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위한화장실 활동을 하는 한국다양성연구소, 화장실에 무척 까다롭지요. 이런 저희를 만족시키는 화장실이 도쿄-시부야에 있다고 해서, 김지학 소장이 자비로 출장 다녀왔답니다.
한국다양성연구소를 일본까지 불러들인 화장실은, 더 도쿄 토일렛입니다.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 (사진출처 : THE NIPPON FOUNDAITION 홈페이지)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
일본은 ‘사회 구성원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대안을 제시하는, 가치 기반 디자인’ 유니버설 디자인을 사회 곳곳에서 잘 실천해내고 있습니다. 그런 일본이, 2020년을 기점으로 “공공화장실”의 모습을 한 번 더 탈바꿈 시키는데요.
바로, 일본재단(The Nippon Foundation)의 공중화장실 개선사업-'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입니다. 일본이 '2020년 도쿄올림픽'을 유치하고 손님맞을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공중화장실 모습을 살펴 보니 손님맞이에 불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고 해요. 그 이유가, 많은 공공 화장실이 성별, 나이, 장애 유무에 따라 일부 사용자들의 접근을 막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고, 그 성찰과 보완의 결과로 ‘공중화장실이 정말 공공을 위한 것인지’ 짚어보고 모두를 위한 화장실의 모습으로 바꾸는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를 진행한 일본재단 THE NIPPON FOUNDAITION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모두를 위한 공중화장실"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를 위해 ‘일본재단’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에게 각 공중화장실에 있는 한 칸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며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전달했습니다.
"화장실의 구성요소는 휠체어가 지나다닐 수 있는 충분한 공간, 인공 배설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루 위생시설, 아기 의자와 기저귀 테이블 등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라는 것은 또한 소수자 중 레즈비언・게이・트랜스젠더・바이섹슈얼・퀴어(LGTBQ+)를 고려한 화장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화장실의 모습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 “나이와 장애의 유무 무관” “영유아, 어린이, 장애인도 고려”하며 이렇듯 화장실에 대한 기준을 다시 정하는 과정이 되었다고 해요.
도쿄토일렛 화장실 입구의 안내문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누구든지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장루(질병으로 인해 장기의 일부를 복부밖으로 꺼내 변이 배출되게 만든 출구)주머니를 착용하는 사람들이 이를 편하게 세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전용변기, 다목적 침대, 기저귀교환대, 다목적 발판 등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화장실의 모습에서, 배제되는 사람(화장실을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을 찾으실 수 있을까요? 바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의 모습입니다
왼쪽부터, 기저귀교환대, 장루주머니세척용변기, 낮은 변기, 사용자의 앉은 위치에서 알맞게 손이 닿는 손잡이와 낮은 휴지걸이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장루주머니를 세척할 수 있는 전용변기가 설치된 화장실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보여드릴게요. 가운데 깊은 세면대? 처럼 보이는 설치물이 바로 그것인데요 한국 화장실에는 일부 큰 병원과 센터 등에 설치하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설치된 곳을 찾기 힘듭니다. 이는 장루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거의 없다는 얘기가 되지요. 화장실엘 갈 수 없는데 외출, 취업, 학업 등 어떤 일상생활을 할 수 가 있을까요?
화장실 - 성별 구분 해야만 할까?
성별 구분이 있는 화장실과 모두를위한화장실이 함께 위치하고 있는 모습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지정성별로 구분되어 사용하는 화장실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모두를위한화장실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모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쿄토일렛 뿐 아니라 지하철역사, 공원, 박물관 등 공공기관은 물론 영리기업이 운영,유지하는 건물에서도 이런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도 비슷한 모습이 있는거 같기는 해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아마 성별구분된 화장실 + 성별구분된 다목적 화장실의 모습이 대부분일텐데요. 그럼 지정성별이 다른 양육자와 피양육자, 지정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함께 이동하는 경우는 그 "구분된" 화장실 앞에서 또 고민을 하시게 되겠지요. 쩝.
성별 구분이 따로 없이 모두를위한화장실 두 칸이 나란히 위치한 모습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성별구분 화장실과 함께 반드시 모두를위한화장실을 설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대안은, 모두를위한화장실이 여러개 있는 것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확인하실 수 있는 것 처럼요. 이렇게 성별 구분을 따로 하지 않으면, 어딘가는 줄이 길고 어느쪽은 줄이 아예 없어서, 긴 줄에 선 사람이 '저쪽 화장실을 이용해도 되나? 안되나? 아 진짜 급한데..." 라고 생각하는 일 자체가 없어지겠지요.
더 도쿄 토일렛 17개소의 위치 지도 (이미지 출처 : The Tokyo Toilet BOOK, TOTO出版, 2023)
도쿄, 시부야구 - 17개의 더 도쿄 토일렛
더 도쿄 토일렛은 "공공" 화장실입니다. 호텔이나 전시장, 박물관 등 멋지게 잘 꾸며놓은 으리번쩍한 화장실이아니라 우리나라로 치면 오가다 길가에서 바로 들를 수 있는, 도립,시립,구립 그런 화장실이라는 건데요. 이 도쿄 토일렛에 참여한 디자이너들 중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네명이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능적인 측면 뿐 아니라 디자인 또한 아름답게 설계해서 더 도쿄 토일렛을 더욱 돋보이고자 했던 것이지요.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진심인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에서 한국 사회도, 한국의 '모화' 활동도 분명, 배우고 가져와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직 더위가 한참 남아있던 23년 9월, 오로지 화장실을 취재하러 일본을 찾은 한국다양성연구소의 김지학 소장은 하루 2만보 이상을 걸으며 '더 도쿄 토일렛' 17개소를 모두 돌아보고, 일본재단의 담당자와도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도쿄 토일렛에 대한 여러 인터뷰나, 관공서의 방문은 대표적인 화장실 한두개를 둘러보는 것이 다 였는데, 이처럼 17개소 전체를 둘러본 사람은 처음 본다"는 일본재단 담당자의 WOW가 있었습니다. ^^ 그.런.데...
