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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위한성교육포괄적 성교육 담론의 현재와 포괄적 성교육 기본법이 필요한 이유

[목차]


1. 포괄적 성교육 담론의 현재 

     1-1. 포괄적 성교육의 개념과 명칭

     1-2. 한국 사회의 성교육 현실

     1-3. 유네스코 가이드라인과 포괄적 성교육의 구조

     1-4. 반대 논리와 그 허구

2. 포괄적 성교육 기본법이 필요한 이유

     2-1. 여성 대상 폭력이 만연한 사회

     2-2. 시민교육으로서의 성교육}

     2-3. 정치교육으로서의 성교육

     2-4. 미디어 리터러시(분석)를 가능하게 하는 성교육

     2-5. 포괄적 성교육 기본법의 제정 필요성


1. 포괄적 성교육 담론의 현재 

1-1. 포괄적 성교육의 개념과 명칭

‘포괄적 성교육(Comprehensive Sexuality Education, 이하 CSE)’은 유네스코를 포함한 유엔 기구들이 제시한 국제 가이드라인에 기반합니다. ‘포괄적’이라는 명칭은 ‘통합적’, ‘종합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대체 가능하며, 본질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 정체성, 관계,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두를 위한 성교육’이라는 명칭이 본 취지를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직역도 아니고 행정 용어로 들리진 않습니다만 어린이, 청소년, 노인,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 젠더,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가 잘 와닿습니다. 모든 사람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과 안전하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교육은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민주시민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라는 의미도 전할 수 있습니다.


1-2. 한국 사회의 성교육 현실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성교육은 생물학적 생식과 사춘기 설명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교사와 강사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짧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때문에 흔히 “성교육”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대개 이조차도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왜 만나게 되는지는 이야기해 주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들이 만나지 못하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습니다. 

청소년들이 성교육을 통해 가장 알고 싶은 주제를 조사해 보면 늘 데이트, 연애, 섹스, 자위, 성평등, 페미니즘, 성소수자 인권과 같은 것들이 최상위권에 있습니다.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는 성평등 성교육을 하는 대안학교에서만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성교육이 가능합니다. 공교육에서 이런 주제는 배제되어 있습니다. 주로 ‘성폭력 예방’이라는 이름으로 금지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성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접근으로 포괄적(통합적)이지 못한 상황입니다. 성폭력예방교육은 ‘평등하고 안전한 즐거운 성’에 대해서 먼저 알고 그것에 반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대게 그렇게 진행되지 않고/못하고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것들은 성폭력다’, ‘성폭력을 하지 마라’ 더한 경우에는 ‘성관계 하지 마라’, ‘성과 관련된 것들에 관심 갖지 마라’로 진행되곤 합니다. 지나치게 한정적이고 통제중심의 성교육은 한 명의 사람을 하나의 독립적이고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가 되기 어렵고 한 사회를 성평등한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전인적인 교육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성교육 시간은 성을 매개로 나의 생각과 행동,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 구조 등 수많은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돼야 합니다. 


1-3. 유네스코 가이드라인과 포괄적 성교육의 구조

유네스코의 포괄적 성교육 가이드라인은 ‘안전’을 최우선 목표로 합니다. 이를 위해 차별과 폭력을 예방하는 여덟 가지 핵심 영역(관계, 가치와 권리, 젠더 이해, 폭력과 안전 등)과 그에 따른 세부 주제 그리고 학습 목표(지식, 태도, 기술)가 나이대별로 체계화되어 있습니다.

유엔 유네스코는 유네스코의 포괄적 성교육 가이드라인이 2030년까지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공교육에서 성교육의 기준점을 잡는 가이드라인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모든 국가의 공교육에서 지침이 되는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보니 꽤나 보수적입니다. 국가마다 정치, 경제, 문화가 다르고 인권/성평등 인식 또한 차이가 큰데 모든 국가들이 기준으로 삼고 시행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돼야 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가이드라인의 가장 큰 목표는 안전입니다. 성교육을 통해 차별과 폭력이 없는 교실과 학교 그리고 차별과 폭력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안전교육입니다.
이 교육은 나선형 구조로 구성되어, 각 연령에서 동일 주제를 점층적으로 심화하며 반복 학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가이드라인에서 담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여덟 가지 핵심 개념과 각 핵심 개념 아래 소주제와 학습 목표가 있습니다. 여덟 개의 핵심 개념은 1번 관계, 2번 가치 권리 문화 섹슈얼리티, 3번 젠더의 이해, 4번 폭력과 안전, 5번 건강과 복지를 위한 기술, 6번 인간의 신체와 발달, 7번 섹슈얼리티와 성적 행동, 8번 성과 재생산 건강입니다. 여덟 가지 핵심 개념 안에 소주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핵심 개념 1번은 관계인데 1-1은 가족, 1-2는 친구 사랑 연애, 1-3은 관용 포용 존중, 1-4는 결혼과 육아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하나의 소주제 마다 학습 목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학습 목표는 나이에 맞게 단계적으로 점층적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5세에서 8세(유치원 때부터 초등1-2학년까지)에 달성해야 되는 학습 목표, 그 다음은 9세에서 12세(초등 3-6학년), 그 다음은 12세에서 15세(중학교 때)에, 그 다음은 15세에서 18세(고등학생 때)에 달성해야 되는 학습 목표로 나눠서 작성되어 있습니다. 학습 목표는 지식, 태도, 기술 세 가지 영역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여덟 가지 핵심 주제와 소주제들을 통해서 각 나이대에 필요한 지식, 태도, 기술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성에 대한 정보 전달을 넘어서,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필요한 역량을 기르기 위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1-4. 반대 논리와 그 허구

