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하고, 법원 가서 성별 정정 하고. 그러면 다 끝날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믿었다. 이 산을 일단은 넘어야 하니까. 죽을 힘 다해서 산을 넘었다.
신체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여성인 나의 일상은 다른 여성과 같았다. 세세하게 다른 부분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개인차라고 보기에 무리 없는 수준. 나는 평범한 여자,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갔다.
매일 아침 잠을 포기하고 벌레 씹은 표정으로 화장을 하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 내 입술 색깔과 업무 능력의 상관 관계를 300자 내외로 설명하시라고 부장에게 들이받을 날이 오고야 말리라 되뇌며, 조용히 분을 삭이는.
만약 내 삶이 영화고 여기서 엔딩 크레딧이 내려온다면, 그럭저럭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은 다른 장면들을 긴긴 세월 동안 풀어내며 질기도록 이어졌다.
여성으로 패싱(주변으로 어떤 성별로 인지되는 것)되기 전과 후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안전에 대한 체감이었다. 공공장소에 치한이 실존한다는 것을 여성으로 패싱된 20대 중반에야 알았다. 직접 겪어서.
백주대낮에 여자를 완력으로 제압하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하는 남자가 종종 있다는 것도 그 즈음 알았다. 내 일일 수도 있겠다고 신경을 써야 보이기 시작하더라. 아무리 봐도 연인 관계 같은데, 대체 왜 저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지 의아했다. 데이트 폭력 이라는 말을 안 건 한참 나중의 일이다.
급기야 전혀 모르는 여자를 대상으로 한 살인 사건까지 벌어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두려웠다. 이유는 하나였다. 피해 여성이 범죄의 표적이 된 이유가 ‘없어서.’ 그냥 여자라서 죽임 당한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하필 범행이 벌어진 그 순간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야기다. 강남역 출구에 흐드러지게 핀 포스트잇 중엔 내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제는 더 아프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편안하시라'고 썼던 것 같다.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여자라서 죽었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 외치며 두려움을 분노로 승화시키는 여성들이 있었다. 이 사건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이며 매우 위험한 사회현상의 징후라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남자가 더 많이 죽는다’고 여자들의 ‘피해망상’을 지적하는 남성들도 있었다. 어느 분홍 코끼리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더라.
논쟁에 불이 붙자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통계가 투척되었다. 투척.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봐라. 이것이 과학이다. 팩트 가져왔다. FIRE IN THE HOLE! 통계는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 아니다. 통계는 연구 또는 조사를 거쳐야 나온다. 그 연구 또는 조사가 얼마나 타당했는지, 전제와 과정에서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고, 소통의 맥락에 맞는 근거 자료로 쓸 때 통계가 제 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연구는 강력범죄에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희생된다고 말한다.
어떤 연구는 여성이 하루에 한 명 꼴로 남성 파트너에게 죽임당한다고 말한다.
두 연구 다 맞는 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각자의 맥락에서.
여성이 '여성이어서 경험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해 적잖은 불안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런 일이 이미 본인 또는 주변인에게 벌어진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인권운동단체에서 발표하는 통계의 표본에도 들지 못한 피해여성들이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피해사실을 숨기는 여성이 얼마나 흔한지, 여성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대체로 여성은 남성의 완력에 의해 제압되거나 신체적·정신적 폭력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폭력은 인격모독, 손찌검에서 가스라이팅, 살해까지 전부를 아우른다. 이러한 사건에 관련될 확률이 몇 %이든, 나 또는 주변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시점에서 이미 100%다.
여기에 대고 '다 너희 피해망상이야'라며 통계를 들이미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수술 하고, 법원 가서 성별 정정 하고. 그러면 다 끝날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믿었다. 이 산을 일단은 넘어야 하니까. 죽을 힘 다해서 산을 넘었다.
신체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여성인 나의 일상은 다른 여성과 같았다. 세세하게 다른 부분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개인차라고 보기에 무리 없는 수준. 나는 평범한 여자,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갔다.
매일 아침 잠을 포기하고 벌레 씹은 표정으로 화장을 하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 내 입술 색깔과 업무 능력의 상관 관계를 300자 내외로 설명하시라고 부장에게 들이받을 날이 오고야 말리라 되뇌며, 조용히 분을 삭이는.
만약 내 삶이 영화고 여기서 엔딩 크레딧이 내려온다면, 그럭저럭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은 다른 장면들을 긴긴 세월 동안 풀어내며 질기도록 이어졌다.
여성으로 패싱(주변으로 어떤 성별로 인지되는 것)되기 전과 후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안전에 대한 체감이었다. 공공장소에 치한이 실존한다는 것을 여성으로 패싱된 20대 중반에야 알았다. 직접 겪어서.
백주대낮에 여자를 완력으로 제압하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하는 남자가 종종 있다는 것도 그 즈음 알았다. 내 일일 수도 있겠다고 신경을 써야 보이기 시작하더라. 아무리 봐도 연인 관계 같은데, 대체 왜 저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지 의아했다. 데이트 폭력 이라는 말을 안 건 한참 나중의 일이다.
급기야 전혀 모르는 여자를 대상으로 한 살인 사건까지 벌어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두려웠다. 이유는 하나였다. 피해 여성이 범죄의 표적이 된 이유가 ‘없어서.’ 그냥 여자라서 죽임 당한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하필 범행이 벌어진 그 순간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야기다. 강남역 출구에 흐드러지게 핀 포스트잇 중엔 내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제는 더 아프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편안하시라'고 썼던 것 같다.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여자라서 죽었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 외치며 두려움을 분노로 승화시키는 여성들이 있었다. 이 사건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이며 매우 위험한 사회현상의 징후라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남자가 더 많이 죽는다’고 여자들의 ‘피해망상’을 지적하는 남성들도 있었다. 어느 분홍 코끼리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더라.
논쟁에 불이 붙자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통계가 투척되었다. 투척.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봐라. 이것이 과학이다. 팩트 가져왔다. FIRE IN THE HOLE! 통계는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 아니다. 통계는 연구 또는 조사를 거쳐야 나온다. 그 연구 또는 조사가 얼마나 타당했는지, 전제와 과정에서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고, 소통의 맥락에 맞는 근거 자료로 쓸 때 통계가 제 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연구는 강력범죄에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희생된다고 말한다.
어떤 연구는 여성이 하루에 한 명 꼴로 남성 파트너에게 죽임당한다고 말한다.
두 연구 다 맞는 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각자의 맥락에서.
여성이 '여성이어서 경험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해 적잖은 불안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런 일이 이미 본인 또는 주변인에게 벌어진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인권운동단체에서 발표하는 통계의 표본에도 들지 못한 피해여성들이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피해사실을 숨기는 여성이 얼마나 흔한지, 여성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대체로 여성은 남성의 완력에 의해 제압되거나 신체적·정신적 폭력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폭력은 인격모독, 손찌검에서 가스라이팅, 살해까지 전부를 아우른다. 이러한 사건에 관련될 확률이 몇 %이든, 나 또는 주변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시점에서 이미 100%다.
여기에 대고 '다 너희 피해망상이야'라며 통계를 들이미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