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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레터괴담 [말풍선]


이력서. 학생 시절에 끝을 고하고 사회인이 될 준비를 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친 벽이었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참으로 재수 없게도, 남중과 남고. 현재 성별은 외관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여성이다. 당시 나는 트랜스젠더의 취업에 관한 여러 ‘괴담’을 듣고 무척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다.


졸업한 학교가 여중‧여고, 또는 남중‧남고인 것을 들켜서 해고 당한다든지. 직장에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며, 현재 법적으로 인정된 성별로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든지. 이미 성별정체성에 맞는 성별로 보이지만, 법적 성별은 정정되지 않은 어느 트랜스젠더가 지인의 신분을 빌려 일을 했다든지.


문제는 이 ‘괴담’들이 다 현실에 있는 얘기였다는 것이다.


썩 순탄치는 않았고 보기 좋지도 않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이력서에 욱여넣을 경력이 있긴 한 지금에야 출신 중고등학교 정보 따위, 공간만 차지한다. 이력서에서 뺀 지 오래다.


하지만 사회에 첫발 내딛을 땐 얘기가 달랐다. 인턴십도 했고 갖가지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막상 구인구직 시즌이 되니, 내가 취직하기를 바라는 분야의 일자리가 너무나도 적었다. 결국 여기저기에 범용성 좋게 뿌릴 수 있는 이력서를 만들어야 했는데, 성격이 달라진 이력서에 쓸 만한 내용이 딱히 없었다. 여기서 출신 학교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한 줄이라도 내용을 덜어내는 게 무척 부담스러웠다.


이력서를 어찌저찌 쓰고 입사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면서, 여성학 시간에 사례로나 들어 본 ‘비상식적인 질문’을 우수수 받았다. 연애, 결혼, 임신, 출산 어쩌고 하는 질문을 정말 대놓고 물어보더라. 너무 당연한 듯이 물어봐서 놀랐다. '아. 트랜스젠더라는 태그를 뗀 보통의 2030에게도 사회는 이상한 곳이구나.'  면접관들은 시간과 비용을 구직자에게 맡겨 놓은 것처럼 굴었다. 면접만 적게 잡아도 서른 곳 이상 보았지만 면접비를 준 회사는 단 두 곳이었다.


모든 어려움을 어떻게 잘 피하거나 극복해서 취직에 성공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직장에 안착한다는 보장은 없다. 대단히 번듯하지는 못한, 진짜 대다수 청년이 근무하는 직장의 노동인권 인식 수준은 실로 처참하다. 고용주가 고개 들고 회사를 활보하는 게 신기할 정도. 월급 지급일 밀린 적 없다는 게 대단한 자랑거리인 것이 현실 속 고용주들의 인식 수준이더라.


어떻게든 일은 시키고 돈은 덜 주려는 고용주의 온몸 비틀기를 보면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즐겁게 일해야 한다. 노동자에게 주인의식을 바라면 회사 지분을 나눠주면 될 텐데. 야근 등 초과근로에 따르는 임금은 바랄 수가 없다. 고용주 왈, 내가 평소에 받는 임금 안에 이런저런 수당이랑 상여금까지 다 들어가 있는 거란다. 그런데도 급여수준이 최저임금선이다. 아니, 어떻게? 고용주들 끼리만 아는 셈 법이 있는 게 분명하다. 노동자 처우가 이 모양인지라, '사회적 소수자와 함께 일하기 위해 필요한 인권감수성 교육' 같은 건 얘기조차 꺼내본 적이 없다.


이 글을 10년 전의 내가 읽었다면 어땠을까. 글쓴이가 세상에 둘도 없이 박복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노력으로, 의지로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남의 일'로 여겨질 것이다. 듣기에 영 찝찝하지만 결국 시시콜콜할 뿐인 '괴담'이 되겠지. 그래. 아주 그렇다면 좋겠다. 이런 좋지도 않은 얘기들은 괴담인 편이 모두에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