포괄적 성교육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다음 4가지가 대표적입니다. 첫째, 포괄적 성교육이 청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둘째,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을 가르쳐서 청소년들이 성교육을 받지 않았을 때보다 성관계를 더 빨리 하게 하고 더 많은 성관계 파트너를 갖게 한다. 셋째, 청소년들로 하여금 임신과 임신중단을 경험하게 하여 그들의 삶을 망친다. 넷째, 포괄적 성교육이 청소년들을 성소수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제 연구 결과들은 CSE가 오히려 성관계 시기를 늦추고, 성폭력 예방, 성적 자기결정권 향상, 자존감 증진 등 긍정적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포괄적 성교육은 청소년을 성소수자로 만들 수 없고 만들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다양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도록 가르칩니다. 포괄적 성교육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은 가이드라인의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고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포괄적 성교육 가이드라인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안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차별과 폭력을 예방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차별과 폭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차별과 폭력을 민감하게 반응하여 차별과 폭력을 막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 모두가 안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성적자기결정권이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와 정신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가 ‘월경은 부끄러운 것, 교육할 필요 없는 것’이라는 가치 판단을 가지고 자신의 자녀나 학생들에게 월경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녀와 학생들에게 성적자기결정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월경에 대해 대화하지 않는다면 월경에 대해 모르게 만들며, 이는 무지에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사회에 이미 가득 차 있는 월경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부끄럽고 더럽다고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섹스는 위험하고 더러운 행위’라는 가치 판단을 가지고 자신의 자녀나 학생들에게 섹스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녀와 학생들에게 성적자기결정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섹스에 대해 대화하지 않는다면 섹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없으며 정확한 판단과 실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는 무지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사회에 이미 가득 차 있는 섹스에 대한 부정확하고 부적절한 정보들로 인해 섹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지게 만듭니다. 또한 폭력적인 행위를 실행하거나 폭력적인 행위를 당해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반면,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자신의 자녀와 학생들은 자존감과 자기애가 증가하고 심신이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동일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포괄적 성교육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포괄적 성교육을 실시하는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을 비교해 본 결과, 포괄적 성교육을 받게 되면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해 명확히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그 결과 성폭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청소년들이 성관계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나이가 지연되기도 합니다. 이는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고,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성관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며, 동시에 다른 사람이 나에게 그 어떤 성적행동도 강요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관계를 경험하게 되는 나이가 지연된다는 사실보다 그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또한 정확한 콘돔 사용법을 실천하게 되어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확률과 원치 않는 임신 중단을 하게 되는 확률이 줄어들게 됩니다. 한 국가(사회) 내에서도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하기 전과 후를 비교한 연구들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는 유엔 유네스코의 연구조사를 비롯하여 매년 세계성학회(WAS: World Association for Sexual Health)에 참여하여 자신의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수많은 학자, 연구자, 교수, 대학원생, 활동가들에 의해 같은 결과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절제교육, 금욕교육, 순결교육, 성경적 성교육 등은 긍정적인 효과가 전혀 없거나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유엔 유네스코의 포괄적 성교육 가이드라인은 안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에도 성소수자를 차별하거나 폭력적으로 대하면 안된다는 내용으로 나옵니다. 모든 성별정체성과 모든 성적지향을 동일선상에 두고 배우게 하기 보다는,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와 같은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오는 식입니다. 그렇기에 시스젠더와 이성애자 중심으로 쓰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이드라인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신 분들은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가이드라인의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 가이드라인이 청소년들을 성소수자가 되게끔 조장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이 가이드라인을 읽어본 적이 없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읽어보고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면 둘 중 하나입니다. 알고도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청소년들은 ‘성소수자를 차별하면 안된다’는 문장만 읽어도 성소수자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2. 포괄적 성교육 기본법이 필요한 이유

