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16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보건복지부(질병관리청)·식품의약품안전처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5.12.16. ⓒ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고 말하며 탈모 치료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이 화제가 됐다. 많은 이들이 환영했고, 또 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꼈다. 왜 이 발언은 이렇게 큰 논쟁을 불러왔을까?
탈모 자체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모가 ‘생존’ 문제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 사회에서 머리카락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라, 연애·취업·결혼·사회적 인정과 깊이 연결된 자격 조건처럼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대머리가 되면, 능력이나 성품과 무관하게 조롱과 차별의 대상이 된다. 이 사회는 외모를 통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 왔고, 그 결과 탈모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배제의 신호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정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머리카락이 없는 몸’인가, 아니면 ‘그 몸을 배제하는 사회’인가.
머리카락이 없는 몸이 문제라면,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하는 수밖에 없다. 혹은 이제는 머리카락을 심기도 한다. 의료나 성형, 즉 돈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탈모를 ‘의료의 영역’으로만 다루는 순간,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신체로 환원하게 된다. 이는 외모 기준 자체를 그대로 둔 채,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몸을 치료 대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하지만 외모를 사람의 가치 기준으로 삼는 사회에서, 의료는 해방이 아니라 순응의 도구가 되기 쉽다. 기준은 그대로 둔 채, 사람들만 그 기준에 맞추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외모를 강요해 왔다. 여성은 예쁘지 않으면 무능력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자기 책임이 부족한 존재로 취급됐다. 다이어트, 화장, 제모, 피부 관리, 성형은 ‘선택’이라는 이름을 썼지만 사실상 생존 전략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이 외모 억압은 남성에게도 확장되고 있다. 남성 역시 제모를 요구받고, 피부 관리와 다이어트 등 외모 관리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이는 성평등의 결과가 아니라, 억압의 보편화다. 억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몸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탈모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대머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감각이 문제라면, 그 인식과 감각을 바꾸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교육과 문화, 미디어와 캠페인을 통해 ‘정상적인 외모’라는 환상을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한 몸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다.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해주는 정책 혹은 심어주는 정책은, 이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다.
이와 닮은 장면을 나는 교육 현장에서 반복해서 목격해 왔다. 성평등 교육 시간에 일부 남성 청소년들은 “여성에게 월경용품을 지원한다면, 남성에게도 면도기나 발모제를 지원해야 공정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 이 질문을 단순한 “억지”로 치부하기보다는, “공정”에 대한 감각과 ‘차별은 곧 받는 것의 차이’라고 이해하도록 학습된 감각의 결과로 보는 것이 좋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성평등은 구조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개인에게 동일한 물품을 나눠주는 문제가 된다. 월경이 생물학적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 불이익과 연결된 문제라는 점, 탈모가 왜 고통이 되는지 역시 사회적 기준 때문이라는 점은 이러한 계산식 위에서 지워지게 된다. 남는 것은 “누가 더 받느냐”라는 경쟁적 감각뿐이다.
탈모를 둘러싼 담론은 또 다른 문제와 연결돼 있다. 성평등 정책을 둘러싼 ‘역차별’ 담론이다. 성평등가족부로의 개편 이후, ‘남성이 경험하는 성차별’을 조사하라는 지시는 이런 흐름 속에 있다. 특히 군복무 문제가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군대는 본질적으로 국가가 시민이자 노동자인 사람들을 제대로 된 보상 없이 동원해 온 구조의 문제다. 이는 ‘남성 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어떻게 시민의 희생을 정당화해 왔는가의 문제다. 이 문제를 성별 갈등으로 재구성하는 순간, 국가의 책임은 흐려진다.
정치는 갈등을 수렴해야지, 특정 커뮤니티의 감각을 여론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온라인 공간에서 증폭된 불만과 억울함이 존재한다면, 국가는 그것을 구조적으로 해석하고 책임 있는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증폭된 감정을 그대로 정책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치의 책임이라기보다 포퓰리즘에 가깝다.

탈모(자료사진) ⓒpixabay
다시 ‘생존’이라는 단어로 돌아가 보자. 정말로 생존과 직결된 의료와 정책 과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미프진 접근성, 자궁경부암을 예방하는 HPV 백신의 공공성, 극심한 월경통과 자궁내막증 치료, 중증 우울증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 성별적합수술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등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가른다. 이 문제들은 수년째 ‘재정 부담’과 ‘사회적 합의’라는 말 뒤로 밀려나 왔다.
차별금지법 역시 마찬가지다. 차별금지법은 누군가를 우대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로 인해 삶이 위협받는 사람들의 생존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다. “차별금지법보다 민생이 더 시급하다”는 말은, 차별 해결이 민생이 아니라는 오해에서 나온다. 차별은 생존의 문제다. 배제된 사람에게 민생은 늘 사치가 된다.
탈모가 생존 문제처럼 느껴지는 사회라면, 치료해야 할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다. 그 몸을 평가하고 서열화해 온 기준이다. 국가는 개인의 몸을 고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사람을 배제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정치의 책임이며, 진짜 ‘생존’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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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고 말하며 탈모 치료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이 화제가 됐다. 많은 이들이 환영했고, 또 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꼈다. 왜 이 발언은 이렇게 큰 논쟁을 불러왔을까?
