은 쉽지 않았다. 당시 MBC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구청이 해당 시설을 관리·감독하게 되어 있었는데, 동시에 구청이 시설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사하고 징계를 할 권한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기관이 스스로를 조사하고 징계하는 구조에서 공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동료를 징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충돌이 전제된 구조였다. 학교폭력 전담조사관 제도처럼 조사권을 분리하고, 전문성을 갖춘 독립적 조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조사권과 예산을 분리하고,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공익제보자 보호 역시 실질화되어야 한다. 현재는 해당 법률이 있지만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폭력을 알리는 사람이 파괴되는 구조에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 농성장 앞에서 장애인권리보장법 및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촉구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2026.02.19. ⓒ뉴시스
“할 수 없다”고 말하던 국회의원, 이제는 총리다
사건 당시 해당 지역의 국회의원은 김민석 총리였다. 나는 살레시오 진상조사 공동대책위원장으로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국회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지역구에서 발생한 시설 폭력에 대해 피해자들과 공익제보자가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그는 총리다. 정부를 대표하는 자리에서 시설 내 인권침해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말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TF를 구성하여 사건을 빠르게 정리하는 것을 정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본 중심 국가를 사람 중심 국가로 전환해야 시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자신의 지역에서 일어난 시설 폭력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말하던 정치인이, 이제는 총리가 되었다. 그가 그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을, 지금은 할 수 있을까? 그는 총리라는 자리에서는 자신의 권한을 인식하고 있을까? 시설 폭력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정치가 선택해온 구조의 문제다. 그는 구조를 유지해온 자신의 역할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구조를 바꿀 것인가.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 것인가
지난 2월 23일,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많은 시설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원 스트라이크 아웃’ 제도 등의 도입을 약속하며 더 안전한 시설을 만들겠다고 했다. 관리 기준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안전한 시설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시설이 필요 없는 사회가 필요하다.
탈시설은 인간을 바라보는 기준의 변화다. 인간은 자본을 위한 도구인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한 삶 자체가 인간 사회의 목적인가? 인간은 모두 취약하다. 모든 인간은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상호의존적 존재다. 돌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격리와 수용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색동원 사건의 마무리는 처벌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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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중증장애인거주시설 색동원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19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색도우언 입소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의혹을 받는 원장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기다리고 있다. 2026.2.19 ⓒ뉴스1
색동원 TF, 그러나 반복되는 ‘시설 뺑뺑이’
김민석 총리는 색동원 사건과 관련해 범부처 합동 대응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구조 개선 의지를 드러냈다. 신속한 조사와 가해자 처벌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장면을 이미 여러 번 보아왔다. 사건이 터지면 엄정 조사와 처벌이 약속된다. 가해자들이 처벌받으면, 그다음은 무엇인가? 피해자들이 다른 시설로 옮겨진다. 이른바 ‘시설 뺑뺑이’다. 이것은 행정의 실수가 아니다. 시설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시설 거주자들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도록 설계된 사회에서는, 문제는 항상 시설 안에서 ‘처리’된다.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보다, ‘비정상’으로 분류한 사람들을 관리하는 편이 더 쉽고,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TF는 사건을 정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설 폭력의 구조를 멈추지는 못한다.
손쉬운 국가 통치방식으로서의 시설
색동원 사건은 충격적이지만 낯설지 않다. 시설만 바뀔 뿐, 구조는 반복된다. 폐쇄된 공간, 외부와의 단절, 위계적 통제, 내부 고발(공익 제보)의 어려움 등의 상황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시설 폭력은 몇몇 개인의 타락 때문이 아니다. 국가가 선택해온 통치 방식이다.
시설은 돌봄의 공간이 아니라, “정상성”에서 벗어난 존재들을 분리·수용·관리하는 장치로 작동해 왔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정상”이라 부르는가? 자립적인 사람, 생산적인 사람, 효율적인 사람, 시장에 기여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자본의 이윤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노동하지 못하면 무가치한가? 생산성이 낮으면 존엄도 낮은가?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인간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보호의 대상’으로 호명된다. 그러나 보호의 다른 이름은 관리다. 노동할 수 없는 몸은, 비용으로 여겨진다. 시설은 자본주의가 긋는 정상과 비정상의 선 위에 세워진다.
