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적이지만 가장 정치적인
화장실은 누구나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어야 한다. 화장실을 가야 할 때 화장실을 빠르고 안전하게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당신은 화장실을 갈 수 없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화장실 앞에서 어떠한 고민도 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성별이분법적이고 비장애인, 성인중심적인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정체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공간은 의식을 지배한다. 화장실은 계속해 이용자로 하여금 성별이분법과 비장애인의 몸을 ‘정상의 몸’을 학습하도록 만든다. 자신에게 적합한 화장실이 없는 장소에서는, 그 공간을 온전히 점유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 곳이 학교라면 배울 권리가 박탈될 것이고, 직장이라면 일할 권리가 박탈된다. 한국사회는 ‘정상기준’에 포섭된 권력에 의해 ‘허락된 존재’에게만 화장실 공간을 내어준다. 최소한의 기본권인 화장실을 사용할 권리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안전하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화장실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져버린다. 이처럼 화장실은 가장 사적이지만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며, 화장실이 제시하는 ‘정상’의 기준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을 규율한다. 다양성과 포함의 가치가 외면되는 이 사회의 단면이 공간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 바로 화장실이다. 픽토그램부터 여성=치마, 남성=바지라는 표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납작하게 만든다. 화장실이 그저 화장실일 수는 없을까?
있지만 없는 사람들의 화장실
소변을 자주 참아야 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질병인 방광염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실제 이용을 고려하지 않은 최소한의 법적기준만 맞춰 놓은 까닭에 장애인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기 어려운 장애인, 청소도구함으로 전락한 장애인화장실,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에서 어느 곳도 들어갈 수 없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그리고 여성이 있을 곳으로 여겨지지 않는 공간에서의 여성이다. 여성화장실이 없는 노동현장에서, 여성은 과연 일을 할 수 있을까? 제2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총 다섯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여성 정치인 박순천의 오랜 지병은 방광염이었다. 정치를 여성의 일이라 여기지 않는 문화는 국회에 여성화장실을 둘 필요를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다. 박순천은 오랫동안 국회활동을 하면서도 ‘오줌권’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소변을 참아가며 일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3월 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여성 신입 공채 ‘0명’인 현대차 공장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 보도에서는 지금까지도 공채로 단 한번도 여성노동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현재 현대차 공장의 정규직 여성은 사내하청 소속이었다가 법원의 불법파견 판결로 정규직이 된 300명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여성은 거친 일을 회피하기 때문’이라는 성별고정관념에 근거한 편견은 이미 존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지울 뿐, 존재하는 이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남성에게 어울리는 일로 여겨진 자동차 공장의 노동현장에는 여성화장실조차 없었다. 그나마 5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몇 칸의 여성화장실은 충분하지 않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의 화장실
시스젠더 여성에게도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성별이분법적인 기존의 화장실에 선택지는 있으나, 화장실에서 안전한 이용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는 여성이 일상에서 안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범죄를 예감하며 살아가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불법촬영은 만연하고, 페미사이드는 지속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성의 안전함을 느끼기 어려운 화장실 문제 때문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한 논의는 보류하는게 맞을까? 화장실에서 일어난 많은 여성대상 범죄들은 여성화장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즉, 성별분리가 여성에게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이 화장실에서도 안전하지 않은 것이지, 여성이 안전한 사회인데 화장실에서만 유독 안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공고한 성별이분법과 성별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며, 이것이 돈벌이가 되는 것이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철저한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만든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은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사람들이 맞서 싸우고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이런 구조는 여성뿐 아니라, 젠더규범에 걸맞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 모두를 배제한다. 성소수자 뿐 아니라, 무성적인 존재이기를 강요받는 장애인도 포함된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 여성에게 안전한 화장실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인식되는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여성들의 화장실 선택지를 빼앗는 게 아니다.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던 사람들에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기존의 화장실 자체가 어떤 구조와 문화 가운데서 만들어져 용인되고 지속되고 있는지 고민하고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이야기하면 항상 나오는 키워드는 바로 ‘유니버설디자인(Universal Design)’이다. 한국에서 유니버설디자인은 유행이 된 지 오래고, 많은 지자체에서 유니버설디자인조례를 만들기도 했다. 장애인, 노인, 영유아, 임산부 등 어느 누구에게도 배리어(barrier)가 존재하지 않는 접근가능한(accessible) 공간을 구축하겠다는 건데, 놀랍게도 한국의 유니버설디자인조례나 가이드라인에는 모두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을 전제하고 있다. 장애인화장실조차도 어느 화장실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1개 이상을 둔다는 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북미나 유럽까지 가지 않고도, 일본의 유니버설디자인은 대체로 매우 잘 도입되어 있다. 일본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면서 화장실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곳곳에 있다는 점이다. 공항을 비롯해 관광지, 쇼핑센터 등에 설치된 유니버설디자인에 부합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발견하기 쉽다. 화장실마다 차이가 있지만 장루장애인이나 와상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이 만들어져 있고, 무지개 깃발과 ‘All gender’라는 표시가 화장실 문 앞에 붙어있다.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모든 존재를 환대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유니버설하지 않은 유니버설디자인은 ‘허락받은 존재’의 범위와 레벨을 정할 뿐, 모든 종류의 배리어(barrier)를 없애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기반시설을 마련하겠다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하는 척’이 있을 뿐 ‘하는 것’이 없다.
