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아는 시대가 됐고 이야기하는 시대가 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줄어들지 않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장애인 혐오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는 것 같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강화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여성과 남성처럼 서로를 혐오하는 현상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요?와 같은 질문도 흔하다.
질문에 대답해 보기 위해서는 질문을 뜯어서 분석해 보아야 한다. 첫째로 지금이 이전 어느 때보다 인권 의식이 발달한 시대라는 전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인권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인권의 주체, 인권의 내용, 인권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 주체 등이 종합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둘째로 여기서 말하는 혐오란 무엇인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왜 커지고 있는가 살펴봐야 한다.
대법원 조형물 '정의의 여신상' ⓒ뉴시스
인권을 누리며 살아야 할(보장받아야 할) 인권의 주체는 “모든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인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 주체는 “국가”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인권 보장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가 인권이 침해되고 있을 때 국가에게 인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시민들은 국가에게 계속해서 권리를 요구하며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다. 그래서 인권을 다룰 때 시민 정치가 필수적이다. 나의 인권과 타인의 인권을 제대로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요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시민이 되려면 누구나 일상에서, 제도권에서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의 인권은 세계인권선언문을 지식으로 배우는 수준으로 교과서 속이나 시험지 속에 머무르고 있다. 또한 인권 교육은 시민들을 삶의 주체, 정치의 주체로 살게 하는 교육이 아닌 착한 사람을 만드는 인성교육 혹은 다른 사람에게 폭력(언어, 육체, 성적 폭력)을 사용하면 안된다(처벌받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폭력 예방 교육으로 만들어져 있다. 인권을 개인적인 문제로 만드는 방식이다.
두 번째로 뜯어보기로 한 “혐오”를 단순히 ‘싫어한다’는 감정의 영역으로 잘못 다루는 이들이 많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 편견, 낙인을 강화시키고 차별, 억압, 폭력을 유지하는 사회문화와 구조의 영역이 혐오다. 국가가 시민의 인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 주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나의 인권이 침해될 때 국가에게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를 비난하기 쉬워진다. 예를 들어, 국가가 나를 원치도 않는 시기에 원치는 않는 곳에 보내서 원치도 않는 일이 시키며 강제로 군 복무를 시키는데 국가에게 이를 해결(징병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징병제를 없애거나 휴전 상태를 종전 상태로 바꾸는 등)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여성을 비난하는 것이다. 군대 문제를 여성혐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내가 처한 군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하고 엉뚱한 사람을 비난하게 만듦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요원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한날한시에 모두가 똑같은 시험을 치는데 차별이 어디 있나요?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차별을 당했다고 하면 어떡하나요?”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자기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서 살기에 급급하다. 모두를 죽여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오징어 게임”이 현실과 닮아있다. 승자가 독식하며 패자는 죽는다. 모두는 승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교육 시스템이 굳건하다. 입시는 평가와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한다. 입시에서 인권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다른 사람(생명)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배울 필요가 없다. 이 사회는 이미 공정하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못 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으로 이해, 인정된다. 누가, 무엇을 “능력”으로 규정했는지 등은 질문하지 않는다. 이 “공정 담론”은 사회 문제를 사회 문제로 여기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으로 개인의 문제로 끊임없이 치환하며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모든 사회 문제는 그저 개인의 문제로 여겨진다. 차별, 억압, 폭력의 문제를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 할 사회 구조(법, 제도, 인식, 문화)의 문제로 인지되지 못하게 한다.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사회다. 노동자들(시민들)은 자본가들과 국가에 의해 착취를 당하고 있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착취하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그만큼의 고강도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끔 만들어진다. 또한 자신의 그런 관점이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는 데 기여하고 있어도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인권단체 회원들이 무지개 깃발과 피켓을 들고 있다. ⓒ민중의소리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의 사고방식을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권력자의 관점을 그대로 내 안에 이식함으로써 그들이 사고하는대로 나도 사고한다. 노동자와 시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재벌과 국가를 걱정한다. 특권 그룹의 관점을 소수자들에게 심어주는 통치 전략이다. 노동자가 경영자의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기본값으로 여겨지는 사회다. 말단 노동자까지 ‘오너 마인드’를 가지고 일하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한 단면이다. 이러한 흐름이 강화되는 속도와 방향이 인권교육이 확대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게 시민들의 사고방식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통치전략에 속절없이 노출되어 인권 교육이 힘을 못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모든 시민이 모두의 인권을 일상에서 말하고 요구하는 정치의 주체가 되려면 어떤 고민이 더 필요할까? 자신의 가지고 있는 사회적 억압과 특권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도 사회 문제의 일부임을 인지하며, 사회적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억압을 나의 일로 공감하고, 이 억압과 연결된 사회구조의 문제를 발견하는 심도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다양성훈련이 할 수 있는 역할이며 확산하여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교육의 힘을 믿는다. 교육을 통해 사람은 변할 수 있으며 사회 변화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협력과 공존을 배우는 것이 공교육의 목적이 돼야 한다. 그런 공교육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과 경쟁을 통한 서열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현재의 교육 제도를 끝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입시가 사라져야 한다. 입시가 중요하지 않은 사회가 되려면 대학을 가든 가지 않든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이는 노동문제와 직결돼 있다. 어떤 노동을 하든 모든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보편복지라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여 어느 누구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국가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직접 그 운영을 맡아야 한다. 정치는 50~60대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고소득층, 엘리트, 선주민, 남성들만의 것이 아니다. 거대 양당제를 유지하면 그들만의 정치는 계속될 것이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제도권 내 정치인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순간이 정치다. 우리의 삶을 자신들의 이득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직업 정치인들에게 맡길 순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으로 우리가 만들어 간다.
수술 하고, 법원 가서 성별 정정 하고. 그러면 다 끝날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믿었다. 이 산을 일단은 넘어야 하니까. 죽을 힘 다해서 산을 넘었다.
신체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여성인 나의 일상은 다른 여성과 같았다. 세세하게 다른 부분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개인차라고 보기에 무리 없는 수준. 나는 평범한 여자,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갔다.
매일 아침 잠을 포기하고 벌레 씹은 표정으로 화장을 하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 내 입술 색깔과 업무 능력의 상관 관계를 300자 내외로 설명하시라고 부장에게 들이받을 날이 오고야 말리라 되뇌며, 조용히 분을 삭이는.
