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를 영원히 바꿔놓는 순간들에 대하여
— 뮤지컬 위키드 : 서로의 몸과 삶에 변화를 남기는 관계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오늘 뮤지컬 위키드를 보았다. 얼마 전 영화로 보았을 때는, ‘마녀’라는 낙인이 만드는 사회적 배제와 폭력, 즉 정상성 규범이 만들어내는 억압 구조가 먼저 보였다. 오늘은 그 구조의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발견하고 변화시킨 엘파바와 글린다의 우정이 유난히 밝게 보였다. 억압의 구조 속에서도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변화의 가능성’이 더 크게 다가왔다.
글린다는 Popular라는 노래에서 드러나듯 ‘정상성의 중심’에 위치한 존재였다. 다수에게 사랑받고, 규범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매력적이며, 인기 자체가 자산이자 힘으로 작용하는 인물이었다. 반면 엘파바는 초록색 피부 때문에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였다.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몸, 그래서 조롱·불신·혐오를 겪어야 했던 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없었던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경계를 짓고 위계를 만들어내는 구조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은 계기가 두 사람 사이에 틈을 냈고, 그 틈은 우정으로 이어졌다. 서로에 대한 편견이 깨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삶을 바꾸었다. 노래 속 가사처럼, “You have changed me for good, for better.” 영원히(for good), 그리고 조금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for better). 완벽함이 아닌, ‘함께 변하는 존재성’으로.
이 장면은 내가 몇 년 전 진행한 청소년 다양성 훈련 캠프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성소수자 활동을 시작하려던 순간, 한 청소년이 손을 들고 “저는 호모포비아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낙인과 혐오를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던지는 장면처럼 보였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배경을 듣자 그 말은 사실 가난과 종교, 생존 구조가 만들어낸 발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가정은 극심한 빈곤 상태였고, 교회만이 그에게 따뜻한 식사와 안락한 쉼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성소수자는 ‘죄인’으로 배웠다. 혐오는 종종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제도·종교·자본이 설계한 생존의 언어다. 그는 “누군가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한 교육을 하면 ‘나는 호모포비아다’라고 강하게 선포하라”고 배웠다고 했다. 그 청소년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문화적/제도적 혐오를 내재화해온 것이었다. 이는 ‘나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혐오를 사회적 질서로 생산하는 체제의 문제였다.
그 공간에는 성소수자인 스태프들이 있었다. 그 청소년과 이틀 동안 웃고, 먹고, 뛰어놀던 퍼실리테이터가 “제가… 당신이 말하는 그 동성애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너무나 다정했던 그 커밍아웃은 마치 ‘교회에서 배운 것처럼 제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시나요?’라고 넌지시 묻는 것 같았다. 그 말과 함께 그 청소년의 세계가 무너졌다. 평생 주입되어온 혐오의 이미지와 눈앞의 ‘함께 웃던 좋은 사람’이 충돌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는 울기 시작했다. 퍼실리테이터도 그를 안고 함께 울었다.
그 순간을 보며 나는 확실하게 알게 됐다. 혐오는 구조가 만들지만, 변화는 관계가 만든다. 제도와 규범이 사람을 나누어놓았지만, 결국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마주 선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사람의 삶 안에서 ‘for good’—영원히—남는다. 그 청소년에게는 “성소수자는 괴물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나의 퍼실리테이터 동료에게는 “혐오도 관계 속에서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30여 명 모두가 그 변화를 몸으로 경험했다.
이 경험은 내게 한 가지를 더 분명히 알려주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여전히 정상성과 비정상성, 중심과 주변, 특권과 억압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러한 구조에 균열을 내는 힘은 관계와 연결에서 나온다. 관계와 연결은 편견을 뒤집고, 배움을 다시 쓰고, 서로를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바꾸어놓는다.
나는 일상에서도 이런 변화의 흔적을 자주 본다. 작은 친절, 따뜻한 말, 다정한 몸짓이 사람을 움직인다. 이러한 작은 순간들이 바로 상호돌봄의 정치이고, 구조를 전복시키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강력한 에너지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만, 서로에게 기대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조금씩 for better—더 나아지는 존재로 변해간다.
그 변화는 때로 천천히, 때로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언제나 “관계라는 장(場)”에서 일어난다.
나는 그런 세계를 꿈꾼다. 혐오와 불평등의 구조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작은 변화들이 쌓여 상호돌봄과 포함의 질서를 다시 설계하는 세계.
