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키드: For Good’ 포스터 ⓒ자료사진
영화 ‘위키드: For Good’을 보고 나오며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마녀가 되는가? 누가 괴물이 되는가? 누가 비정상이 되는가? 그리고 그 낙인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영화 속 세계에는 인간과 동물이 말하고, 배우고, 공존하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누군가 말한다. “동물은 말을 해선 안 된다.” 언어를 빼앗는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비유였다. 사회적 소수자에게는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 이 세계는 지배자의 언어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언어를 되찾는 과정 자체가 곧 사회운동이 된다. 여성의 언어, 장애인의 언어, 성소수자의 언어, 이주민의 언어… 언어를 빼앗겼던 이들은 지금도 계속 자신의 언어를 만들고 있다. 이어지는 동물에 대한 말들—“동물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동물은 열등하다, 동물은 위험하다”—은 현실의 목소리와 겹친다. ‘너희는 열등하다, 너희는 위험하다, 너희는 효율적이지 않다, 집에 있는 것이 너희에게 더 좋다.’ 여성에게, 장애인에게, 이주민에게, 빈민에게, 성소수자에게, 노인에게 지금도 쏟아지는 말들이다.
영화는 ‘나와 다른 존재’를 지배의 도구로 만들어내는 순간, 평등했던 사회가 어떻게 위계사회로 전락하는지를 거의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지배자는 말한다. “위기의 순간에는 공통의 적이 필요하다.” 이 문장은 자본주의·가부장제·국민국가의 본능 그 자체다. 체제가 흔들릴 때 권력은 하나의 ‘적’을 만든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자본을 향하지 않도록, 시민의 절망이 국가를 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이주민·난민·성소수자를 위험과 공포의 ‘적’으로 만드는 정치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 속 오즈는 동물들을 억압하기 위해 원숭이를 ‘중간관리자’로 세운다. 이것 역시 현실의 재현이다. 기업과 국가는 늘 주변부 집단 일부를 ‘권력의 조력자’로 삼아 다른 주변부 집단을 감시하고 규율하게 만든다. 또한 사회는 ‘정상이 되라, 더 우월한 인간이 되라, 효율적으로 돼라’는 능력주의의 명령을 내린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감시하고 서로를 통제하며 정상성이라는 좁은 문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국가나 자본이 사람들을 굳이 “직접” 처벌하지 않아도, 체제는 사람들이 알아서 스스로를 검열하고 서로를 평가하고 누군가를 배제하는 구조를 만든다. 정상성·혐오·감시·통제는 영화 속 마법사와 현실의 체제가 공유하는 폭력의 언어다.
초록색 피부라는 이유만으로 괴물 취급을 당해온 엘파바는 차별의 경험을 통해 다른 존재의 고통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현실에서도 억압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깊은 연대의 감각을 갖는다. 어떤 반차별 집회에 가더라도 모든 사회적 소수자의 깃발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유다. 억압받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동시에 누군가를 억압하는 정체성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책임과 연대의 감각으로 서로를 돕는다. “초록 마녀가 우리를 죽이려 한다!” - 엘파바의 힘이 체제에 위협이 되자, 오즈는 즉시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악명을 만들고, 감정을 자극하고,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만든다.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낙인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유지·강화시켜, 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아도 개입할 마음조차 들지 않게 만든다.