모든 방법을 시도했으나, 손상이 심해 복구가 불가능함을 알려드리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외장하드가 망가졌습니다.
화장실 얘기하다가, 뜬금없이 갑자기 웬 외장하드 망가진 소리냐고요?
네. ㅠㅠ 연구소 외장하드가, 영상활동의 코어 오브 핵심인 외장하드가, 뜬금없이 갑자기 안 되더니
수리비가 100만원 쯤 드는 용량이라는데, 그보다 더 많이 억만금을 줘서라도 살려내고 싶었지만. 결국 복구불가 판정을 받았거든요.
도쿄 토일렛을 잘 보여드리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나누고 싶어, 영상을 제작해 보여드리기로 계획했고,
그에 따라 해피빈 모금함도 열고 저희도 두근두근 온갖 궁리하면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지학소장이 땀 뻘뻘, 하루 2만보 이상씩 걸으며 밤마다 패치 붙여가며 영상찍고, 인터뷰해온 모든 자료도 함께 복구불가 ㅠㅠ
김지학소장의 휴대폰에 남아있던 영상으로 만든 "하네다공항 화장실 소개"
장비로 촬영해온 중요한 영상, 긴 영상은 모두 없,어,지,고, 휴대폰에 남아있던 영상과 몇장의 사진들로 여기까지 소개해드릴 수가 있었는데요.
더 궁금하시죠? 연구소의 관점으로 소개해드리는 도쿄토일렛 영상 꼭 보고싶으시죠? (휴대폰 영상으로 이 정도 퀄리티, 제대로 찍어오면
저희도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간다! 어떻게든 기회 만들어서 곧 , 꼭 다시 도쿄토일렛 촬영해오려고요.
다만, 여유와 버퍼를 두고 관리하기가 어려운 여건이라는 핑계가 후원해주신 분들과의 약속을 제때 못 지키고 중요한 자료를 복구할수도 없는 큰 위험을 만든었다는 점을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이점 사과드리며, 재발되지 않도록 내부 보완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부득이 더 도쿄 토일렛 취재 1편은 여기까지, 미완으로 마치고, 이후 제대로 2편은 영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한 번, 모금함으로 응원해주신 분들과의 약속, 늦어지더라도 꼭 지키겠습니다.
화장실은 누구나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어야 한다. 화장실을 가야 할 때 화장실을 빠르고 안전하게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당신은 화장실을 갈 수 없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화장실 앞에서 어떠한 고민도 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성별이분법적이고 비장애인, 성인중심적인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정체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공간은 의식을 지배한다. 화장실은 계속해 이용자로 하여금 성별이분법과 비장애인의 몸을 ‘정상의 몸’을 학습하도록 만든다. 자신에게 적합한 화장실이 없는 장소에서는, 그 공간을 온전히 점유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 곳이 학교라면 배울 권리가 박탈될 것이고, 직장이라면 일할 권리가 박탈된다. 한국사회는 ‘정상기준’에 포섭된 권력에 의해 ‘허락된 존재’에게만 화장실 공간을 내어준다. 최소한의 기본권인 화장실을 사용할 권리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안전하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화장실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져버린다. 이처럼 화장실은 가장 사적이지만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며, 화장실이 제시하는 ‘정상’의 기준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을 규율한다. 다양성과 포함의 가치가 외면되는 이 사회의 단면이 공간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 바로 화장실이다. 픽토그램부터 여성=치마, 남성=바지라는 표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납작하게 만든다. 화장실이 그저 화장실일 수는 없을까?
있지만 없는 사람들의 화장실
소변을 자주 참아야 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질병인 방광염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실제 이용을 고려하지 않은 최소한의 법적기준만 맞춰 놓은 까닭에 장애인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기 어려운 장애인, 청소도구함으로 전락한 장애인화장실,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에서 어느 곳도 들어갈 수 없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그리고 여성이 있을 곳으로 여겨지지 않는 공간에서의 여성이다. 여성화장실이 없는 노동현장에서, 여성은 과연 일을 할 수 있을까? 제2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총 다섯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여성 정치인 박순천의 오랜 지병은 방광염이었다. 정치를 여성의 일이라 여기지 않는 문화는 국회에 여성화장실을 둘 필요를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다. 박순천은 오랫동안 국회활동을 하면서도 ‘오줌권’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소변을 참아가며 일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3월 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여성 신입 공채 ‘0명’인 현대차 공장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 보도에서는 지금까지도 공채로 단 한번도 여성노동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현재 현대차 공장의 정규직 여성은 사내하청 소속이었다가 법원의 불법파견 판결로 정규직이 된 300명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여성은 거친 일을 회피하기 때문’이라는 성별고정관념에 근거한 편견은 이미 존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지울 뿐, 존재하는 이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남성에게 어울리는 일로 여겨진 자동차 공장의 노동현장에는 여성화장실조차 없었다. 그나마 5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몇 칸의 여성화장실은 충분하지 않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의 화장실
시스젠더 여성에게도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성별이분법적인 기존의 화장실에 선택지는 있으나, 화장실에서 안전한 이용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는 여성이 일상에서 안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범죄를 예감하며 살아가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불법촬영은 만연하고, 페미사이드는 지속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성의 안전함을 느끼기 어려운 화장실 문제 때문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한 논의는 보류하는게 맞을까? 화장실에서 일어난 많은 여성대상 범죄들은 여성화장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즉, 성별분리가 여성에게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이 화장실에서도 안전하지 않은 것이지, 여성이 안전한 사회인데 화장실에서만 유독 안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공고한 성별이분법과 성별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며, 이것이 돈벌이가 되는 것이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철저한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만든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은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사람들이 맞서 싸우고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이런 구조는 여성뿐 아니라, 젠더규범에 걸맞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 모두를 배제한다. 