만약 내 삶이 영화고 여기서 엔딩 크레딧이 내려온다면, 그럭저럭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은 다른 장면들을 긴긴 세월 동안 풀어내며 질기도록 이어졌다.
여성으로 패싱(주변으로 어떤 성별로 인지되는 것)되기 전과 후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안전에 대한 체감이었다. 공공장소에 치한이 실존한다는 것을 여성으로 패싱된 20대 중반에야 알았다. 직접 겪어서.
백주대낮에 여자를 완력으로 제압하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하는 남자가 종종 있다는 것도 그 즈음 알았다. 내 일일 수도 있겠다고 신경을 써야 보이기 시작하더라. 아무리 봐도 연인 관계 같은데, 대체 왜 저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지 의아했다. 데이트 폭력 이라는 말을 안 건 한참 나중의 일이다.
급기야 전혀 모르는 여자를 대상으로 한 살인 사건까지 벌어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두려웠다. 이유는 하나였다. 피해 여성이 범죄의 표적이 된 이유가 ‘없어서.’ 그냥 여자라서 죽임 당한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하필 범행이 벌어진 그 순간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야기다. 강남역 출구에 흐드러지게 핀 포스트잇 중엔 내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제는 더 아프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편안하시라'고 썼던 것 같다.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여자라서 죽었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 외치며 두려움을 분노로 승화시키는 여성들이 있었다. 이 사건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이며 매우 위험한 사회현상의 징후라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남자가 더 많이 죽는다’고 여자들의 ‘피해망상’을 지적하는 남성들도 있었다. 어느 분홍 코끼리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더라.
논쟁에 불이 붙자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통계가 투척되었다. 투척.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봐라. 이것이 과학이다. 팩트 가져왔다. FIRE IN THE HOLE! 통계는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 아니다. 통계는 연구 또는 조사를 거쳐야 나온다. 그 연구 또는 조사가 얼마나 타당했는지, 전제와 과정에서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고, 소통의 맥락에 맞는 근거 자료로 쓸 때 통계가 제 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연구는 강력범죄에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희생된다고 말한다.
어떤 연구는 여성이 하루에 한 명 꼴로 남성 파트너에게 죽임당한다고 말한다.
두 연구 다 맞는 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각자의 맥락에서.
여성이 '여성이어서 경험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해 적잖은 불안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런 일이 이미 본인 또는 주변인에게 벌어진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인권운동단체에서 발표하는 통계의 표본에도 들지 못한 피해여성들이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피해사실을 숨기는 여성이 얼마나 흔한지, 여성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대체로 여성은 남성의 완력에 의해 제압되거나 신체적·정신적 폭력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폭력은 인격모독, 손찌검에서 가스라이팅, 살해까지 전부를 아우른다. 이러한 사건에 관련될 확률이 몇 %이든, 나 또는 주변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시점에서 이미 100%다.
애써 찾을 땐 없다가도, 염두에 두지 않고 살다 보면 마주치게 된다. 성적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지, 로맨틱한 기류라고 해야 할지. 그런 느낌을 나와 서로 주고받는 상대를. 그 사람을 발견하고 나면 머잖아 이런 순간이 온다. 고백하거나, 받아 내거나 둘 중 하나인 순간. 이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
나는 그 달달한 순간에 커밍아웃이라는 찬물을 끼얹는다. 나와 연인관계가 되거나 최소한 FWB(Friends With Benefits)라도 된 남자들은 내가 트랜스젠더 여성인 것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인지했다. 작년에 본 정신과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강박적인’ 커밍아웃을 반복하는 것은, 친밀한 사람으로부터 절대로 겪고 싶지 않은 일이 한 가지 있기 때문이다.
살해당하는 것.
2009년. 충격적인 기사를 읽었다. 어느 남자가 몇 년 동안 만난 여자친구를 살해했다는 소식이었다. 살해 동기는, 여자친구가 알고 보니 트랜스젠더여서.
여자친구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숨겼다가 들켰거나 나중에 밝혔다면, 남자친구가 배신감을 느끼거나 속상할 수는 있겠다. 그렇다고 죽인다? 목숨을 빼앗는다? 연인이 트랜스젠더라는 점이 사랑하던 그 사람을 죽여 버릴 동기가 된다는 게 등골이 오싹하도록 두려웠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차츰 잊혀갔다. 호르몬을 맞고, 수술을 받고, 법적 성별을 정정하고... 삶을 바로잡으며 느끼는 환희에 두려운 기억이 묻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순간이 내게도 왔다. 로맨틱한 감정을 주고받는 상대에게 내가 먼저 고백을 하거나, 그로부터 고백을 받아 내거나, 둘 중 하나인 순간.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뺨이 따뜻해지는데, 돌연 벼락처럼 옛 기억이 번쩍였다. 남자친구한테 살해당한 트랜스젠더 여성 이야기.
나는 좋아해요, 사랑해요, 오늘부터 1일 합시다, 이런 말들 대신 커밍아웃을 했다. 사실 저 트랜스젠더예요, 라고.
그동안 사랑한 사람 중 그 누구도,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나를 배척하거나 나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굳게 믿을 수 있다. 좋은 남자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백에 앞선 커밍아웃에 어떤 사람은 믿음을 줘서, 속이지 않아서 고맙다며 다소 감동받은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 타이밍에 커밍아웃하는 건지 마저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이 관계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함께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이 남자가 속 편한 바보인 채로 날 평범하게 사랑해주는 게 나으니까.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어떤 어려움을 경험하셨나요?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구를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으신가요? 이 글의 제목인 "살아오면서 경험한 가장 큰 어려움에 대해 서술하시오"는 흔히 실패 경험과 극복 사례로 불리는 (주로 대)기업 자기소개서 문항에서 따 왔습니다. 비슷한 문항으로는 성공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인생의 실패나 성공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취업 준비생이 "이 경험이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나" 혹은, "나는 크게 실패(성공)해 본 경험이 없는데 어떤 것을 써야 할까"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더 많은 취업 준비생 대상 컨설팅 업체, 스터디에서 어떻게 이 질문에 '대응'해야 하는지 '공식'을 이야기해준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자본과 경제력, 학력과 학벌 등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에 따라 실패와 성공 경험이 달라진다는 논의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시험에서 5수를 거쳐 시험에 합격했다면, 그 사람이 다섯 해 이상 수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던 여러 사회적 권력과 배경이 있었을 것이라는 식으로요. 실패를 '경험'할 수 있고, 또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갖는 것이 사회적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그러니 누군가가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을 목표로 할 때, 누군가는 절대 경험을 반복할 수 없고(해서는 안 되고), 실패하지 않아야 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실패해도 되고, 실패할 수 있고, 다시 회복하여 (성공이 아닌)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제도와 자본주의 논리가 변화해야 합니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성공" 경험 사례와 "실패" 경험 사례에 대한 공식 및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은 결국 "노력"을 강조하라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어떤 일을 성공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지속적으로 노력했는지, 산업 분야와 업무, 직무에 따른 적절한 키워드를 찾아 내가 (개인이) 얼마나 해당 분야에 적합한 사람인지 강조하게 하는 것이지요.