2-1. 여성 대상 폭력이 만연한 사회

전 세계 딥페이크 성범죄 영상물 피해자의 53%가 한국인 여성이라는 조사가 나왔습니다(시큐리티 히어로, 2024). 해외 언론들은 텔레그램 ‘겹지방’, ‘지인능욕방’ 등의 사례를 함께 언급하며 한국을 딥페이크 성범죄의 진앙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지인들의 얼굴을 포르노 영상에 합성해 딥페이크 성범죄 영상을 만든 가해자들은 자신의 가족, 친척, 친구, 교사, 동료 등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2024년 1~7월 딥페이크 성범죄자로 경찰에 잡힌 피의자는 178명이었으며 그 중 131명이 10대 남성이었습니다. 

2025년 2~3월 경찰은 일본, 말레이시아 등 6개국 경찰과 ‘사이버 가디언 작전’이라는 특별 단속을 진행했고 이를 통해 아동성착취물 범죄자 435명을 검거했습니다. 그중 374명이 한국인이었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은 10대 남성(10대 213명, 20대 127명)이었습니다. 

가해자의 다수가 남성 청소년이라는 점이 특별히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요즘 10대 남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와 같은 질문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10대 남성”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지 ‘요즘 청소년의 일탈’이 아니라, 여성과 성을 대상화하고 지배하려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깊게 뿌리내려 있기 때문입니다. 

1997년 “빨간마후라 사건”이라고 불리는 성폭력이자 디지털 성범죄물 유포 사건이 있었고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연예인 00양 비디오 사건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100만 명 이상의 유료회원을 가지고 있었던 소라넷, 양진호 웹하드 카르텔, 손정우 웰컴투비디오, N번방, 박사방, 딥페이크 사건 등으로 지난 30년 동안 디지털 성범죄는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30년 동안 이어져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그 규모가 커졌습니다. 이제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처벌은 거의 되지 않았으며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만들고 유통(판매)할 수 있는 방법은 점점 더 다양해졌고 더 쉬워졌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국가 기관들은 늘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했고 실제로 처벌은 강해졌습니다. 이제 디지털 성범죄 같은 경우에는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다운로드 하는 사람, 소지하고 있는 사람, 판매하거나 구입하는 사람까지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성범죄는 멈춰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성과 성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성범죄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모든 범죄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이 여성을 향해 가지는 인식) 때문입니다. 가부장제 사회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성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야(그렇게 돼야 해)’, ‘여성은(섹스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거야’와 같은 인식이 문화처럼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소리내어 이런 말을 뱉는 사람은 소수일 수 있지만 한국 사회는 대부분의 남성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입니다. 정치, 경제, 언론, 미디어가 그러한 문화와 풍토를 만들어 냅니다. 매년 100명 이상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남성들(남편, 전 남편, 애인, 전 애인)에게 살해당합니다. 3일에 한 명 꼴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이에 대한 통계를 내지 않고 있습니다. 여성단체들에서 기사에 나온 사건들을 취합해서 매년 정리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인 여성이 만약 자신의 사망 원인을 “살인”으로 정하고 싶다면 그 확률을 가장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연애와 결혼이라고 합니다. 충격적입니다. ‘연애를 하고자 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여성들의 답변 1위는 ‘폭력’이었습니다. 남성들의 답변 1위는 ‘거절’이었습니다. 이 ‘거절’과 ‘폭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이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게 해주면 됩니다. 상대방(여성)은 나의 제안에(혹은 나를) 거절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도 생각과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면 됩니다. 그것이 성적자기결정권입니다. ‘원할 때 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원하지 않을 때 하지 않을 수 있다, 거절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이 거절하면 존중해야 된다’, ‘나의 몸과 마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 사람 자체를 존중하고 그 사람과 동의(적극적인 합의)를 만들어 가는 것’, ‘그렇게 책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성교육입니다. 합당한 수준의 법적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성과 여성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포괄적 성교육은 이러한 문화적 전환의 핵심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성평등은 다른 사람들과 더 나은 관계를 맺으며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태도이며 우리가 사는 사회를 모두에게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2-2. 시민교육으로서의 성교육