한국, 어디까지 왔나
한국사회에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 담론은 어디까지 왔을까?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과 ‘오줌권’에 대해 이야기하면, 변화가 필요한 사안들 중 시급하지 않은 이슈로 여겨졌다. 산재한 인권문제가 많으니 화장실은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화장실에 가야 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시급한 문제는 있을까? 성별이분법과 비장애인, 성인 중심적인 화장실에 적합하지 않은 몸으로 배제되어 ‘오줌권’이라는 최소한의 기본권이 박탈되는 수많은 시간들은, 이를 애초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이들에 의해 쉽게 외면됐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왜 당장 필요한가에 대해 한국다양성연구소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수십번을 말해 온 결과 비로소 이 사회는 이 이야기를 조금씩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사회 곳곳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이 성과를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정책은 후퇴하고 있다. 지난 3월 1일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재발을 막는 후속조치로 공공건물의 남녀화장실 동선을 분리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심지어 이것을 ‘공중화장실 유니버설디자인 적용 사업’이라고 명명했다. 성별분리를 더욱 철저하게 함으로써 페미사이드를 막겠다고 한다. 페미사이드의 근본 문제인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인지조차 하지 않는 성별불평등문제, 여성의 몸을 도구화/대상화하는 남성중심적인 강간문화는 삭제되었다. 그러면서 남녀동선분리한 화장실을 통해 할 일을 다한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대응방식은 ‘강남역 살인사건’때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페미사이드는 사라지고 엉뚱하게 ‘화장실’과 ‘정신장애’만 남았다. 이는 애초 모두의 ‘유니버설디자인’도 아니고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빛의 속도로 화장실을 갈 수 없다면
안타깝게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 싸움은 멀었다. 여전히 기존 화장실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가급적 밖을 나가지 않거나 외출을 하더라도 물을 마시지 않고 이용이 가능한 화장실을 찾아 수십분을 사용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히든피겨스>에서 인간계산기로 불리던 천재 수학자 캐서린은 NASA에 일하면서 회사 내에 단 하나뿐인 유색인종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왕복 40분을 사용해야 했다. 근무시간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화를 내는 백인남성에게 캐서린이 ‘이 건물에는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인지조차 되지 않던 문제가 비로소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성별이분법적이고 비장애인, 성인 중심적인 화장실은 여전히 수많은 캐서린에게 시간을 빼앗고 있다. 그 시간을 빼앗음으로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모든 사람과 트랜스젠더가 그러했고,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함께하는 장애인, 시혜적으로 ‘최소한’으로만 마련된 장애인화장실을 찾아다니는 장애인, 다양한 장애유형을 고려하지 않은 기존의 화장실을 편리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와상장애인, 장루장애인 등이 그러하다. 존재가 부정당한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할 공간조차 마련하지 않는 순간, 시간은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최소한의 권리보장을 위한 진지한 논의와 실천이 이뤄져야 한다. 의식변화부터 시작해 근본적으로 제도의 변화까지 필요하다. 엉망으로 만들어진 유니버설디자인조례들에도 변화를 요구해야 하고, 잘못된 적용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할 일은 많고, 체력은 딸린다. 하지만 우리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다. 연대의 시간을 통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고민과 실천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추천영상] 한국다양성연구소, 모두를 위한 화장실 미니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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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적이지만 가장 정치적인
화장실은 누구나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어야 한다. 화장실을 가야 할 때 화장실을 빠르고 안전하게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당신은 화장실을 갈 수 없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화장실 앞에서 어떠한 고민도 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성별이분법적이고 비장애인, 성인중심적인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정체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공간은 의식을 지배한다. 화장실은 계속해 이용자로 하여금 성별이분법과 비장애인의 몸을 ‘정상의 몸’을 학습하도록 만든다. 자신에게 적합한 화장실이 없는 장소에서는, 그 공간을 온전히 점유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 곳이 학교라면 배울 권리가 박탈될 것이고, 직장이라면 일할 권리가 박탈된다. 한국사회는 ‘정상기준’에 포섭된 권력에 의해 ‘허락된 존재’에게만 화장실 공간을 내어준다. 최소한의 기본권인 화장실을 사용할 권리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안전하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화장실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져버린다. 이처럼 화장실은 가장 사적이지만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며, 화장실이 제시하는 ‘정상’의 기준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을 규율한다. 다양성과 포함의 가치가 외면되는 이 사회의 단면이 공간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 바로 화장실이다. 픽토그램부터 여성=치마, 남성=바지라는 표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납작하게 만든다. 화장실이 그저 화장실일 수는 없을까?