최근 몇 년 사이, 학력과 학벌 정보를 제외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블라인드 채용 과정에서 주어지는 질문(물론 이 문항은 블라인드 채용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요) 역시 사회적 정체성에 따라서 응답할 수 있는 경험의 사례가 달라진다는 것(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어려움(실패)은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기업과 국가에서는 그러한 "어려움"을 비가시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력, 신체적 정신적 장애 여부, 성별,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 등 "억압 그룹"이 경험한 차별과 억압에서 비롯된 어려움과 "실패 경험"을 기업은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실패"나 "성공" 경험에 대한 서술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선택되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이 모든 책임을 방임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묻는 "실패 경험과 극복 사례"는 다분히 특권 그룹의 삶을 반영합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으며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면 된다는 경험담과 컨설팅은 기만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모두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해야 하는 일을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과도한 업무 시간, 직장 내 괴롭힘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와 같이 사회적 정체성에 따른 억압 그룹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채용(구직)부터 노동, 이직과 퇴사 이후까지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국가가 법과 제도로써 이를 보장해야 합니다. 국가는 더 늦기 전에 당장, "노동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 "노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 "노동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모두 포함되어 죽거나 죽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대학교 학부 재학 시기에 3년 정도, 초등학교를 마주한 빌라의 원룸에서 살았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종소리, 리코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곤 했습니다. 학교에는 나무가 있고, 모래가 있고, 흙이 있고, 놀이기구와 운동기구, 그리고 어린이와 어른들이 함께 있습니다. 너무 슬픈 새벽에,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면 "저 곳"에 어린이들이 우르르 채워지고 무언가를 배우고, 무언가에 의해 열심히 웃고 또 우르르 집으로 -혹은 집 같은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시간을 견디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시기에는 박물관의 특별전시실에서 전시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요. 비교적 잘 알려진 유물과 작품이 모이는 전시였고, 어플리케이션(APP)을 활용하는 넓은 체험형 공간이 있어 유난히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관람을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체험 전시실에 어린이가 입장할 때 함께 있던 스태프들이 환하게 웃으며 어린이를 맞이했던 풍경을 저는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 무렵에도 "노키즈존"이라는 형태로 어린이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가게들이 있었기 때문에, 꼭 어린이 관람객만을 기다린 것처럼 기쁘게 환대하는 장면 속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게 아직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제가 여태 살아오며 만난 가장 많고 다양한 영유아, 어린이 시민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시가 종료되고 걱정과 분노를 담아 생각했지요. "이제 나는 어디에서 어린이를 만날 수 있을까?"하고요.
제가 전시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마친 이후 4년이 흘렀습니다. "노키즈존"은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마구마구 만연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논의를 "너무 오래" 지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키즈존"이라는 단어는 "특정 연령 이하/미만의 어린이 입장 불가 구역"를 의미합니다. "zone(구역)"이라는 표현에서, "노키즈존 no-kids zone"이라는 단어는 공간성을 가집니다. 한편, "노키즈존"이 과연 공간, 구역, 장소에 국한되어 있는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키즈존"이 명백히 어린이를 차별하고 억압하며, 배제하는 공간이라는 논의는 (충분히, 혹은 얼마간) 나누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덧붙여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공간'에 대하여 누군가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에서 타인을 차단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공간의 제한을 두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노키즈존"에 '기꺼이 가는 사람들'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저는 연령에 따른 차별과 배제를 행하고 간접적으로 가담하는 그 모든 사람들을 "프로(pro)-노키즈존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어린이가 있는 것을 불편해 할까요? 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불편해 하는 일을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왜 불편함의 이유를 들여다보지 않을까요?
어떤 '공간'의 출입을 막는 주체는 사람입니다. 그 주체는 대부분 어린이가 아닌, 특권 그룹에 속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노키즈존"이라는 단어는 '공간'을 핑계로 개인의 차별과 억압의 기제를 숨기고, "쾌적하고 안전한 '공간'을 위한 선택"인 것처럼 개개인의 혐오를 포장해 버립니다.
최근 동료 활동가와 함께 사는 어린이와 짧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조용한 어린이였는데, 이번에 제가 만나게 된 어린이는 힘이 넘치고, 씩씩하고, 즐거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조용한, 힘이 넘치는, 씩씩한, 즐거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특성은 사실상 연령과 무관합니다. 연령과 무관하게 어떤 사람들은 각각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외향적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을 즐거워하고, 밥을 적게 먹고, 못 먹는 음식이 있고, 낯을 가리고, 춤을 추고, 독서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어떠한 기질과 성정, 취향과 감정/상태를 "연령적 특성"으로 묶어 차별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모두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특정한 "기질과 성정"을 특정한 "연령"에 따른 핑계거리로 삼아, 어린이를 동료 시민에서 배제하고 분리해버리는 모든 "프로(pro)-노키즈존 인간"들이 부디 개개인 내면에 숨겨진 '혐오의 기제'를 깨닫고 우리 모두가 따로 또 함께 '견디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저는 대학생 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를 처음 읽었습니다.어떤 역자의 판본을 읽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주인공인 바틀비가 반복하여 발화했던 문장의 원문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 보았던 기억은 떠오릅니다.