혐중 집회에서 “중국인은 집단 강간범, 집단 살인범”이라고 외치던 깃발들, 성소수자를 “가정, 군대, 국가를 무너뜨리는 세력”으로 왜곡하는 정치 선동, 정신장애인을 “범죄 집단”으로 묘사하는 미디어의 조작 - 오즈의 마법사는 우리의 곁에 있다. 정상성과 혐오는 자본주의 위기의 순간, 사람들이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성실하게 발명되고 실행되어온 정치적 수단이다. 누군가를 비정상, 무쓸모, 괴물, 마녀로 만들어야 체제가 안전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혐오가 아닌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 분열이 아닌 연대, 체제의 언어를 넘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오즈의 마법사는 “거짓이라도 달콤한 말이 진실보다 사랑받는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혐오와 가짜뉴스는 자극적으로 귀에 쏙쏙 박힌다. 인권활동가들은 팩트로 대응하지만, 사실은 혐오보다 멀리 퍼지지 못해 우리를 지치게 하기도 한다. 그는 “진실은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체제의 본심이다. 승자는 자신들의 언어로 역사를 기록하고, 패자는 말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삭제된다. 그래서 사회운동은 언어를 되찾는 일이자, 기록하고 기억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영화 후반, 동물들이 모든 희망을 잃고 오즈를 떠나려 할 때 엘파바는 말한다. “여기는 우리의 집이잖아. 싸워야 해. 우리는 우리의 집을 되찾을 수 있어.”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적확하게 비추는 문장이다. 정상성과 혐오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의 집을 빼앗고 있다. “공부하라”는 말로 어린이·청소년의 삶을, “스펙 쌓아라, 끝없이 노력하라”는 말로 청년들의 삶을 잠식한다. “날씬해야 한다, 젊어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대학 가야 한다, 결혼해야 한다, 출산해야 한다, 서울에 살아야 한다, 아파트를 사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와 같은 ‘정상적인 삶’의 기준을 만드는 말들이 우리가 누려야 할 삶을 앗아간다. 결국 이 폭력적인 사회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집이다. 누군가에겐 안락하고, 누군가에겐 불편하고, 누군가에겐 지옥 같은 집. 그래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남아서 싸워야 한다. 일부가 아닌 모두의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떠나야 할 존재가 아니다. 떠나야 할 것은 폭력의 사회구조다.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말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집을 되찾을 수 있어.” 엘파바처럼 싸워야 한다. 우리에겐 마법은 없지만, 우리는 이 길 위에서 함께 싸우는 ‘녹색 피부의 마녀들’이며, 동료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99%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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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For Good’ 포스터 ⓒ자료사진
영화 ‘위키드: For Good’을 보고 나오며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마녀가 되는가? 누가 괴물이 되는가? 누가 비정상이 되는가? 그리고 그 낙인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영화 속 세계에는 인간과 동물이 말하고, 배우고, 공존하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누군가 말한다. “동물은 말을 해선 안 된다.” 언어를 빼앗는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비유였다. 사회적 소수자에게는 자신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 이 세계는 지배자의 언어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언어를 되찾는 과정 자체가 곧 사회운동이 된다. 여성의 언어, 장애인의 언어, 성소수자의 언어, 이주민의 언어… 언어를 빼앗겼던 이들은 지금도 계속 자신의 언어를 만들고 있다. 이어지는 동물에 대한 말들—“동물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동물은 열등하다, 동물은 위험하다”—은 현실의 목소리와 겹친다. ‘너희는 열등하다, 너희는 위험하다, 너희는 효율적이지 않다, 집에 있는 것이 너희에게 더 좋다.’ 여성에게, 장애인에게, 이주민에게, 빈민에게, 성소수자에게, 노인에게 지금도 쏟아지는 말들이다.
영화는 ‘나와 다른 존재’를 지배의 도구로 만들어내는 순간, 평등했던 사회가 어떻게 위계사회로 전락하는지를 거의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지배자는 말한다. “위기의 순간에는 공통의 적이 필요하다.” 이 문장은 자본주의·가부장제·국민국가의 본능 그 자체다. 체제가 흔들릴 때 권력은 하나의 ‘적’을 만든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자본을 향하지 않도록, 시민의 절망이 국가를 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이주민·난민·성소수자를 위험과 공포의 ‘적’으로 만드는 정치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 속 오즈는 동물들을 억압하기 위해 원숭이를 ‘중간관리자’로 세운다. 이것 역시 현실의 재현이다. 기업과 국가는 늘 주변부 집단 일부를 ‘권력의 조력자’로 삼아 다른 주변부 집단을 감시하고 규율하게 만든다. 또한 사회는 ‘정상이 되라, 더 우월한 인간이 되라, 효율적으로 돼라’는 능력주의의 명령을 내린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감시하고 서로를 통제하며 정상성이라는 좁은 문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국가나 자본이 사람들을 굳이 “직접” 처벌하지 않아도, 체제는 사람들이 알아서 스스로를 검열하고 서로를 평가하고 누군가를 배제하는 구조를 만든다. 정상성·혐오·감시·통제는 영화 속 마법사와 현실의 체제가 공유하는 폭력의 언어다.