성소수자 뿐 아니라, 무성적인 존재이기를 강요받는 장애인도 포함된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 여성에게 안전한 화장실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인식되는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여성들의 화장실 선택지를 빼앗는 게 아니다.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던 사람들에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기존의 화장실 자체가 어떤 구조와 문화 가운데서 만들어져 용인되고 지속되고 있는지 고민하고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이야기하면 항상 나오는 키워드는 바로 ‘유니버설디자인(Universal Design)’이다. 한국에서 유니버설디자인은 유행이 된 지 오래고, 많은 지자체에서 유니버설디자인조례를 만들기도 했다. 장애인, 노인, 영유아, 임산부 등 어느 누구에게도 배리어(barrier)가 존재하지 않는 접근가능한(accessible) 공간을 구축하겠다는 건데, 놀랍게도 한국의 유니버설디자인조례나 가이드라인에는 모두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을 전제하고 있다. 장애인화장실조차도 어느 화장실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1개 이상을 둔다는 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북미나 유럽까지 가지 않고도, 일본의 유니버설디자인은 대체로 매우 잘 도입되어 있다. 일본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면서 화장실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곳곳에 있다는 점이다. 공항을 비롯해 관광지, 쇼핑센터 등에 설치된 유니버설디자인에 부합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발견하기 쉽다. 화장실마다 차이가 있지만 장루장애인이나 와상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이 만들어져 있고, 무지개 깃발과 ‘All gender’라는 표시가 화장실 문 앞에 붙어있다.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모든 존재를 환대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유니버설하지 않은 유니버설디자인은 ‘허락받은 존재’의 범위와 레벨을 정할 뿐, 모든 종류의 배리어(barrier)를 없애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기반시설을 마련하겠다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하는 척’이 있을 뿐 ‘하는 것’이 없다.
한국, 어디까지 왔나
한국사회에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 담론은 어디까지 왔을까?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과 ‘오줌권’에 대해 이야기하면, 변화가 필요한 사안들 중 시급하지 않은 이슈로 여겨졌다. 산재한 인권문제가 많으니 화장실은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화장실에 가야 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시급한 문제는 있을까? 성별이분법과 비장애인, 성인 중심적인 화장실에 적합하지 않은 몸으로 배제되어 ‘오줌권’이라는 최소한의 기본권이 박탈되는 수많은 시간들은, 이를 애초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이들에 의해 쉽게 외면됐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왜 당장 필요한가에 대해 한국다양성연구소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수십번을 말해 온 결과 비로소 이 사회는 이 이야기를 조금씩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사회 곳곳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이 성과를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정책은 후퇴하고 있다. 지난 3월 1일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재발을 막는 후속조치로 공공건물의 남녀화장실 동선을 분리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심지어 이것을 ‘공중화장실 유니버설디자인 적용 사업’이라고 명명했다. 성별분리를 더욱 철저하게 함으로써 페미사이드를 막겠다고 한다. 페미사이드의 근본 문제인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인지조차 하지 않는 성별불평등문제, 여성의 몸을 도구화/대상화하는 남성중심적인 강간문화는 삭제되었다. 그러면서 남녀동선분리한 화장실을 통해 할 일을 다한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대응방식은 ‘강남역 살인사건’때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페미사이드는 사라지고 엉뚱하게 ‘화장실’과 ‘정신장애’만 남았다. 이는 애초 모두의 ‘유니버설디자인’도 아니고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빛의 속도로 화장실을 갈 수 없다면
안타깝게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 싸움은 멀었다. 여전히 기존 화장실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가급적 밖을 나가지 않거나 외출을 하더라도 물을 마시지 않고 이용이 가능한 화장실을 찾아 수십분을 사용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히든피겨스>에서 인간계산기로 불리던 천재 수학자 캐서린은 NASA에 일하면서 회사 내에 단 하나뿐인 유색인종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왕복 40분을 사용해야 했다. 근무시간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화를 내는 백인남성에게 캐서린이 ‘이 건물에는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인지조차 되지 않던 문제가 비로소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성별이분법적이고 비장애인, 성인 중심적인 화장실은 여전히 수많은 캐서린에게 시간을 빼앗고 있다. 그 시간을 빼앗음으로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모든 사람과 트랜스젠더가 그러했고,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함께하는 장애인, 시혜적으로 ‘최소한’으로만 마련된 장애인화장실을 찾아다니는 장애인, 다양한 장애유형을 고려하지 않은 기존의 화장실을 편리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와상장애인, 장루장애인 등이 그러하다. 존재가 부정당한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할 공간조차 마련하지 않는 순간, 시간은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최소한의 권리보장을 위한 진지한 논의와 실천이 이뤄져야 한다. 의식변화부터 시작해 근본적으로 제도의 변화까지 필요하다. 엉망으로 만들어진 유니버설디자인조례들에도 변화를 요구해야 하고, 잘못된 적용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할 일은 많고, 체력은 딸린다. 하지만 우리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다. 연대의 시간을 통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고민과 실천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가 그러더라. 시기상조라고. 성중립 화장실 만드는 것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 만드는 것도. 대체 어느 천년에 공을 들여서 그걸 다 만드냐는 말도 더러 있었어.
내가 경험해 본 적 없는 남의 입장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건 어려운 일일 거야. 그렇다면 '마려움'을 떠올려 보자. 지금 나는 마려워. 아주 마려워. 싸야 해. 임계점에 달했어. 더 참으면 터져. 솔직히, 다들 살다가 변기 찾아 삼만리 해봤잖아.