여성 대상 폭력이 만연한 사회는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등)에 대한 폭력이 만연하게 합니다. 힘(물리적인 힘, 경제적인 힘, 권력에 의한 힘 등)의 논리가 작동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효율, 성과, 공정한 경쟁 등의 이름으로 합리화 됩니다. 승자독식의 경쟁사회의 모습은 교실 속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니, 사실은 교실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현재 공교육은 시험 성적 중심의 서열화 구조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성교육, 인권교육, 시민교육, 정치교육, 노동교육과 같이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타인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평등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가게 하는 교육들이 공교육 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대학입시라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전혀 필요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4세고시, 7세고시,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생을 위한 의대반과 같이 “아동학대”가 되어 버린 선행학습으로 인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미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을 겪는 어린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스마트폰 중독(게임, 영상 등), 폭력, 마약, 자해, 자살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현상은 “요즘 아이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 구조적 관점이 실종된 각자도생 사회의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의 중학생들(15세)의 학업성취(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내 상위권(수학 2위, 과학 2위, 국어(읽기) 3위 등)인 반면 교우관계(36개국 중 36위),협력(26위), 주체성(20위), 자주성(33위)은 최하위 혹은 하위권으로 나타났습니다(한국교육개발원, 2025). 시험 성적을 잘 받게 하는 것만이 학교의 유일한 목적이다보니 친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떻게 협력하여 함께 살아갈지는 가르치거나 배우거나 연습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문제의 정답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 돼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사고하고 성찰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주체성과 자주성이 길러질 수 없습니다. 양육자도 교사도 온 세상에 모두 나에게 ‘공부해라’는 말만 하는 세상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건강한 자아, 강한 자아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테어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다”라고 말하며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권위에 굴복하고 권위에 의존하는 사람이 되며 파시즘과 극우에 매혹되기 쉽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몇 년 새 한국 사회 내 극우적인 메시지가 차지하는 공간이 아주 커졌습니다. 아도르노는 잘못된 성교육과 성교육의 부재는 굴종적인 인간을 만들며 자아가 약한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포괄적 성교육을 통해 강한 자아를 가진 시민들을 양성할 수 있는 공교육을 만들어야 합니다. 


2-3. 정치교육으로서의 성교육 

선거날 투표하러 나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만이 민주주의 교육이거나 정치 교육이 아닙니다. 투표하는 날만 정치하는 날이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것이 정치이고 민주시민의 의식, 태도, 기술과 연결돼 있습니다. 시민으로서의 나, 노동자로서의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나누는 말 한 마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도 돌보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 민주 시민인 것입니다. 성숙한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공교육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포괄적 성교육은 자신을 탐구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사람이 될 수 있게 합니다.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사람(인격체)으로서 존중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인정하고 고통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집니다. 나, 가족, 친한 친구, 우리 반 모든 친구들, 우리 학교 모든 친구들, 우리 마을, 우리 도시, 우리 국가, 그리고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이주민, 난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모든 사람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포괄적 성교육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민주시민 교육이고 정치교육입니다.


2-4. 미디어 리터러시(분석)를 가능하게 하는 성교육

10대 청소년, 특히 남성 청소년은 유튜브, 온라인 커뮤니티, 또래 집단 등을 통해 극우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메시지에 쉽게 노출되고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더 살기 힘든 세상이 됐다’, ‘남성들이 억울하다’, ‘여성 정책은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다’와 같은 메시지들이 저성장/마이너스 성장 시대에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여성 정책 때문에 여성들은 편해졌고 남자들은 힘들어졌다’, ‘데이트, 연애, 섹스를 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는데 여자들이 모두 “잘난 남자”를 만나려고 하기 때문에 돈이 없거나 못생긴 남자는 데이트도 연애도 섹스도 못하게 된다’와 같이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과거”를 그리워하게 됩니다(심지어 본인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가 “옳았다”고 믿으며 그리워합니다). ‘가정과 사회의 주인은 남성이다’, ‘남성은 권위와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 ‘여성은 남성의 말을 들어야 한다’와 같은 구시대적인 메시지가 성평등이 당연한 시대에 태어난 젊은 남성들에게는 “새로운 메시지”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평등 인식이 강해진 이 시대의 여성들은 더이상 그렇게 살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여성들에게 분노하고 폭력을 쓰게 되는 남성들이 생깁니다.