초록색 피부라는 이유만으로 괴물 취급을 당해온 엘파바는 차별의 경험을 통해 다른 존재의 고통에 가장 먼저 반응한다. 현실에서도 억압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깊은 연대의 감각을 갖는다. 어떤 반차별 집회에 가더라도 모든 사회적 소수자의 깃발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유다. 억압받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동시에 누군가를 억압하는 정체성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책임과 연대의 감각으로 서로를 돕는다. “초록 마녀가 우리를 죽이려 한다!” - 엘파바의 힘이 체제에 위협이 되자, 오즈는 즉시 가짜뉴스를 퍼뜨린다. 악명을 만들고, 감정을 자극하고,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만든다.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낙인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유지·강화시켜, 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아도 개입할 마음조차 들지 않게 만든다.
혐중 집회에서 “중국인은 집단 강간범, 집단 살인범”이라고 외치던 깃발들, 성소수자를 “가정, 군대, 국가를 무너뜨리는 세력”으로 왜곡하는 정치 선동, 정신장애인을 “범죄 집단”으로 묘사하는 미디어의 조작 - 오즈의 마법사는 우리의 곁에 있다. 정상성과 혐오는 자본주의 위기의 순간, 사람들이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성실하게 발명되고 실행되어온 정치적 수단이다. 누군가를 비정상, 무쓸모, 괴물, 마녀로 만들어야 체제가 안전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혐오가 아닌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 분열이 아닌 연대, 체제의 언어를 넘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오즈의 마법사는 “거짓이라도 달콤한 말이 진실보다 사랑받는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혐오와 가짜뉴스는 자극적으로 귀에 쏙쏙 박힌다. 인권활동가들은 팩트로 대응하지만, 사실은 혐오보다 멀리 퍼지지 못해 우리를 지치게 하기도 한다. 그는 “진실은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체제의 본심이다. 승자는 자신들의 언어로 역사를 기록하고, 패자는 말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삭제된다. 그래서 사회운동은 언어를 되찾는 일이자, 기록하고 기억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일이다.
영화 후반, 동물들이 모든 희망을 잃고 오즈를 떠나려 할 때 엘파바는 말한다. “여기는 우리의 집이잖아. 싸워야 해. 우리는 우리의 집을 되찾을 수 있어.”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를 적확하게 비추는 문장이다. 정상성과 혐오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의 집을 빼앗고 있다. “공부하라”는 말로 어린이·청소년의 삶을, “스펙 쌓아라, 끝없이 노력하라”는 말로 청년들의 삶을 잠식한다. “날씬해야 한다, 젊어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대학 가야 한다, 결혼해야 한다, 출산해야 한다, 서울에 살아야 한다, 아파트를 사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와 같은 ‘정상적인 삶’의 기준을 만드는 말들이 우리가 누려야 할 삶을 앗아간다. 결국 이 폭력적인 사회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집이다. 누군가에겐 안락하고, 누군가에겐 불편하고, 누군가에겐 지옥 같은 집. 그래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남아서 싸워야 한다. 일부가 아닌 모두의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떠나야 할 존재가 아니다. 떠나야 할 것은 폭력의 사회구조다.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말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집을 되찾을 수 있어.” 엘파바처럼 싸워야 한다. 우리에겐 마법은 없지만, 우리는 이 길 위에서 함께 싸우는 ‘녹색 피부의 마녀들’이며, 동료이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99%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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