"I would prefer not to be."*
저는 이 문장을 처음 알게 된 이후 지금도 종종 떠올려 보곤 해요.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가 느끼기에) 불필요하거나 그것이 폭력, 억압, 위계, 차별에 의한 것이라고 느낄 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낫겠어요. 혹은 더 명료하게,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문장으로 돌려 스스로 해석해 보다가 결국은 '저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래요.'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역에 있는 '일반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직접 요구하거나, '분위기' 또는 '관습'에 따라 해야만 하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어요. 그 선택의 가장 큰 예라면 바로 공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부를 포기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해야 하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은 사실에 가깝지만요. 수학과 영어가 어렵고, 사회탐구 영역은 도무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리"를 익히고, 그대로 "외워야만 한다"고 강요 받았던 모든 내용들이 '나의 삶'에 불필요하게 느껴졌지요. 그런 중에도, 저는 기형도, 허수경, 최승자의 시집과 전경린, 신경숙, 오정희, 박완서의 소설을 읽었어요. 헬무트 호르눙의 "블랙홀과 우주"를 읽었고, 뉴턴지를 읽었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었지요. 그건 제가 궁금하다고 느끼고, 알고 싶어지는 '지식'들이었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것들이었어요. 저는 그때도, 지금도 그것을 확신합니다.
학교에서 진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요? 경쟁의 구도와 자본주의의 폐단을 '학습'하고 '체화'하는 것이 교육의 진정한 목표일리 없는데, 왜 '학교'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 국가에서는 청소년들이 그것을 학습하도록 방치해두고 있는 것일까요? 왜 청소년들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왜 그것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 어려워졌을까요?
저는 이 지점에서 늘 '다양성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이 자신의 교차하는 정체성을 알게 된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배우고 싶고,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가 조금 더 명확해질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 학교와 학교의 공동체가 바라는 '나'와 진짜 '나' 사이에 생기는 간극을 좁히고,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이 서로를 이해하고 모두가 포함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우리'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래도 된다는 것을 서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직면한 '우리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한국다양성연구소 유튜브 채널에 게재된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 설명하기! 30초 안에 가능...? (with. 루인) | 온라인다양성훈련"(2021. 4. 22.) 영상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영상 보러 가기)
어떤 개인은 30초 만에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개인의 (30초 동안의)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무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를 30초 안에 설명하는 것과, 30초 동안 들은 설명(30초 동안 발화되는 분량 만큼의 설명)으로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른지는 모두에게 고민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의 발달-활성화와 함께 지난 2014년(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젠더/퀴어 의제는 1020 세대와 더욱 가까운 곳에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발화되고 소비되고 이해되었습니다. 개인과 타인의 경험, 의견, 설명과 연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배포/확산된 -또한 현재에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 역시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다양한 의견 속에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직접 '체감하고 있는' 경험도, 직/간접적으로 본 적이 있는 '사건'들도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위험성과 불안정성에 대해서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모든 개인의 경험은 동일하지 않으며, 애초에 모든 개인은 각각의 독립성과 교차성을 가진 개별자입니다. 주로 단문으로 게재/발화/배포되는 소셜미디어, 커뮤니티의 특성상 그곳에서 '설명'되는 의견과 논의는 적확하게 모든 사람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 내용이 잘 연구되고 정리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작성(발화)하는 사람과 습득(읽거나 듣거나 보는)하는 사람의 배경 지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얼마간의 독해 능력과 탐구, 이해의 의지/노력입니다. 덧붙여, '이해'한(혹은 했다고 느끼는) 내용을 선별하여 취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 촬영하고 제작한 영상(영상 보러 가기)에서 지하크와 루인('트랜스/젠더/퀴어 연구소' 활동가, 연구자)이 "30초 만에 설명"해야 했던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정성별
지하크, "외부 성기 모양만을 가지고 정해지는 성별"
이어서 루인, "인간이 태어났을 때 남성이어야 하는지, 혹은 여성이어야 하는지를 일률적인 세계에서 인위적으로 정해놓은 젠더 범주이고 이것이 외부에 의해서 규정되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와는 무관한, 단지 사회에서 분류하기 수월하도록 만들어놓은 체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트랜스(젠더)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고, 다른 말로 인간의 성별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는지, 사회 체제에 의해서 만들어져 갔는지를 알려주는 용어이기도 합니다."(약 50초)
성별이분법
지하크, "성별이분법은 방금 말한 지정성별에 의해서 둘 중에 하나 밖에 성별이... (성별이) 둘 중 하나여야 된다,"
이어서 루인, "인간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구분하는 시스템인데, 단순히 여성 아니면 남성이어야 한다가 아니라 어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위계질서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을 어떻게 '차별해도 되는' 체제로 만드는가에 대한 시스템입니다."(약 30초)
이어서 루인, "성역할은 대체로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으로 설명을 많이 하고 있고,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하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많은 경우에는 매우 불평등하게 구조화되어 있기도 하고 그 역할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함으로써 많은 폭력과 위반(끝!)"(약 30초)
성표현
지하크, "'남자답게', '여자답게'의 연장으로 이렇게 표현해야 된다,"
이어서 루인, "그 젠더표현(성표현) 같은 경우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꽤나 저항적인 의미로 등장한 용어이기도 한데요. 기존 체계에서 '남성다움'이나 '여성다움'을 설명하도록 계속 요구하는 데에서 더 어떻게 다른 방식의 실천을 가능하도록 할 것인가, 그리고 다른 트랜스젠더퀴어들의 다른 실천들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써 젠더표현(성표현)이라고 하는 용어가 등장하였습니다."(약 30초)
그 밖에 제시된 용어에는 성별정체성, 시스젠더, 성적지향, 젠더("젠더를 30초 안에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만 30초 동안 할 수 있는데요...!"), 섹슈얼리티, 패닉방어가 있었습니다. 특히, 제시된 용어 중 젠더나 섹슈얼리티는 영상 내에서 아주 "거대한" 용어로 표현됩니다. 사회 전반의 체제, 체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타인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개념은 '단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기도 합니다. 이는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에서 어떠한 개념, 용어 혹은 경험과 사례, 의견을 전달'하는 것'과 전달 '받는 것'에서 주의해야 할 것과도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소셜미디어, 커뮤니티에서 '받아들인 내용'을 전체 혹은 전부라고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을 꾸준히 경계해야 합니다. 개념과 용어를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한 맥락과 설명이 필요하며, 우리가 우리로서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개념을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와 개념을 삶으로 체화하며 실천하고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것이 사회와 사회 구성원, 사회적 소수자의 -차별과 생존- 경험을 얼마나 (혹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노력과 의지를 가지고 '선별'하여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잘 쓰인'(혹은 잘 쓰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글도 차별, 억압, 폭력, 혐오의 기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미디어 리터러시*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바로 이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사회/구조적 차별과 억압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그것은 '누구나' 타자에 대하여 차별과 억압을 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이 세계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며 생을 지속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의심하고,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고, 선별하고-독해하고, 삶으로써 실천해나가는 일 역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믿음'이 타자를 향한 폭력과 차별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꾸준히 다양성과 포함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022. 7. 27.)