포괄적 성교육은 단지 성에 대한 지식 전달 뿐만 아니라, 어떤 미디어를 접할 때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든 정보인가’를 비판적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눈과 귀를 통해 내 머릿속에 들어오려고 하는 메시지를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입니다. 모든 미디어(글, 그림, 영상 등)를 누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누구에게, 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썼는지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어야 내가 그 중에서 무엇을 어떻게 내 삶에 받아들일 것인가(적용할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결정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 가이드라인에서도 미디어 정보 해독력, 디지털 기술의 안전한 사용에 관한 목표가 연령별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핵심 개념 4번 [폭력과 안전]의 세부 주제 4.3 “정보통신기술의 안전한 사용”을 보면 5-8세, 9-12세, 12-15세, 15-18세 각 나이대에 맞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사용에 관한 지식, 태도,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목표를 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핵심 개념 5번 [건강과 복지를 위한 기술]의 세부 주제 5-4 “미디어 정보 해독력과 섹슈얼리티”를 보면 5-8세, 9-12세, 12-15세, 15-18세 각 나이대에 맞게 미디어의 역할과 영향 그리고 미디어를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식, 태도, 기술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5. 포괄적 성교육 기본법의 제정 필요성

대만은 25년 전 한 청소년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성평등교육법’을 제정하며 국가 차원의 전면적인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2000년 4월 20일 대만의 한 고등학교에서 성별이분법적인 구분에 맞지 않는 성표현을 한다고 괴롭힘을 당하던 학생(지정성별 남성이었으며 긴 시간 “너무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함)이 화장실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학생은 화장실에서 언어적, 육체적, 성적 폭력을 경험하곤 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사망한 날에도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선생님께 화장실 사용을 허락받은 후 화장실을 사용하러 나갔습니다. 그 후 화장실에서 머리와 코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병원으로 이동되었으나 사망하였습니다. 그 학생이 가지고 있었던 질병 때문에 기절을 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혀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개골 손상이 그렇게 발생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주장과 함께 평소 그 학생을 괴롭히던 학교 폭력의 가해자들이 살인을 저질렀을 것으로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이 사건은 Yeh Yung-chih incident(예융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1980년도부터 진행되어 오던 페미니즘 운동이 힘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0년 10월, 대만 교육부는 "새로운 캠퍼스 캠페인: 젠더 폭력 반대"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성별, 성별정체성, 성표현, 성적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교육부에 '성평등교육위원회'를 신설해 성평등 교육정책을 확대했습니다. 사건이 있었던 다음 해인 2001년의 성교육 추진 주제를 '다양한 성'과 '학교의 안전'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에는 대만에 "성평등교육법(Gender Equity Education Act"이 제정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에도 2003년 사망한 육우당을 비롯해 수많은 예융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 제정이나 교육 목표 수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많은 한국의 예융치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대만과 같은 성교육법이 있었다면 달랐을 것입니다. 한국 역시 성평등, 성적 자기결정권, 차별 예방 교육을 법적·제도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성소수자에게 가혹한 사회입니다. 대부분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부모, 교사, 친구들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인정받지 못할까봐 숨기고 살아갑니다. 비청소년(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자신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숨 죽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힘든 트랜스젠더들 중에서는 일상적으로 시선에 의한 폭력과 언어 폭력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는 성소수자에 대한 구타와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자해와 자살 문제도 심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폭력을 막거나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교육을 통해 다양한 성별, 성별정체성, 성표현, 성적지향에 대한 지식, 태도, 기술을 익힐 수 있어야 합니다. 

올해는 이미 한국의 학교에서 성교육이 의무화 된지 25년이 되는 해입니다. 법에 의해 시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 및 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각 교육청이 자체적으로 성교육 지침을 마련하여 매년 15시간의 성교육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육 내용은 일관성과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독립적인 법률과 시수, 평가 기준이 없습니다. 2001년부터 매년 10시간(성폭력예방교육 2시간 포함)으로 진행하다가 2013년부터는 15시간(성폭력예방교육 3시간 포함)으로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성교육 시간은 독립적인 시수가 마련돼 있지 않고 범교과 영역으로 진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교과 수업(생물, 체육, 보건, 도덕 등)에서 신체 혹은 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성교육을 했다고 체크하여 15시간을 채우는 상황입니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마련한 가이드라인이나 평가 지표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교육부가 2015년에 “국가 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가 심각한 수준의 성별이분법과 성역할고정관념 등 부적절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은근슬쩍 교육부의 자료실에서 자료를 내렸습니다. 아직도 공식적으로 폐지 선언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국가 수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공식적으로 폐지 선언하고 “유엔 유네스코의 포괄적 성교육 가이드라인”에 따라 교육하겠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매년 15시간씩 성교육을 할 수 있는 그 시간에 누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어떤 목표를 가지고 가르치고 배우고 익히게 할 것인가를 정해야 합니다. 포괄적 성교육은 여성폭력, 성소수자 차별, 청소년의 위기, 사회적 혐오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해법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교육의 방향 전환이며, 그 중심에 포괄적 성교육이 있습니다. 이를 제도화하고 국가의 책임으로 명확히 하기 위해 포괄적 성교육 기본법 제정은 시급하고도 필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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