있지만 없는 사람들의 화장실
소변을 자주 참아야 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질병인 방광염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실제 이용을 고려하지 않은 최소한의 법적기준만 맞춰 놓은 까닭에 장애인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기 어려운 장애인, 청소도구함으로 전락한 장애인화장실,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에서 어느 곳도 들어갈 수 없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그리고 여성이 있을 곳으로 여겨지지 않는 공간에서의 여성이다. 여성화장실이 없는 노동현장에서, 여성은 과연 일을 할 수 있을까? 제2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총 다섯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여성 정치인 박순천의 오랜 지병은 방광염이었다. 정치를 여성의 일이라 여기지 않는 문화는 국회에 여성화장실을 둘 필요를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다. 박순천은 오랫동안 국회활동을 하면서도 ‘오줌권’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소변을 참아가며 일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3월 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여성 신입 공채 ‘0명’인 현대차 공장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 보도에서는 지금까지도 공채로 단 한번도 여성노동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현재 현대차 공장의 정규직 여성은 사내하청 소속이었다가 법원의 불법파견 판결로 정규직이 된 300명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여성은 거친 일을 회피하기 때문’이라는 성별고정관념에 근거한 편견은 이미 존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지울 뿐, 존재하는 이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남성에게 어울리는 일로 여겨진 자동차 공장의 노동현장에는 여성화장실조차 없었다. 그나마 5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몇 칸의 여성화장실은 충분하지 않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의 화장실
시스젠더 여성에게도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성별이분법적인 기존의 화장실에 선택지는 있으나, 화장실에서 안전한 이용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는 여성이 일상에서 안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범죄를 예감하며 살아가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불법촬영은 만연하고, 페미사이드는 지속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성의 안전함을 느끼기 어려운 화장실 문제 때문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한 논의는 보류하는게 맞을까? 화장실에서 일어난 많은 여성대상 범죄들은 여성화장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즉, 성별분리가 여성에게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이 화장실에서도 안전하지 않은 것이지, 여성이 안전한 사회인데 화장실에서만 유독 안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공고한 성별이분법과 성별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며, 이것이 돈벌이가 되는 것이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철저한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만든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은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사람들이 맞서 싸우고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이런 구조는 여성뿐 아니라, 젠더규범에 걸맞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 모두를 배제한다. 성소수자 뿐 아니라, 무성적인 존재이기를 강요받는 장애인도 포함된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 여성에게 안전한 화장실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인식되는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여성들의 화장실 선택지를 빼앗는 게 아니다.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던 사람들에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기존의 화장실 자체가 어떤 구조와 문화 가운데서 만들어져 용인되고 지속되고 있는지 고민하고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이야기하면 항상 나오는 키워드는 바로 ‘유니버설디자인(Universal Design)’이다. 한국에서 유니버설디자인은 유행이 된 지 오래고, 많은 지자체에서 유니버설디자인조례를 만들기도 했다. 장애인, 노인, 영유아, 임산부 등 어느 누구에게도 배리어(barrier)가 존재하지 않는 접근가능한(accessible) 공간을 구축하겠다는 건데, 놀랍게도 한국의 유니버설디자인조례나 가이드라인에는 모두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을 전제하고 있다. 장애인화장실조차도 어느 화장실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1개 이상을 둔다는 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북미나 유럽까지 가지 않고도, 일본의 유니버설디자인은 대체로 매우 잘 도입되어 있다. 일본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면서 화장실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곳곳에 있다는 점이다. 공항을 비롯해 관광지, 쇼핑센터 등에 설치된 유니버설디자인에 부합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발견하기 쉽다. 화장실마다 차이가 있지만 장루장애인이나 와상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이 만들어져 있고, 무지개 깃발과 ‘All gender’라는 표시가 화장실 문 앞에 붙어있다.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모든 존재를 환대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유니버설하지 않은 유니버설디자인은 ‘허락받은 존재’의 범위와 레벨을 정할 뿐, 모든 종류의 배리어(barrier)를 없애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기반시설을 마련하겠다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하는 척’이 있을 뿐 ‘하는 것’이 없다.