안녕하세요, 웹진 까끌까끌의 온라인다양성훈련 게시판입니다. 이 게시판에는 한국다양성연구소의 온라인다양성훈련 관련 콘텐츠가 업데이트됩니다. 감사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인권 의식은 높아진 것 같은데, 왜 차별과 혐오는 줄어들지 않나요?
줄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 그런가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아는 시대가 됐고 이야기하는 시대가 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줄어들지 않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여성 혐오, 성소수자 혐오, 장애인 혐오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오히려 더 강해지고 있는 것 같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강화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여성과 남성처럼 서로를 혐오하는 현상도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요?와 같은 질문도 흔하다.
질문에 대답해 보기 위해서는 질문을 뜯어서 분석해 보아야 한다. 첫째로 지금이 이전 어느 때보다 인권 의식이 발달한 시대라는 전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인권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인권의 주체, 인권의 내용, 인권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 주체 등이 종합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둘째로 여기서 말하는 혐오란 무엇인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왜 커지고 있는가 살펴봐야 한다.
대법원 조형물 '정의의 여신상' ⓒ뉴시스
인권을 누리며 살아야 할(보장받아야 할) 인권의 주체는 “모든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인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 주체는 “국가”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인권 보장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가 인권이 침해되고 있을 때 국가에게 인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시민들은 국가에게 계속해서 권리를 요구하며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다. 그래서 인권을 다룰 때 시민 정치가 필수적이다. 나의 인권과 타인의 인권을 제대로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요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시민이 되려면 누구나 일상에서, 제도권에서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의 인권은 세계인권선언문을 지식으로 배우는 수준으로 교과서 속이나 시험지 속에 머무르고 있다. 또한 인권 교육은 시민들을 삶의 주체, 정치의 주체로 살게 하는 교육이 아닌 착한 사람을 만드는 인성교육 혹은 다른 사람에게 폭력(언어, 육체, 성적 폭력)을 사용하면 안된다(처벌받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폭력 예방 교육으로 만들어져 있다. 인권을 개인적인 문제로 만드는 방식이다.
두 번째로 뜯어보기로 한 “혐오”를 단순히 ‘싫어한다’는 감정의 영역으로 잘못 다루는 이들이 많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 편견, 낙인을 강화시키고 차별, 억압, 폭력을 유지하는 사회문화와 구조의 영역이 혐오다. 국가가 시민의 인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 주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나의 인권이 침해될 때 국가에게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를 비난하기 쉬워진다. 예를 들어, 국가가 나를 원치도 않는 시기에 원치는 않는 곳에 보내서 원치도 않는 일이 시키며 강제로 군 복무를 시키는데 국가에게 이를 해결(징병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거나 징병제를 없애거나 휴전 상태를 종전 상태로 바꾸는 등)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여성을 비난하는 것이다. 군대 문제를 여성혐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내가 처한 군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하고 엉뚱한 사람을 비난하게 만듦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요원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한날한시에 모두가 똑같은 시험을 치는데 차별이 어디 있나요?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차별을 당했다고 하면 어떡하나요?”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자기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서 살기에 급급하다. 모두를 죽여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오징어 게임”이 현실과 닮아있다. 승자가 독식하며 패자는 죽는다. 모두는 승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교육 시스템이 굳건하다. 입시는 평가와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한다. 입시에서 인권 같은 건 중요하지 않고, 다른 사람(생명)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같은 것은 배울 필요가 없다. 이 사회는 이미 공정하며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은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못 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으로 이해, 인정된다. 누가, 무엇을 “능력”으로 규정했는지 등은 질문하지 않는다. 이 “공정 담론”은 사회 문제를 사회 문제로 여기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으로 개인의 문제로 끊임없이 치환하며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모든 사회 문제는 그저 개인의 문제로 여겨진다. 차별, 억압, 폭력의 문제를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 할 사회 구조(법, 제도, 인식, 문화)의 문제로 인지되지 못하게 한다.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사회다. 노동자들(시민들)은 자본가들과 국가에 의해 착취를 당하고 있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착취하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그만큼의 고강도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끔 만들어진다. 또한 자신의 그런 관점이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는 데 기여하고 있어도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인권단체 회원들이 무지개 깃발과 피켓을 들고 있다. ⓒ민중의소리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의 사고방식을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권력자의 관점을 그대로 내 안에 이식함으로써 그들이 사고하는대로 나도 사고한다. 노동자와 시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재벌과 국가를 걱정한다. 특권 그룹의 관점을 소수자들에게 심어주는 통치 전략이다. 노동자가 경영자의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 기본값으로 여겨지는 사회다. 말단 노동자까지 ‘오너 마인드’를 가지고 일하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한 단면이다. 이러한 흐름이 강화되는 속도와 방향이 인권교육이 확대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게 시민들의 사고방식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통치전략에 속절없이 노출되어 인권 교육이 힘을 못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모든 시민이 모두의 인권을 일상에서 말하고 요구하는 정치의 주체가 되려면 어떤 고민이 더 필요할까? 자신의 가지고 있는 사회적 억압과 특권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도 사회 문제의 일부임을 인지하며, 사회적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억압을 나의 일로 공감하고, 이 억압과 연결된 사회구조의 문제를 발견하는 심도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다양성훈련이 할 수 있는 역할이며 확산하여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교육의 힘을 믿는다. 교육을 통해 사람은 변할 수 있으며 사회 변화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협력과 공존을 배우는 것이 공교육의 목적이 돼야 한다. 그런 공교육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쟁과 경쟁을 통한 서열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현재의 교육 제도를 끝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입시가 사라져야 한다. 입시가 중요하지 않은 사회가 되려면 대학을 가든 가지 않든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이는 노동문제와 직결돼 있다. 어떤 노동을 하든 모든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보편복지라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여 어느 누구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국가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직접 그 운영을 맡아야 한다. 정치는 50~60대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고소득층, 엘리트, 선주민, 남성들만의 것이 아니다. 거대 양당제를 유지하면 그들만의 정치는 계속될 것이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제도권 내 정치인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순간이 정치다. 우리의 삶을 자신들의 이득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직업 정치인들에게 맡길 순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으로 우리가 만들어 간다.