주변인에게 어느 성별로 인지되든, 패션이 어떻든, 이동이 불편하든 않든, 마려워서 고통 받는 순간에 안심하고 들어가서 힘 줄 화장실은 있어야 한다는 게 우리 요구의 전부야.
이거, 시기상조야?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필요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도 이미 여러분과 함께 살고 있어. 예를 들면, 트랜스젠더 여성도 일상생활 하고 사회생활 해. 언젠가 그대들과 함께 자정까지 야근하며 행사 준비한 K주임이 바로 나였어. 또 다른 그대의 파일을 보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K대리도 나였고. 회사 생활 할 땐 그냥 여자 화장실 썼어. 트랜지션을 일찌감치 한 덕분에 여성으로 패싱이 무난하게 됐거든.
하지만 호르몬 주사만 맞던 시기에는 나도 대체 어느 화장실을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보다 남자들이 더 놀라. 여자 화장실에는 차마 못 들어가겠고. 이런 상황이 반년 넘게 이어졌고, 그동안 나 정말 발에 땀 나게 뛰어다녔어. 볼일 보러. 하루에 몇 번이나. 돌이켜보면 그게 대체 무슨 고생이었나 싶어.
그나마 나는 운이 좋은 편이야. 트랜지션을 취업준비생이 되기 전에 할 수 있었거든. 그렇지 못했다면, 아마 재직 중 퇴직을 하고 트랜지션을 시작했을 거야. 직장 동료들의 인식도 인식이지만, 다른 게 아니라 바로 화장실 문제 때문에. 마려울 때마다 사옥에서 뛰쳐나갈 순 없잖아.
그래,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아. 늘려가는 것도. 오히려 그래서 더욱 서둘러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어. 등록금 내고 다니는 학교에서 화장실을 못 간다? 건강 챙기러 간 병원에서 화장실을 못 간다? 안 그래도 영혼까지 쥐어 짜이러 가는 직장에서 화장실을 못 간다? 이건 아니잖아.
우리는 쉽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 아슬아슬 위태롭게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걸 이제는 그만하고 싶어. 학교, 병원, 직장, 관공서, 공공장소에 갈 때 불안하지 않았음 좋겠어. 이게 우리가 바라는 전부라면, 지지해주겠어?
지난 11월 19일은 세계 화장실의 날이었습니다. 이에 맞춰,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는 이전에 출간했던 모두를위한화장실 캠페인 인터뷰집 "나의 오줌권에 대하여"를 브런치북(바로가기)으로 웹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오줌권에 대하여"에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인터뷰이들의 '화장실'에 대한 기억/경험과 새롭게 상상해 보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요. 이 인터뷰집의 웹 게재를 맡아 진행하며, 저도 저의 경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후기 청소년 시기 이후 지금까지 체중이 40kg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아끼던 옷이나 좋아하던 옷을 거의 입을 수 없게 되었고, 새로운 옷을 사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입을 수 있는 옷도 있었지만, 그것을 입으면 외부 활동이 불편해졌습니다. 체중 증가 이후 저는 여러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면, 저는 과거에 지금의 저보다 40kg 가까이 체중이 덜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체중의 변화와 관계 없이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시도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숏컷이었고, 투블럭을 하고 다닌 적도 있고, 붙임머리를 써서 아주 긴 장발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대체로 아주 짧은 단발부터 쇄골까지 오는 장단발 사이를 왔다 갔다 했으나 길면 자르고, 길면 잘랐으니 제가 원하는 머리는 아주 짧은 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검정부터 갈색, 초록색, 노란색, 주황, 빨강, 보라, 회색, 파랑. 다양한 색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종종 푸른 짧은 머리, 긴 노랑 머리, 빨간 단발머리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젠더퀴어입니다. 이건 제가 선택하는 모든 경험에 대해 아주 중요한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경험하게 되는 모든 상황에 대해 허탈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머리카락의 길이와 입는-입을 수 있는 옷의 형태, 체중에 따른 체형으로 제가 '갈 수 있는 화장실'이 명확해진다는 것은 저에게 여전히 의아한 일입니다. 제가 아주 말랐고, 머리카락이 짧았고, 가슴둘레가 넉넉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다니며 외부의 '여자 화장실'에 갔던 시기를 기억합니다. 흠칫 놀라는 사람부터 화장실 사인을 확인하는 사람, 되돌아 나가는 사람, 직접 물어보는 사람, 애써 무시하는 사람까지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아무래도요. 저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여자가 아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당시 저에게는 그게 '당연한' 경험이었는데요. 그런데 지금 저는 아무리 머리가 짧아도 도무지 '오해' 받지 않습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패싱되는 것입니다. 저는 급하다고, '상태'가 그렇기 때문에 종종 찾아갔던 '남자 화장실'을 이제는 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자연스럽게 '여자 화장실'에 갑니다. 하지만 아무도 저를 오해하지 않고, 저는 그것이 나의 체중, 나의 체형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도무지 "남자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는 모두를위한화장실을 원합니다. 연령, 성별정체성, 장애와 신체, 외모와 무관하게, "무관하게 누구든 갈 수 있는 화장실"을 원합니다. '오해' 받던 시기가 좋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애초에 누구도 서로에 대해 판단하거나 마음대로 정의 내리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공간을 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나의 성별정체성과 신체, 외모에 따라 골라 가야하고 선택해야 하고 선택 '받아야 하고', 오해하거나 오해 받거나, 오해 '당하는' 일 없이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필요합니다.
안녕하세요, 웹진 까끌까끌의 모두를위한화장실 게시판입니다. 이 게시판에는 한국다양성연구소의 모두를위한화장실 관련 콘텐츠가 업데이트됩니다. 감사합니다.
화장실 때문에 일본까지 간거냐고요? 넵! 오로지 화장실 가려고 일본 다녀왔어요.