한국, 어디까지 왔나
한국사회에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 담론은 어디까지 왔을까?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과 ‘오줌권’에 대해 이야기하면, 변화가 필요한 사안들 중 시급하지 않은 이슈로 여겨졌다. 산재한 인권문제가 많으니 화장실은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화장실에 가야 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시급한 문제는 있을까? 성별이분법과 비장애인, 성인 중심적인 화장실에 적합하지 않은 몸으로 배제되어 ‘오줌권’이라는 최소한의 기본권이 박탈되는 수많은 시간들은, 이를 애초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이들에 의해 쉽게 외면됐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왜 당장 필요한가에 대해 한국다양성연구소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수십번을 말해 온 결과 비로소 이 사회는 이 이야기를 조금씩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사회 곳곳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이 성과를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정책은 후퇴하고 있다. 지난 3월 1일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재발을 막는 후속조치로 공공건물의 남녀화장실 동선을 분리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심지어 이것을 ‘공중화장실 유니버설디자인 적용 사업’이라고 명명했다. 성별분리를 더욱 철저하게 함으로써 페미사이드를 막겠다고 한다. 페미사이드의 근본 문제인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인지조차 하지 않는 성별불평등문제, 여성의 몸을 도구화/대상화하는 남성중심적인 강간문화는 삭제되었다. 그러면서 남녀동선분리한 화장실을 통해 할 일을 다한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대응방식은 ‘강남역 살인사건’때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페미사이드는 사라지고 엉뚱하게 ‘화장실’과 ‘정신장애’만 남았다. 이는 애초 모두의 ‘유니버설디자인’도 아니고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빛의 속도로 화장실을 갈 수 없다면
안타깝게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 싸움은 멀었다. 여전히 기존 화장실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가급적 밖을 나가지 않거나 외출을 하더라도 물을 마시지 않고 이용이 가능한 화장실을 찾아 수십분을 사용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히든피겨스>에서 인간계산기로 불리던 천재 수학자 캐서린은 NASA에 일하면서 회사 내에 단 하나뿐인 유색인종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왕복 40분을 사용해야 했다. 근무시간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화를 내는 백인남성에게 캐서린이 ‘이 건물에는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인지조차 되지 않던 문제가 비로소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성별이분법적이고 비장애인, 성인 중심적인 화장실은 여전히 수많은 캐서린에게 시간을 빼앗고 있다. 그 시간을 빼앗음으로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모든 사람과 트랜스젠더가 그러했고,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함께하는 장애인, 시혜적으로 ‘최소한’으로만 마련된 장애인화장실을 찾아다니는 장애인, 다양한 장애유형을 고려하지 않은 기존의 화장실을 편리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와상장애인, 장루장애인 등이 그러하다. 존재가 부정당한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할 공간조차 마련하지 않는 순간, 시간은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최소한의 권리보장을 위한 진지한 논의와 실천이 이뤄져야 한다. 의식변화부터 시작해 근본적으로 제도의 변화까지 필요하다. 엉망으로 만들어진 유니버설디자인조례들에도 변화를 요구해야 하고, 잘못된 적용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할 일은 많고, 체력은 딸린다. 하지만 우리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다. 연대의 시간을 통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고민과 실천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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