민중의소리에서 칼럼보기
수술 하고, 법원 가서 성별 정정 하고. 그러면 다 끝날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믿었다. 이 산을 일단은 넘어야 하니까. 죽을 힘 다해서 산을 넘었다.
신체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여성인 나의 일상은 다른 여성과 같았다. 세세하게 다른 부분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개인차라고 보기에 무리 없는 수준. 나는 평범한 여자,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갔다.
매일 아침 잠을 포기하고 벌레 씹은 표정으로 화장을 하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 내 입술 색깔과 업무 능력의 상관 관계를 300자 내외로 설명하시라고 부장에게 들이받을 날이 오고야 말리라 되뇌며, 조용히 분을 삭이는.
만약 내 삶이 영화고 여기서 엔딩 크레딧이 내려온다면, 그럭저럭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 해피엔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은 다른 장면들을 긴긴 세월 동안 풀어내며 질기도록 이어졌다.
여성으로 패싱(주변으로 어떤 성별로 인지되는 것)되기 전과 후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안전에 대한 체감이었다. 공공장소에 치한이 실존한다는 것을 여성으로 패싱된 20대 중반에야 알았다. 직접 겪어서.
백주대낮에 여자를 완력으로 제압하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하는 남자가 종종 있다는 것도 그 즈음 알았다. 내 일일 수도 있겠다고 신경을 써야 보이기 시작하더라. 아무리 봐도 연인 관계 같은데, 대체 왜 저런 상황이 벌어지는 건지 의아했다. 데이트 폭력 이라는 말을 안 건 한참 나중의 일이다.
급기야 전혀 모르는 여자를 대상으로 한 살인 사건까지 벌어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두려웠다. 이유는 하나였다. 피해 여성이 범죄의 표적이 된 이유가 ‘없어서.’ 그냥 여자라서 죽임 당한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하필 범행이 벌어진 그 순간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야기다. 강남역 출구에 흐드러지게 핀 포스트잇 중엔 내 것도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제는 더 아프거나 무서워하지 말고 편안하시라'고 썼던 것 같다.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여자라서 죽었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 외치며 두려움을 분노로 승화시키는 여성들이 있었다. 이 사건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이며 매우 위험한 사회현상의 징후라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 ‘남자가 더 많이 죽는다’고 여자들의 ‘피해망상’을 지적하는 남성들도 있었다. 어느 분홍 코끼리는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더라.
논쟁에 불이 붙자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통계가 투척되었다. 투척.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봐라. 이것이 과학이다. 팩트 가져왔다. FIRE IN THE HOLE! 통계는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 아니다. 통계는 연구 또는 조사를 거쳐야 나온다. 그 연구 또는 조사가 얼마나 타당했는지, 전제와 과정에서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무엇인지 등을 살펴보고, 소통의 맥락에 맞는 근거 자료로 쓸 때 통계가 제 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연구는 강력범죄에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희생된다고 말한다.
어떤 연구는 여성이 하루에 한 명 꼴로 남성 파트너에게 죽임당한다고 말한다.
두 연구 다 맞는 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각자의 맥락에서.
여성이 '여성이어서 경험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해 적잖은 불안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런 일이 이미 본인 또는 주변인에게 벌어진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인권운동단체에서 발표하는 통계의 표본에도 들지 못한 피해여성들이 있을 거라고 늘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피해사실을 숨기는 여성이 얼마나 흔한지, 여성들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대체로 여성은 남성의 완력에 의해 제압되거나 신체적·정신적 폭력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폭력은 인격모독, 손찌검에서 가스라이팅, 살해까지 전부를 아우른다. 이러한 사건에 관련될 확률이 몇 %이든, 나 또는 주변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시점에서 이미 100%다.
여기에 대고 '다 너희 피해망상이야'라며 통계를 들이미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애써 찾을 땐 없다가도, 염두에 두지 않고 살다 보면 마주치게 된다. 성적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지, 로맨틱한 기류라고 해야 할지. 그런 느낌을 나와 서로 주고받는 상대를. 그 사람을 발견하고 나면 머잖아 이런 순간이 온다. 고백하거나, 받아 내거나 둘 중 하나인 순간. 이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
나는 그 달달한 순간에 커밍아웃이라는 찬물을 끼얹는다. 나와 연인관계가 되거나 최소한 FWB(Friends With Benefits)라도 된 남자들은 내가 트랜스젠더 여성인 것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인지했다. 작년에 본 정신과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강박적인’ 커밍아웃을 반복하는 것은, 친밀한 사람으로부터 절대로 겪고 싶지 않은 일이 한 가지 있기 때문이다.
살해당하는 것.
2009년. 충격적인 기사를 읽었다. 어느 남자가 몇 년 동안 만난 여자친구를 살해했다는 소식이었다. 살해 동기는, 여자친구가 알고 보니 트랜스젠더여서.
여자친구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숨겼다가 들켰거나 나중에 밝혔다면, 남자친구가 배신감을 느끼거나 속상할 수는 있겠다. 그렇다고 죽인다? 목숨을 빼앗는다? 연인이 트랜스젠더라는 점이 사랑하던 그 사람을 죽여 버릴 동기가 된다는 게 등골이 오싹하도록 두려웠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차츰 잊혀갔다. 호르몬을 맞고, 수술을 받고, 법적 성별을 정정하고... 삶을 바로잡으며 느끼는 환희에 두려운 기억이 묻혔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순간이 내게도 왔다. 로맨틱한 감정을 주고받는 상대에게 내가 먼저 고백을 하거나, 그로부터 고백을 받아 내거나, 둘 중 하나인 순간. 뱃속이 간질간질하고 뺨이 따뜻해지는데, 돌연 벼락처럼 옛 기억이 번쩍였다. 남자친구한테 살해당한 트랜스젠더 여성 이야기.
나는 좋아해요, 사랑해요, 오늘부터 1일 합시다, 이런 말들 대신 커밍아웃을 했다. 사실 저 트랜스젠더예요, 라고.
그동안 사랑한 사람 중 그 누구도,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나를 배척하거나 나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굳게 믿을 수 있다. 좋은 남자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백에 앞선 커밍아웃에 어떤 사람은 믿음을 줘서, 속이지 않아서 고맙다며 다소 감동받은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 타이밍에 커밍아웃하는 건지 마저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이 관계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함께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이 남자가 속 편한 바보인 채로 날 평범하게 사랑해주는 게 나으니까.