모두를위한화장실 활동을 하는 한국다양성연구소, 화장실에 무척 까다롭지요. 이런 저희를 만족시키는 화장실이 도쿄-시부야에 있다고 해서, 김지학 소장이 자비로 출장 다녀왔답니다.
한국다양성연구소를 일본까지 불러들인 화장실은, 더 도쿄 토일렛입니다.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 (사진출처 : THE NIPPON FOUNDAITION 홈페이지)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
일본은 ‘사회 구성원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대안을 제시하는, 가치 기반 디자인’ 유니버설 디자인을 사회 곳곳에서 잘 실천해내고 있습니다. 그런 일본이, 2020년을 기점으로 “공공화장실”의 모습을 한 번 더 탈바꿈 시키는데요.
바로, 일본재단(The Nippon Foundation)의 공중화장실 개선사업-'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입니다.
일본이 '2020년 도쿄올림픽'을 유치하고 손님맞을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공중화장실 모습을 살펴 보니 손님맞이에 불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고 해요. 그 이유가, 많은 공공 화장실이 성별, 나이, 장애 유무에 따라 일부 사용자들의 접근을 막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고, 그 성찰과 보완의 결과로 ‘공중화장실이 정말 공공을 위한 것인지’ 짚어보고 모두를 위한 화장실의 모습으로 바꾸는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를 진행한 일본재단 THE NIPPON FOUNDAITION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모두를 위한 공중화장실"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를 위해 ‘일본재단’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에게 각 공중화장실에 있는 한 칸만큼은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며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전달했습니다.
"화장실의 구성요소는 휠체어가 지나다닐 수 있는 충분한 공간, 인공 배설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루 위생시설, 아기 의자와 기저귀 테이블 등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라는 것은 또한 소수자 중 레즈비언・게이・트랜스젠더・바이섹슈얼・퀴어(LGTBQ+)를 고려한 화장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화장실의 모습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 “나이와 장애의 유무 무관” “영유아, 어린이, 장애인도 고려”하며 이렇듯 화장실에 대한 기준을 다시 정하는 과정이 되었다고 해요.
도쿄토일렛 화장실 입구의 안내문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누구든지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장루(질병으로 인해 장기의 일부를 복부밖으로 꺼내 변이 배출되게 만든 출구)주머니를 착용하는 사람들이 이를 편하게 세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전용변기, 다목적 침대, 기저귀교환대, 다목적 발판 등이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화장실의 모습에서, 배제되는 사람(화장실을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을 찾으실 수 있을까요? 바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의 모습입니다
왼쪽부터, 기저귀교환대, 장루주머니세척용변기, 낮은 변기, 사용자의 앉은 위치에서 알맞게 손이 닿는 손잡이와 낮은 휴지걸이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장루주머니를 세척할 수 있는 전용변기가 설치된 화장실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보여드릴게요. 가운데 깊은 세면대? 처럼 보이는 설치물이 바로 그것인데요 한국 화장실에는 일부 큰 병원과 센터 등에 설치하고 있을 뿐 그 외에는 설치된 곳을 찾기 힘듭니다. 이는 장루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거의 없다는 얘기가 되지요. 화장실엘 갈 수 없는데 외출, 취업, 학업 등 어떤 일상생활을 할 수 가 있을까요?
화장실 - 성별 구분 해야만 할까?
성별 구분이 있는 화장실과 모두를위한화장실이 함께 위치하고 있는 모습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지정성별로 구분되어 사용하는 화장실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모두를위한화장실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모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쿄토일렛 뿐 아니라 지하철역사, 공원, 박물관 등 공공기관은 물론 영리기업이 운영,유지하는 건물에서도 이런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도 비슷한 모습이 있는거 같기는 해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아마 성별구분된 화장실 + 성별구분된 다목적 화장실의 모습이 대부분일텐데요. 그럼 지정성별이 다른 양육자와 피양육자, 지정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함께 이동하는 경우는 그 "구분된" 화장실 앞에서 또 고민을 하시게 되겠지요. 쩝.
성별 구분이 따로 없이 모두를위한화장실 두 칸이 나란히 위치한 모습 (촬영 :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성별구분 화장실과 함께 반드시 모두를위한화장실을 설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대안은, 모두를위한화장실이 여러개 있는 것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확인하실 수 있는 것 처럼요. 이렇게 성별 구분을 따로 하지 않으면, 어딘가는 줄이 길고 어느쪽은 줄이 아예 없어서, 긴 줄에 선 사람이 '저쪽 화장실을 이용해도 되나? 안되나? 아 진짜 급한데..." 라고 생각하는 일 자체가 없어지겠지요.
더 도쿄 토일렛 17개소의 위치 지도 (이미지 출처 : The Tokyo Toilet BOOK, TOTO出版, 2023)
도쿄, 시부야구 - 17개의 더 도쿄 토일렛
더 도쿄 토일렛은 "공공" 화장실입니다. 호텔이나 전시장, 박물관 등 멋지게 잘 꾸며놓은 으리번쩍한 화장실이아니라 우리나라로 치면 오가다 길가에서 바로 들를 수 있는, 도립,시립,구립 그런 화장실이라는 건데요. 이 도쿄 토일렛에 참여한 디자이너들 중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네명이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능적인 측면 뿐 아니라 디자인 또한 아름답게 설계해서 더 도쿄 토일렛을 더욱 돋보이고자 했던 것이지요.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진심인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에서 한국 사회도, 한국의 '모화' 활동도 분명, 배우고 가져와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직 더위가 한참 남아있던 23년 9월, 오로지 화장실을 취재하러 일본을 찾은 한국다양성연구소의 김지학 소장은 하루 2만보 이상을 걸으며 '더 도쿄 토일렛' 17개소를 모두 돌아보고, 일본재단의 담당자와도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도쿄 토일렛에 대한 여러 인터뷰나, 관공서의 방문은 대표적인 화장실 한두개를 둘러보는 것이 다 였는데, 이처럼 17개소 전체를 둘러본 사람은 처음 본다"는 일본재단 담당자의 WOW가 있었습니다. ^^ 그.런.데...
