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의 날씨는 하루에도 사계절을 오가는 듯했다.
마치 청기백기 게임처럼 “겨울옷 넣고 간절기 옷 꺼내, 아니 간절기 옷 들어가고 겨울옷 다시 꺼내.”를 반복하다가,
5월임에도 25도를 육박하는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고는 본격적으로 옷장 정리를 시작했다.
두꺼운 옷들을 차곡차곡 접어 넣고, 얇은 셔츠며 티셔츠를 꺼내다가, 익숙한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여름이 다가오면 ‘반팔(옷)’이라는 단어를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몇 해 전부터 나에게는 그 단어가 이상하고 불편하게 다가왔다.
‘긴팔’과 ‘반팔’은 얼핏 보기엔 단순한 표현이지만, 결국 인간의 몸, 특히 평균적인 신체를 기준 삼아 어떤 것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팔이 반쯤 오는 소매’라니, 도대체 누구의 팔을 기준으로 반인가?
우리가 ‘당연한 말’이라 여겨왔던 많은 표현들 속에는 사실 어떤 몸, 어떤 정체성, 어떤 존재만을 기준으로 두고 그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을 은연중에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요소들이 숨어있다.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어 온 그 ‘당연함’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불편함이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가 상처와 배제를 만들어 낸다면 그 표현을 계속 써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차별적 언어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경계하며, 우리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고통받지 않는 사회가 되길 원한다.
표현을 바꾼다는 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조금씩 달리해보려는 시도이자, 당연했던 기준을 다시 묻는 태도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실수도 하지만, 이런 자각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의식적으로 반소매 긴 소매를 속으로 되뇌면서, 올해도 여름을 맞이할 옷장 정리를 마쳤다.

근래의 날씨는 하루에도 사계절을 오가는 듯했다.
마치 청기백기 게임처럼 “겨울옷 넣고 간절기 옷 꺼내, 아니 간절기 옷 들어가고 겨울옷 다시 꺼내.”를 반복하다가,
5월임에도 25도를 육박하는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고는 본격적으로 옷장 정리를 시작했다.
두꺼운 옷들을 차곡차곡 접어 넣고, 얇은 셔츠며 티셔츠를 꺼내다가, 익숙한 단어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여름이 다가오면 ‘반팔(옷)’이라는 단어를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몇 해 전부터 나에게는 그 단어가 이상하고 불편하게 다가왔다.
‘긴팔’과 ‘반팔’은 얼핏 보기엔 단순한 표현이지만, 결국 인간의 몸, 특히 평균적인 신체를 기준 삼아 어떤 것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팔이 반쯤 오는 소매’라니, 도대체 누구의 팔을 기준으로 반인가?
우리가 ‘당연한 말’이라 여겨왔던 많은 표현들 속에는 사실 어떤 몸, 어떤 정체성, 어떤 존재만을 기준으로 두고 그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을 은연중에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요소들이 숨어있다.
익숙함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어 온 그 ‘당연함’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불편함이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가 상처와 배제를 만들어 낸다면 그 표현을 계속 써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차별적 언어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경계하며, 우리는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고통받지 않는 사회가 되길 원한다.
표현을 바꾼다는 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조금씩 달리해보려는 시도이자, 당연했던 기준을 다시 묻는 태도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실수도 하지만, 이런 자각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다.
의식적으로 반소매 긴 소매를 속으로 되뇌면서, 올해도 여름을 맞이할 옷장 정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