결국 나를 사랑한 남자들은 다 바보들 뿐이었다.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어떤 어려움을 경험하셨나요? "가장 큰 어려움"이라는 구를 들었을 때 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으신가요? 이 글의 제목인 "살아오면서 경험한 가장 큰 어려움에 대해 서술하시오"는 흔히 실패 경험과 극복 사례로 불리는 (주로 대)기업 자기소개서 문항에서 따 왔습니다. 비슷한 문항으로는 성공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인생의 실패나 성공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취업 준비생이 "이 경험이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나" 혹은, "나는 크게 실패(성공)해 본 경험이 없는데 어떤 것을 써야 할까"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더 많은 취업 준비생 대상 컨설팅 업체, 스터디에서 어떻게 이 질문에 '대응'해야 하는지 '공식'을 이야기해준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자본과 경제력, 학력과 학벌 등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에 따라 실패와 성공 경험이 달라진다는 논의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시험에서 5수를 거쳐 시험에 합격했다면, 그 사람이 다섯 해 이상 수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던 여러 사회적 권력과 배경이 있었을 것이라는 식으로요. 실패를 '경험'할 수 있고, 또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갖는 것이 사회적 정체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요. 그러니 누군가가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을 목표로 할 때, 누군가는 절대 경험을 반복할 수 없고(해서는 안 되고), 실패하지 않아야 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실패해도 되고, 실패할 수 있고, 다시 회복하여 (성공이 아닌)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제도와 자본주의 논리가 변화해야 합니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성공" 경험 사례와 "실패" 경험 사례에 대한 공식 및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은 결국 "노력"을 강조하라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어떤 일을 성공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지속적으로 노력했는지, 산업 분야와 업무, 직무에 따른 적절한 키워드를 찾아 내가 (개인이) 얼마나 해당 분야에 적합한 사람인지 강조하게 하는 것이지요.
최근 몇 년 사이, 학력과 학벌 정보를 제외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블라인드 채용 과정에서 주어지는 질문(물론 이 문항은 블라인드 채용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요) 역시 사회적 정체성에 따라서 응답할 수 있는 경험의 사례가 달라진다는 것(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어려움(실패)은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기업과 국가에서는 그러한 "어려움"을 비가시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력, 신체적 정신적 장애 여부, 성별,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 등 "억압 그룹"이 경험한 차별과 억압에서 비롯된 어려움과 "실패 경험"을 기업은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실패"나 "성공" 경험에 대한 서술은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선택되고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이 모든 책임을 방임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묻는 "실패 경험과 극복 사례"는 다분히 특권 그룹의 삶을 반영합니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으며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면 된다는 경험담과 컨설팅은 기만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모두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해야 하는 일을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과도한 업무 시간, 직장 내 괴롭힘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와 같이 사회적 정체성에 따른 억압 그룹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채용(구직)부터 노동, 이직과 퇴사 이후까지 죽거나 다치지 않도록 국가가 법과 제도로써 이를 보장해야 합니다. 국가는 더 늦기 전에 당장, "노동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 "노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 "노동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모두 포함되어 죽거나 죽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대학교 학부 재학 시기에 3년 정도, 초등학교를 마주한 빌라의 원룸에서 살았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종소리, 리코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곤 했습니다. 학교에는 나무가 있고, 모래가 있고, 흙이 있고, 놀이기구와 운동기구, 그리고 어린이와 어른들이 함께 있습니다. 너무 슬픈 새벽에,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면 "저 곳"에 어린이들이 우르르 채워지고 무언가를 배우고, 무언가에 의해 열심히 웃고 또 우르르 집으로 -혹은 집 같은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하며 시간을 견디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시기에는 박물관의 특별전시실에서 전시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요. 비교적 잘 알려진 유물과 작품이 모이는 전시였고, 어플리케이션(APP)을 활용하는 넓은 체험형 공간이 있어 유난히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관람을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체험 전시실에 어린이가 입장할 때 함께 있던 스태프들이 환하게 웃으며 어린이를 맞이했던 풍경을 저는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 무렵에도 "노키즈존"이라는 형태로 어린이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가게들이 있었기 때문에, 꼭 어린이 관람객만을 기다린 것처럼 기쁘게 환대하는 장면 속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게 아직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제가 여태 살아오며 만난 가장 많고 다양한 영유아, 어린이 시민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시가 종료되고 걱정과 분노를 담아 생각했지요. "이제 나는 어디에서 어린이를 만날 수 있을까?"하고요.
제가 전시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마친 이후 4년이 흘렀습니다. "노키즈존"은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마구마구 만연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논의를 "너무 오래" 지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키즈존"이라는 단어는 "특정 연령 이하/미만의 어린이 입장 불가 구역"를 의미합니다. "zone(구역)"이라는 표현에서, "노키즈존 no-kids zone"이라는 단어는 공간성을 가집니다. 한편, "노키즈존"이 과연 공간, 구역, 장소에 국한되어 있는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키즈존"이 명백히 어린이를 차별하고 억압하며, 배제하는 공간이라는 논의는 (충분히, 혹은 얼마간) 나누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덧붙여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공간'에 대하여 누군가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에서 타인을 차단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공간의 제한을 두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노키즈존"에 '기꺼이 가는 사람들'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저는 연령에 따른 차별과 배제를 행하고 간접적으로 가담하는 그 모든 사람들을 "프로(pro)-노키즈존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 어린이가 있는 것을 불편해 할까요? 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불편해 하는 일을 불편해하지 않을까요? 왜 불편함의 이유를 들여다보지 않을까요?
어떤 '공간'의 출입을 막는 주체는 사람입니다. 그 주체는 대부분 어린이가 아닌, 특권 그룹에 속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노키즈존"이라는 단어는 '공간'을 핑계로 개인의 차별과 억압의 기제를 숨기고, "쾌적하고 안전한 '공간'을 위한 선택"인 것처럼 개개인의 혐오를 포장해 버립니다.