도쿄 토일렛을 잘 보여드리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나누고 싶어, 영상을 제작해 보여드리기로 계획했고,
그에 따라 해피빈 모금함도 열고 저희도 두근두근 온갖 궁리하면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지학소장이 땀 뻘뻘, 하루 2만보 이상씩 걸으며 밤마다 패치 붙여가며 영상찍고, 인터뷰해온 모든 자료도 함께 복구불가 ㅠㅠ
김지학소장의 휴대폰에 남아있던 영상으로 만든 "하네다공항 화장실 소개"
장비로 촬영해온 중요한 영상, 긴 영상은 모두 없,어,지,고, 휴대폰에 남아있던 영상과 몇장의 사진들로 여기까지 소개해드릴 수가 있었는데요.
더 궁금하시죠? 연구소의 관점으로 소개해드리는 도쿄토일렛 영상 꼭 보고싶으시죠?
(휴대폰 영상으로 이 정도 퀄리티, 제대로 찍어오면
저희도 꼭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간다! 어떻게든 기회 만들어서 곧 , 꼭 다시 도쿄토일렛 촬영해오려고요.
다만, 여유와 버퍼를 두고 관리하기가 어려운 여건이라는 핑계가 후원해주신 분들과의 약속을 제때 못 지키고 중요한 자료를 복구할수도 없는 큰 위험을 만든었다는 점을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이점 사과드리며, 재발되지 않도록 내부 보완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부득이 더 도쿄 토일렛 취재 1편은 여기까지, 미완으로 마치고, 이후 제대로 2편은 영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한 번, 모금함으로 응원해주신 분들과의 약속, 늦어지더라도 꼭 지키겠습니다.
그때까지 지속적으로 응원해주시고, 기다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가장 사적이지만 가장 정치적인
화장실은 누구나 빠르고 안전하게 갈 수 있어야 한다. 화장실을 가야 할 때 화장실을 빠르고 안전하게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당신은 화장실을 갈 수 없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화장실 앞에서 어떠한 고민도 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성별이분법적이고 비장애인, 성인중심적인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정상’의 기준에 부합하는 정체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공간은 의식을 지배한다. 화장실은 계속해 이용자로 하여금 성별이분법과 비장애인의 몸을 ‘정상의 몸’을 학습하도록 만든다. 자신에게 적합한 화장실이 없는 장소에서는, 그 공간을 온전히 점유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 곳이 학교라면 배울 권리가 박탈될 것이고, 직장이라면 일할 권리가 박탈된다. 한국사회는 ‘정상기준’에 포섭된 권력에 의해 ‘허락된 존재’에게만 화장실 공간을 내어준다. 최소한의 기본권인 화장실을 사용할 권리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안전하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화장실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져버린다. 이처럼 화장실은 가장 사적이지만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며, 화장실이 제시하는 ‘정상’의 기준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을 규율한다. 다양성과 포함의 가치가 외면되는 이 사회의 단면이 공간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 바로 화장실이다. 픽토그램부터 여성=치마, 남성=바지라는 표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납작하게 만든다. 화장실이 그저 화장실일 수는 없을까?
있지만 없는 사람들의 화장실
소변을 자주 참아야 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질병인 방광염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실제 이용을 고려하지 않은 최소한의 법적기준만 맞춰 놓은 까닭에 장애인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기 어려운 장애인, 청소도구함으로 전락한 장애인화장실,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에서 어느 곳도 들어갈 수 없는 젠더퀴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그리고 여성이 있을 곳으로 여겨지지 않는 공간에서의 여성이다. 여성화장실이 없는 노동현장에서, 여성은 과연 일을 할 수 있을까? 제2대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총 다섯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여성 정치인 박순천의 오랜 지병은 방광염이었다. 정치를 여성의 일이라 여기지 않는 문화는 국회에 여성화장실을 둘 필요를 생각하지 않게 만들었다. 박순천은 오랫동안 국회활동을 하면서도 ‘오줌권’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소변을 참아가며 일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3월 2일자 경향신문에서는 여성 신입 공채 ‘0명’인 현대차 공장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 보도에서는 지금까지도 공채로 단 한번도 여성노동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현재 현대차 공장의 정규직 여성은 사내하청 소속이었다가 법원의 불법파견 판결로 정규직이 된 300명의 여성노동자들이다. ‘여성은 거친 일을 회피하기 때문’이라는 성별고정관념에 근거한 편견은 이미 존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지울 뿐, 존재하는 이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남성에게 어울리는 일로 여겨진 자동차 공장의 노동현장에는 여성화장실조차 없었다. 그나마 5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몇 칸의 여성화장실은 충분하지 않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의 화장실
시스젠더 여성에게도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성별이분법적인 기존의 화장실에 선택지는 있으나, 화장실에서 안전한 이용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는 여성이 일상에서 안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범죄를 예감하며 살아가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불법촬영은 만연하고, 페미사이드는 지속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성의 안전함을 느끼기 어려운 화장실 문제 때문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한 논의는 보류하는게 맞을까? 화장실에서 일어난 많은 여성대상 범죄들은 여성화장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즉, 성별분리가 여성에게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이 화장실에서도 안전하지 않은 것이지, 여성이 안전한 사회인데 화장실에서만 유독 안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공고한 성별이분법과 성별고정관념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며, 이것이 돈벌이가 되는 것이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철저한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만든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은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사람들이 맞서 싸우고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이런 구조는 여성뿐 아니라, 젠더규범에 걸맞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 모두를 배제한다. 성소수자 뿐 아니라, 무성적인 존재이기를 강요받는 장애인도 포함된다.