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변화는 생각보다 오래, 아마도 for good—영원히—머물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영원히 바꿔놓는 순간들에 대하여
— 뮤지컬 위키드 : 서로의 몸과 삶에 변화를 남기는 관계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오늘 뮤지컬 위키드를 보았다. 얼마 전 영화로 보았을 때는, ‘마녀’라는 낙인이 만드는 사회적 배제와 폭력, 즉 정상성 규범이 만들어내는 억압 구조가 먼저 보였다. 오늘은 그 구조의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발견하고 변화시킨 엘파바와 글린다의 우정이 유난히 밝게 보였다. 억압의 구조 속에서도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변화의 가능성’이 더 크게 다가왔다.
글린다는 Popular라는 노래에서 드러나듯 ‘정상성의 중심’에 위치한 존재였다. 다수에게 사랑받고, 규범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매력적이며, 인기 자체가 자산이자 힘으로 작용하는 인물이었다. 반면 엘파바는 초록색 피부 때문에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였다.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몸, 그래서 조롱·불신·혐오를 겪어야 했던 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없었던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경계를 짓고 위계를 만들어내는 구조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은 계기가 두 사람 사이에 틈을 냈고, 그 틈은 우정으로 이어졌다. 서로에 대한 편견이 깨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삶을 바꾸었다. 노래 속 가사처럼, “You have changed me for good, for better.” 영원히(for good), 그리고 조금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for better). 완벽함이 아닌, ‘함께 변하는 존재성’으로.
이 장면은 내가 몇 년 전 진행한 청소년 다양성 훈련 캠프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성소수자 활동을 시작하려던 순간, 한 청소년이 손을 들고 “저는 호모포비아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낙인과 혐오를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던지는 장면처럼 보였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배경을 듣자 그 말은 사실 가난과 종교, 생존 구조가 만들어낸 발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가정은 극심한 빈곤 상태였고, 교회만이 그에게 따뜻한 식사와 안락한 쉼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성소수자는 ‘죄인’으로 배웠다. 혐오는 종종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제도·종교·자본이 설계한 생존의 언어다. 그는 “누군가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한 교육을 하면 ‘나는 호모포비아다’라고 강하게 선포하라”고 배웠다고 했다. 그 청소년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문화적/제도적 혐오를 내재화해온 것이었다. 이는 ‘나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혐오를 사회적 질서로 생산하는 체제의 문제였다.
그 공간에는 성소수자인 스태프들이 있었다. 그 청소년과 이틀 동안 웃고, 먹고, 뛰어놀던 퍼실리테이터가 “제가… 당신이 말하는 그 동성애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너무나 다정했던 그 커밍아웃은 마치 ‘교회에서 배운 것처럼 제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시나요?’라고 넌지시 묻는 것 같았다. 그 말과 함께 그 청소년의 세계가 무너졌다. 평생 주입되어온 혐오의 이미지와 눈앞의 ‘함께 웃던 좋은 사람’이 충돌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는 울기 시작했다. 퍼실리테이터도 그를 안고 함께 울었다.
그 순간을 보며 나는 확실하게 알게 됐다. 혐오는 구조가 만들지만, 변화는 관계가 만든다. 제도와 규범이 사람을 나누어놓았지만, 결국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마주 선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사람의 삶 안에서 ‘for good’—영원히—남는다. 그 청소년에게는 “성소수자는 괴물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나의 퍼실리테이터 동료에게는 “혐오도 관계 속에서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30여 명 모두가 그 변화를 몸으로 경험했다.
이 경험은 내게 한 가지를 더 분명히 알려주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여전히 정상성과 비정상성, 중심과 주변, 특권과 억압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러한 구조에 균열을 내는 힘은 관계와 연결에서 나온다. 관계와 연결은 편견을 뒤집고, 배움을 다시 쓰고, 서로를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바꾸어놓는다.
나는 일상에서도 이런 변화의 흔적을 자주 본다. 작은 친절, 따뜻한 말, 다정한 몸짓이 사람을 움직인다. 이러한 작은 순간들이 바로 상호돌봄의 정치이고, 구조를 전복시키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강력한 에너지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만, 서로에게 기대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조금씩 for better—더 나아지는 존재로 변해간다.
그 변화는 때로 천천히, 때로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언제나 “관계라는 장(場)”에서 일어난다.
나는 그런 세계를 꿈꾼다. 혐오와 불평등의 구조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작은 변화들이 쌓여 상호돌봄과 포함의 질서를 다시 설계하는 세계.
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변화는 생각보다 오래, 아마도 for good—영원히—머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