최근 동료 활동가와 함께 사는 어린이와 짧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조용한 어린이였는데, 이번에 제가 만나게 된 어린이는 힘이 넘치고, 씩씩하고, 즐거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조용한, 힘이 넘치는, 씩씩한, 즐거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특성은 사실상 연령과 무관합니다. 연령과 무관하게 어떤 사람들은 각각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외향적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을 즐거워하고, 밥을 적게 먹고, 못 먹는 음식이 있고, 낯을 가리고, 춤을 추고, 독서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어떠한 기질과 성정, 취향과 감정/상태를 "연령적 특성"으로 묶어 차별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모두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특정한 "기질과 성정"을 특정한 "연령"에 따른 핑계거리로 삼아, 어린이를 동료 시민에서 배제하고 분리해버리는 모든 "프로(pro)-노키즈존 인간"들이 부디 개개인 내면에 숨겨진 '혐오의 기제'를 깨닫고 우리 모두가 따로 또 함께 '견디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저는 대학생 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를 처음 읽었습니다.어떤 역자의 판본을 읽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주인공인 바틀비가 반복하여 발화했던 문장의 원문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 보았던 기억은 떠오릅니다.
"I would prefer not to be."*
저는 이 문장을 처음 알게 된 이후 지금도 종종 떠올려 보곤 해요.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가 느끼기에) 불필요하거나 그것이 폭력, 억압, 위계, 차별에 의한 것이라고 느낄 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낫겠어요. 혹은 더 명료하게,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 문장으로 돌려 스스로 해석해 보다가 결국은 '저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래요.'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역에 있는 '일반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직접 요구하거나, '분위기' 또는 '관습'에 따라 해야만 하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어요. 그 선택의 가장 큰 예라면 바로 공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부를 포기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해야 하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은 사실에 가깝지만요. 수학과 영어가 어렵고, 사회탐구 영역은 도무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리"를 익히고, 그대로 "외워야만 한다"고 강요 받았던 모든 내용들이 '나의 삶'에 불필요하게 느껴졌지요. 그런 중에도, 저는 기형도, 허수경, 최승자의 시집과 전경린, 신경숙, 오정희, 박완서의 소설을 읽었어요. 헬무트 호르눙의 "블랙홀과 우주"를 읽었고, 뉴턴지를 읽었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었지요. 그건 제가 궁금하다고 느끼고, 알고 싶어지는 '지식'들이었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것들이었어요. 저는 그때도, 지금도 그것을 확신합니다.
학교에서 진짜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요? 경쟁의 구도와 자본주의의 폐단을 '학습'하고 '체화'하는 것이 교육의 진정한 목표일리 없는데, 왜 '학교'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 국가에서는 청소년들이 그것을 학습하도록 방치해두고 있는 것일까요? 왜 청소년들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왜 그것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 어려워졌을까요?
저는 이 지점에서 늘 '다양성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이 자신의 교차하는 정체성을 알게 된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배우고 싶고,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가 조금 더 명확해질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 학교와 학교의 공동체가 바라는 '나'와 진짜 '나' 사이에 생기는 간극을 좁히고,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이 서로를 이해하고 모두가 포함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우리'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래도 된다는 것을 서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직면한 '우리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혹은 "나는 그렇게 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겠다."
* "다양성훈련"을 더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이 글은 한국다양성연구소 유튜브 채널에 게재된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 설명하기! 30초 안에 가능...? (with. 루인) | 온라인다양성훈련"(2021. 4. 22.) 영상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영상 보러 가기)
어떤 개인은 30초 만에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개인의 (30초 동안의)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무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를 30초 안에 설명하는 것과, 30초 동안 들은 설명(30초 동안 발화되는 분량 만큼의 설명)으로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른지는 모두에게 고민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의 발달-활성화와 함께 지난 2014년(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젠더/퀴어 의제는 1020 세대와 더욱 가까운 곳에서, 더 다양한 방식으로 발화되고 소비되고 이해되었습니다. 개인과 타인의 경험, 의견, 설명과 연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배포/확산된 -또한 현재에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 역시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다양한 의견 속에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직접 '체감하고 있는' 경험도, 직/간접적으로 본 적이 있는 '사건'들도 있습니다. 다만, 무엇을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의 위험성과 불안정성에 대해서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모든 개인의 경험은 동일하지 않으며, 애초에 모든 개인은 각각의 독립성과 교차성을 가진 개별자입니다. 주로 단문으로 게재/발화/배포되는 소셜미디어, 커뮤니티의 특성상 그곳에서 '설명'되는 의견과 논의는 적확하게 모든 사람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 내용이 잘 연구되고 정리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작성(발화)하는 사람과 습득(읽거나 듣거나 보는)하는 사람의 배경 지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얼마간의 독해 능력과 탐구, 이해의 의지/노력입니다. 덧붙여, '이해'한(혹은 했다고 느끼는) 내용을 선별하여 취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 촬영하고 제작한 영상(영상 보러 가기)에서 지하크와 루인('트랜스/젠더/퀴어 연구소' 활동가, 연구자)이 "30초 만에 설명"해야 했던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정성별
성별이분법
성역할
성표현
그 밖에 제시된 용어에는 성별정체성, 시스젠더, 성적지향, 젠더("젠더를 30초 안에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만 30초 동안 할 수 있는데요...!"), 섹슈얼리티, 패닉방어가 있었습니다. 특히, 제시된 용어 중 젠더나 섹슈얼리티는 영상 내에서 아주 "거대한" 용어로 표현됩니다. 사회 전반의 체제, 체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타인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개념은 '단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기도 합니다. 이는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에서 어떠한 개념, 용어 혹은 경험과 사례, 의견을 전달'하는 것'과 전달 '받는 것'에서 주의해야 할 것과도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소셜미디어, 커뮤니티에서 '받아들인 내용'을 전체 혹은 전부라고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을 꾸준히 경계해야 합니다. 개념과 용어를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한 맥락과 설명이 필요하며, 우리가 우리로서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개념을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젠더/퀴어/페미니즘 용어와 개념을 삶으로 체화하며 실천하고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그것이 사회와 사회 구성원, 사회적 소수자의 -차별과 생존- 경험을 얼마나 (혹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도 노력과 의지를 가지고 '선별'하여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잘 쓰인'(혹은 잘 쓰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글도 차별, 억압, 폭력, 혐오의 기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바로 이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사회/구조적 차별과 억압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그것은 '누구나' 타자에 대하여 차별과 억압을 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이 세계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며 생을 지속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의심하고,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고, 선별하고-독해하고, 삶으로써 실천해나가는 일 역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믿음'이 타자를 향한 폭력과 차별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꾸준히 다양성과 포함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022. 7. 27.)
* 미디어 리터러시: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고, 그것이 제공하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를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 (출처: 미디어 리터러시 media literacy,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960355&cid=40942&categoryId=3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