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 여성에게 안전한 화장실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존재로 인식되는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여성들의 화장실 선택지를 빼앗는 게 아니다.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던 사람들에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기존의 화장실 자체가 어떤 구조와 문화 가운데서 만들어져 용인되고 지속되고 있는지 고민하고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이야기하면 항상 나오는 키워드는 바로 ‘유니버설디자인(Universal Design)’이다. 한국에서 유니버설디자인은 유행이 된 지 오래고, 많은 지자체에서 유니버설디자인조례를 만들기도 했다. 장애인, 노인, 영유아, 임산부 등 어느 누구에게도 배리어(barrier)가 존재하지 않는 접근가능한(accessible) 공간을 구축하겠다는 건데, 놀랍게도 한국의 유니버설디자인조례나 가이드라인에는 모두 성별이분법적인 화장실을 전제하고 있다. 장애인화장실조차도 어느 화장실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1개 이상을 둔다는 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북미나 유럽까지 가지 않고도, 일본의 유니버설디자인은 대체로 매우 잘 도입되어 있다. 일본여행을 다녀온 사람이면서 화장실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면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곳곳에 있다는 점이다. 공항을 비롯해 관광지, 쇼핑센터 등에 설치된 유니버설디자인에 부합하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발견하기 쉽다. 화장실마다 차이가 있지만 장루장애인이나 와상장애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이 만들어져 있고, 무지개 깃발과 ‘All gender’라는 표시가 화장실 문 앞에 붙어있다.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모든 존재를 환대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한국의 유니버설하지 않은 유니버설디자인은 ‘허락받은 존재’의 범위와 레벨을 정할 뿐, 모든 종류의 배리어(barrier)를 없애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기반시설을 마련하겠다는 것으로는 볼 수 없다. ‘하는 척’이 있을 뿐 ‘하는 것’이 없다.
한국, 어디까지 왔나
한국사회에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 담론은 어디까지 왔을까?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과 ‘오줌권’에 대해 이야기하면, 변화가 필요한 사안들 중 시급하지 않은 이슈로 여겨졌다. 산재한 인권문제가 많으니 화장실은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화장실에 가야 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시급한 문제는 있을까? 성별이분법과 비장애인, 성인 중심적인 화장실에 적합하지 않은 몸으로 배제되어 ‘오줌권’이라는 최소한의 기본권이 박탈되는 수많은 시간들은, 이를 애초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이들에 의해 쉽게 외면됐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왜 당장 필요한가에 대해 한국다양성연구소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수십번을 말해 온 결과 비로소 이 사회는 이 이야기를 조금씩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사회 곳곳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의 운동이 성과를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정책은 후퇴하고 있다. 지난 3월 1일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서울시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재발을 막는 후속조치로 공공건물의 남녀화장실 동선을 분리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심지어 이것을 ‘공중화장실 유니버설디자인 적용 사업’이라고 명명했다. 성별분리를 더욱 철저하게 함으로써 페미사이드를 막겠다고 한다. 페미사이드의 근본 문제인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인지조차 하지 않는 성별불평등문제, 여성의 몸을 도구화/대상화하는 남성중심적인 강간문화는 삭제되었다. 그러면서 남녀동선분리한 화장실을 통해 할 일을 다한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대응방식은 ‘강남역 살인사건’때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페미사이드는 사라지고 엉뚱하게 ‘화장실’과 ‘정신장애’만 남았다. 이는 애초 모두의 ‘유니버설디자인’도 아니고 여성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빛의 속도로 화장실을 갈 수 없다면
안타깝게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 싸움은 멀었다. 여전히 기존 화장실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가급적 밖을 나가지 않거나 외출을 하더라도 물을 마시지 않고 이용이 가능한 화장실을 찾아 수십분을 사용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히든피겨스>에서 인간계산기로 불리던 천재 수학자 캐서린은 NASA에 일하면서 회사 내에 단 하나뿐인 유색인종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왕복 40분을 사용해야 했다. 근무시간에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화를 내는 백인남성에게 캐서린이 ‘이 건물에는 유색인종 화장실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인지조차 되지 않던 문제가 비로소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성별이분법적이고 비장애인, 성인 중심적인 화장실은 여전히 수많은 캐서린에게 시간을 빼앗고 있다. 그 시간을 빼앗음으로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모든 사람과 트랜스젠더가 그러했고,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함께하는 장애인, 시혜적으로 ‘최소한’으로만 마련된 장애인화장실을 찾아다니는 장애인, 다양한 장애유형을 고려하지 않은 기존의 화장실을 편리하게 이용하기 어려운 와상장애인, 장루장애인 등이 그러하다. 존재가 부정당한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할 공간조차 마련하지 않는 순간, 시간은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최소한의 권리보장을 위한 진지한 논의와 실천이 이뤄져야 한다. 의식변화부터 시작해 근본적으로 제도의 변화까지 필요하다. 엉망으로 만들어진 유니버설디자인조례들에도 변화를 요구해야 하고, 잘못된 적용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할 일은 많고, 체력은 딸린다. 하지만 우리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다행이고 감사한 마음이다. 연대의 시간을 통해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고민과 실천을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추천영상] 한국다양성연구소, 모두를 위한 화장실 미니다큐
더슬래시에서 글 보기
누가 그러더라. 시기상조라고. 성중립 화장실 만드는 것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 만드는 것도. 대체 어느 천년에 공을 들여서 그걸 다 만드냐는 말도 더러 있었어.
내가 경험해 본 적 없는 남의 입장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건 어려운 일일 거야. 그렇다면 '마려움'을 떠올려 보자. 지금 나는 마려워. 아주 마려워. 싸야 해. 임계점에 달했어. 더 참으면 터져. 솔직히, 다들 살다가 변기 찾아 삼만리 해봤잖아.