탈모 자체는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모가 ‘생존’ 문제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 사회에서 머리카락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라, 연애·취업·결혼·사회적 인정과 깊이 연결된 자격 조건처럼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대머리가 되면, 능력이나 성품과 무관하게 조롱과 차별의 대상이 된다. 이 사회는 외모를 통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해 왔고, 그 결과 탈모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배제의 신호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정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머리카락이 없는 몸’인가, 아니면 ‘그 몸을 배제하는 사회’인가.
머리카락이 없는 몸이 문제라면,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하는 수밖에 없다. 혹은 이제는 머리카락을 심기도 한다. 의료나 성형, 즉 돈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탈모를 ‘의료의 영역’으로만 다루는 순간,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신체로 환원하게 된다. 이는 외모 기준 자체를 그대로 둔 채,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몸을 치료 대상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하지만 외모를 사람의 가치 기준으로 삼는 사회에서, 의료는 해방이 아니라 순응의 도구가 되기 쉽다. 기준은 그대로 둔 채, 사람들만 그 기준에 맞추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외모를 강요해 왔다. 여성은 예쁘지 않으면 무능력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자기 책임이 부족한 존재로 취급됐다. 다이어트, 화장, 제모, 피부 관리, 성형은 ‘선택’이라는 이름을 썼지만 사실상 생존 전략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금 이 외모 억압은 남성에게도 확장되고 있다. 남성 역시 제모를 요구받고, 피부 관리와 다이어트 등 외모 관리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이는 성평등의 결과가 아니라, 억압의 보편화다. 억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몸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탈모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대머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감각이 문제라면, 그 인식과 감각을 바꾸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교육과 문화, 미디어와 캠페인을 통해 ‘정상적인 외모’라는 환상을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한 몸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다.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해주는 정책 혹은 심어주는 정책은, 이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다.
이와 닮은 장면을 나는 교육 현장에서 반복해서 목격해 왔다. 성평등 교육 시간에 일부 남성 청소년들은 “여성에게 월경용품을 지원한다면, 남성에게도 면도기나 발모제를 지원해야 공정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 이 질문을 단순한 “억지”로 치부하기보다는, “공정”에 대한 감각과 ‘차별은 곧 받는 것의 차이’라고 이해하도록 학습된 감각의 결과로 보는 것이 좋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성평등은 구조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개인에게 동일한 물품을 나눠주는 문제가 된다. 월경이 생물학적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 불이익과 연결된 문제라는 점, 탈모가 왜 고통이 되는지 역시 사회적 기준 때문이라는 점은 이러한 계산식 위에서 지워지게 된다. 남는 것은 “누가 더 받느냐”라는 경쟁적 감각뿐이다.
탈모를 둘러싼 담론은 또 다른 문제와 연결돼 있다. 성평등 정책을 둘러싼 ‘역차별’ 담론이다. 성평등가족부로의 개편 이후, ‘남성이 경험하는 성차별’을 조사하라는 지시는 이런 흐름 속에 있다. 특히 군복무 문제가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군대는 본질적으로 국가가 시민이자 노동자인 사람들을 제대로 된 보상 없이 동원해 온 구조의 문제다. 이는 ‘남성 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어떻게 시민의 희생을 정당화해 왔는가의 문제다. 이 문제를 성별 갈등으로 재구성하는 순간, 국가의 책임은 흐려진다.
정치는 갈등을 수렴해야지, 특정 커뮤니티의 감각을 여론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온라인 공간에서 증폭된 불만과 억울함이 존재한다면, 국가는 그것을 구조적으로 해석하고 책임 있는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증폭된 감정을 그대로 정책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치의 책임이라기보다 포퓰리즘에 가깝다.
탈모(자료사진) ⓒpixabay
다시 ‘생존’이라는 단어로 돌아가 보자. 정말로 생존과 직결된 의료와 정책 과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미프진 접근성, 자궁경부암을 예방하는 HPV 백신의 공공성, 극심한 월경통과 자궁내막증 치료, 중증 우울증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 성별적합수술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등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가른다. 이 문제들은 수년째 ‘재정 부담’과 ‘사회적 합의’라는 말 뒤로 밀려나 왔다.
차별금지법 역시 마찬가지다. 차별금지법은 누군가를 우대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배제와 차별로 인해 삶이 위협받는 사람들의 생존을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다. “차별금지법보다 민생이 더 시급하다”는 말은, 차별 해결이 민생이 아니라는 오해에서 나온다. 차별은 생존의 문제다. 배제된 사람에게 민생은 늘 사치가 된다.
탈모가 생존 문제처럼 느껴지는 사회라면, 치료해야 할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다. 그 몸을 평가하고 서열화해 온 기준이다. 국가는 개인의 몸을 고치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사람을 배제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정치의 책임이며, 진짜 ‘생존’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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