자본주의적 산업이 되어버린 시설 운영
시설은 도덕의 언어로 설명되지만, 예산의 언어로 유지된다. 국가와 지자체는 토지와 건물을 확보한 법인에 시설을 위탁한다. 입소 인원에 따라 운영비와 인건비가 지급된다. 입소자가 많을수록 지원금이 늘어나고 시설 운영 법인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다. 시설은 보호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동시에 예산이 흐르는 구조다. 종교 법인이 시설 운영의 주요 주체가 된 것도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국가가 시설에 예산을 배정하는 한, 시설은 유지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구조’는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인권적 가치나 윤리·도덕적 기준이 돈을 이기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시설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설 문제를 장애인의 문제, 노숙인의 문제, 중증질환자의 문제로 여기면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로 생각한다. 그러나 ‘언젠가 나도 요양원에 가야 하나?’라는 고민은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돌봄이 필요한 몸이 될 때 우리 모두는 격리와 수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AI를 탑재한 로봇이 대부분의 노동을 대체할 시대에도 인간을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평가할 것인가? 자본을 위한 생산성이 인간 존엄의 기준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 ‘권리의 주체’에서 ‘관리의 대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시설 사회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다. 생산성을 인간 가치의 척도로 삼는 사회 전체의 문제다.
탈시설은 복지정책이 아니라 체제 전환이다
탈시설은 그저 시설 거주자를 시설 밖으로 나오게 하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다. 정상성 중심 사회를 해체하는 정치적 선택이다. 인간을 생산성으로 환원하지 않는 사회, 돌봄을 가족에게만 떠넘기지 않는 사회, 격리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가능해야 탈시설 사회가 가능하다. 자본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가를 사람과 생명 그리고 돌봄을 중심에 두는 사회로 전환해야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탈시설은 복지의 일부가 아니라, 체제의 방향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개혁, 집중된 권한의 분리
그러나 체제는 추상적 구호로 바뀌지 않는다. 체제는 권력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의 문제다. 권력이 한 손에 쥐어져 있는 곳에서는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필요한 개혁이 있다. 신고 대상과 조사·징계 권한의 분리다.
2016년부터 2018년 사이, 영등포의 살레시오 청소년센터(6호 시설)에서 신부의 가혹행위와 시설 종사자들의 그루밍, 성범죄가 발생했다.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한 상담사는 괴롭힘 끝에 해고되었고, 공익제보자가 되어 경찰과 구청에 사건을 알렸다. 그러나 해결은 쉽지 않았다. 당시 MBC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구청이 해당 시설을 관리·감독하게 되어 있었는데, 동시에 구청이 시설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사하고 징계를 할 권한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기관이 스스로를 조사하고 징계하는 구조에서 공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동료를 징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충돌이 전제된 구조였다. 학교폭력 전담조사관 제도처럼 조사권을 분리하고, 전문성을 갖춘 독립적 조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조사권과 예산을 분리하고,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공익제보자 보호 역시 실질화되어야 한다. 현재는 해당 법률이 있지만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폭력을 알리는 사람이 파괴되는 구조에서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 농성장 앞에서 장애인권리보장법 및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 촉구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2026.02.19. ⓒ뉴시스
“할 수 없다”고 말하던 국회의원, 이제는 총리다
사건 당시 해당 지역의 국회의원은 김민석 총리였다. 나는 살레시오 진상조사 공동대책위원장으로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국회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지역구에서 발생한 시설 폭력에 대해 피해자들과 공익제보자가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그는 총리다. 정부를 대표하는 자리에서 시설 내 인권침해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을 말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TF를 구성하여 사건을 빠르게 정리하는 것을 정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본 중심 국가를 사람 중심 국가로 전환해야 시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자신의 지역에서 일어난 시설 폭력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말하던 정치인이, 이제는 총리가 되었다. 그가 그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을, 지금은 할 수 있을까? 그는 총리라는 자리에서는 자신의 권한을 인식하고 있을까? 시설 폭력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정치가 선택해온 구조의 문제다. 그는 구조를 유지해온 자신의 역할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구조를 바꿀 것인가.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 것인가
지난 2월 23일, 오세훈 서울시장은 더 많은 시설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원 스트라이크 아웃’ 제도 등의 도입을 약속하며 더 안전한 시설을 만들겠다고 했다. 관리 기준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안전한 시설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시설이 필요 없는 사회가 필요하다.
탈시설은 인간을 바라보는 기준의 변화다. 인간은 자본을 위한 도구인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한 삶 자체가 인간 사회의 목적인가? 인간은 모두 취약하다. 모든 인간은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상호의존적 존재다. 돌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격리와 수용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색동원 사건의 마무리는 처벌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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