주변인에게 어느 성별로 인지되든, 패션이 어떻든, 이동이 불편하든 않든, 마려워서 고통 받는 순간에 안심하고 들어가서 힘 줄 화장실은 있어야 한다는 게 우리 요구의 전부야.
이거, 시기상조야?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필요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도 이미 여러분과 함께 살고 있어. 예를 들면, 트랜스젠더 여성도 일상생활 하고 사회생활 해. 언젠가 그대들과 함께 자정까지 야근하며 행사 준비한 K주임이 바로 나였어. 또 다른 그대의 파일을 보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K대리도 나였고. 회사 생활 할 땐 그냥 여자 화장실 썼어. 트랜지션을 일찌감치 한 덕분에 여성으로 패싱이 무난하게 됐거든.
하지만 호르몬 주사만 맞던 시기에는 나도 대체 어느 화장실을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보다 남자들이 더 놀라. 여자 화장실에는 차마 못 들어가겠고. 이런 상황이 반년 넘게 이어졌고, 그동안 나 정말 발에 땀 나게 뛰어다녔어. 볼일 보러. 하루에 몇 번이나. 돌이켜보면 그게 대체 무슨 고생이었나 싶어.
그나마 나는 운이 좋은 편이야. 트랜지션을 취업준비생이 되기 전에 할 수 있었거든. 그렇지 못했다면, 아마 재직 중 퇴직을 하고 트랜지션을 시작했을 거야. 직장 동료들의 인식도 인식이지만, 다른 게 아니라 바로 화장실 문제 때문에. 마려울 때마다 사옥에서 뛰쳐나갈 순 없잖아.
그래,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아. 늘려가는 것도. 오히려 그래서 더욱 서둘러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어. 등록금 내고 다니는 학교에서 화장실을 못 간다? 건강 챙기러 간 병원에서 화장실을 못 간다? 안 그래도 영혼까지 쥐어 짜이러 가는 직장에서 화장실을 못 간다? 이건 아니잖아.
우리는 쉽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여러분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 아슬아슬 위태롭게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걸 이제는 그만하고 싶어. 학교, 병원, 직장, 관공서, 공공장소에 갈 때 불안하지 않았음 좋겠어. 이게 우리가 바라는 전부라면, 지지해주겠어?
지난 11월 19일은 세계 화장실의 날이었습니다. 이에 맞춰,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는 이전에 출간했던 모두를위한화장실 캠페인 인터뷰집 "나의 오줌권에 대하여"를 브런치북(바로가기)으로 웹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오줌권에 대하여"에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인터뷰이들의 '화장실'에 대한 기억/경험과 새롭게 상상해 보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요. 이 인터뷰집의 웹 게재를 맡아 진행하며, 저도 저의 경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후기 청소년 시기 이후 지금까지 체중이 40kg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아끼던 옷이나 좋아하던 옷을 거의 입을 수 없게 되었고, 새로운 옷을 사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입을 수 있는 옷도 있었지만, 그것을 입으면 외부 활동이 불편해졌습니다. 체중 증가 이후 저는 여러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면, 저는 과거에 지금의 저보다 40kg 가까이 체중이 덜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체중의 변화와 관계 없이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시도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숏컷이었고, 투블럭을 하고 다닌 적도 있고, 붙임머리를 써서 아주 긴 장발이었던 적도 있습니다. 대체로 아주 짧은 단발부터 쇄골까지 오는 장단발 사이를 왔다 갔다 했으나 길면 자르고, 길면 잘랐으니 제가 원하는 머리는 아주 짧은 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검정부터 갈색, 초록색, 노란색, 주황, 빨강, 보라, 회색, 파랑. 다양한 색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종종 푸른 짧은 머리, 긴 노랑 머리, 빨간 단발머리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저는 젠더퀴어입니다. 이건 제가 선택하는 모든 경험에 대해 아주 중요한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경험하게 되는 모든 상황에 대해 허탈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머리카락의 길이와 입는-입을 수 있는 옷의 형태, 체중에 따른 체형으로 제가 '갈 수 있는 화장실'이 명확해진다는 것은 저에게 여전히 의아한 일입니다. 제가 아주 말랐고, 머리카락이 짧았고, 가슴둘레가 넉넉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다니며 외부의 '여자 화장실'에 갔던 시기를 기억합니다. 흠칫 놀라는 사람부터 화장실 사인을 확인하는 사람, 되돌아 나가는 사람, 직접 물어보는 사람, 애써 무시하는 사람까지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아무래도요. 저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여자가 아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당시 저에게는 그게 '당연한' 경험이었는데요. 그런데 지금 저는 아무리 머리가 짧아도 도무지 '오해' 받지 않습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패싱되는 것입니다. 저는 급하다고, '상태'가 그렇기 때문에 종종 찾아갔던 '남자 화장실'을 이제는 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자연스럽게 '여자 화장실'에 갑니다. 하지만 아무도 저를 오해하지 않고, 저는 그것이 나의 체중, 나의 체형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도무지 "남자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는 모두를위한화장실을 원합니다. 연령, 성별정체성, 장애와 신체, 외모와 무관하게, "무관하게 누구든 갈 수 있는 화장실"을 원합니다. '오해' 받던 시기가 좋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애초에 누구도 서로에 대해 판단하거나 마음대로 정의 내리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공간을 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나의 성별정체성과 신체, 외모에 따라 골라 가야하고 선택해야 하고 선택 '받아야 하고', 오해하거나 오해 받거나, 오해 '당하는' 일 없이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필요합니다.
한국다양성연구소 모두를위한화장실 캠페인 페이지 바로 가기: https://diversity.or.kr/toi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