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9일 지니TV 오리지널로 시작한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에서 추상은(임지연役)의 짜장면 먹방 장면이 화제가 됐다. 추상은은 남편으로부터 일상적으로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는 가정폭력 피해자이자 식욕을 잃은 상태의 임신부였다. 추상은은 경찰서에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중식당에서 짜장면, 탕수육, 군만두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남편의 동생에게 사망 소식을 덤덤하게 전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장면이 화제가 되면서 온라인에서는 짜장면, 탕수육, 군만두 조합을 가리켜 “남편 사망 정식”, “가정폭력 해방 정식”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식사를 인증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러한 게시물들에 대해 많은 불편함과 분노를 표현하는 글도 등장했다. “남편 사망 정식이라니 너무했다”, “남자들이 ‘아내 사망 정식’이라는 말을 만들면 여자들 가만 있겠냐”와 같은 비판이 이어졌다. 가해자에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한 것이다. 구조와 맥락을 삭제한 채 단순히 성별을 뒤집어서 공격하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성평등 교육,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다 보면 “왜 여자 편만 드냐”며 “왜 남자는 항상 가해자로 등장하냐”고 묻는 남성 참여자들이 있다. ‘억울한 남성’의 등장이다. 사례를 이야기할 때 성별을 특정하지 않아도 참여자들이 가해자를 남성으로 생각하고 듣는 경우가 많다. 그러곤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남성들이 꼭 가해자에게만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군대 이야기를 하거나 직장 얘기를 하면 상급자나 상사가 언어적, 심리적, 육체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분노하고 피해자나 약자에게 공감을 한다. 폭력적인 사람들을 향해 “없어져야 한다”고 하고 “처벌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해서는 이것이 잘 안 되는 것이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문제는 왜 ‘폭력’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가해자의 성별’에 집중하여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일까?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에서 추상은(임지연役)은 가정폭력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임산부였던 그는 폭력 피해로 식욕을 잃었었다. ⓒ드라마 캡처
불편함을 느꼈다면 왜 불편했는지 돌아보자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이 사례가 왜 불편한지 무엇이 불편한지’ 자세하게 써보게 하는 활동을 진행하곤 한다. 교실 앞으로 나와서 칠판에 단체로 적어보게 할 때도 있고, 각자 가지고 있는 활동지에 적어보게 하기도 하고, 또는 손 들고 목소리로 이야기 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가해자가 남자라서 불편하다”는 얘기가 반드시 나온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대답이 대다수라는 점이다. 방금 다루었던 사례에서 그 어디에도 가해자가 남성이었다는 정보는 없었다고 이야기 하면 ‘그래도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렇게 가정하고 듣게 됐는지, 그리고 가해자가 남성이라면 왜 이 사례가 기분 나쁜 사례로 여겨지는지를 또 물어본다. 그러면 주로 ‘그냥 가해자가 남성이라서 기분이 나쁘다’ 그리고 ‘내가 마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싫다’는 답을 듣게 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 것이 익숙한 사회에서, 자신이 주로 정체화하는 정체성이 가해자로 등장하는 구조의 문제를 말할 때 ‘매도’당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럼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 직장에서나 군대에서 나에게 언어적, 심리적, 육체적 성적 폭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상급자나 상사가 남성이라면? 그 가해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그 사례에서도 남성인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고 그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쁠까? 질문을 해보면 ‘그건 그렇지 않다’고 생각이 모아진다. 그럼 그 사례에서는 왜 기분이 나쁘지 않냐고 질문하면 그 사례에선 ‘내가 피해자가 될 것 같다, 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폭력이나 불합리한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가 한다. 그때 성폭력과 가정폭력 사례에서도 폭력 자체에 집중해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한다. 남성 역시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포함해서 군대와 직장 등 많은 곳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폭력이 없는 사회에 사는 것이 남성에게도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폭력 없는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묻는다. 폭력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사회적으로 필요한 변화를 적고 대화한다. 이렇게 진행했을 때 단 한 번도 끝끝내 반감을 표현하고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조를 논의해야 할 때 개인의 억울함만 이야기해선 안 된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안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폭력적인 일상에 방치되어있던 사람의 식사 장면에서 우리가 발견해야하는 것은 불쾌함이 아니다. 사망 정식이라는 단어가 불쾌한 단어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나를 공격하거나 나를 가해자 취급하는 단어로 들릴 이유는 없다. 이것은 폭력의 문제이고 폭력이 없는 사회는 우리가 바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 왜 공감하는가? 나는 폭력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가해자 취급 당할까봐 걱정만 하고 있을 것인가?
구조를 바라봐야하는 논의가 필요한 순간마다 매번 개인의 ‘억울한 감정’만 이야기 된다면 이미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폭력들이 결코 해결될 수는 없다. 폭력을 용인하는 문화와 구조가 유지되는 한 ‘억울한 감정’을 해소해주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은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며, 정체성에 따라 억압을 받기도 누군가를 억압하기도 한다. “내가 언제 차별했다고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대부분 차별이 공고한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게, 비의도적 수동적으로 구조적 차별에 동참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혹은 자신이 누군가를 차별을 할 수도 있는 사람, 폭력을 가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굳이 인정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외면하는 것이 편한, 매우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기를 시작하자. 가해자에 공감하는 쉬운 방법이 아닌, 피해자에 공감하고 진짜 문제를 발견하자. 차별, 억압,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임을 확인하자. 폭력없는 사회는 결국 모두에게 이롭다. 당신은 누구에게 공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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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9일 지니TV 오리지널로 시작한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에서 추상은(임지연役)의 짜장면 먹방 장면이 화제가 됐다. 추상은은 남편으로부터 일상적으로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는 가정폭력 피해자이자 식욕을 잃은 상태의 임신부였다. 추상은은 경찰서에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중식당에서 짜장면, 탕수육, 군만두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남편의 동생에게 사망 소식을 덤덤하게 전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 장면이 화제가 되면서 온라인에서는 짜장면, 탕수육, 군만두 조합을 가리켜 “남편 사망 정식”, “가정폭력 해방 정식”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식사를 인증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러한 게시물들에 대해 많은 불편함과 분노를 표현하는 글도 등장했다. “남편 사망 정식이라니 너무했다”, “남자들이 ‘아내 사망 정식’이라는 말을 만들면 여자들 가만 있겠냐”와 같은 비판이 이어졌다. 가해자에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한 것이다. 구조와 맥락을 삭제한 채 단순히 성별을 뒤집어서 공격하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성평등 교육,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다 보면 “왜 여자 편만 드냐”며 “왜 남자는 항상 가해자로 등장하냐”고 묻는 남성 참여자들이 있다. ‘억울한 남성’의 등장이다. 사례를 이야기할 때 성별을 특정하지 않아도 참여자들이 가해자를 남성으로 생각하고 듣는 경우가 많다. 그러곤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남성들이 꼭 가해자에게만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군대 이야기를 하거나 직장 얘기를 하면 상급자나 상사가 언어적, 심리적, 육체적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분노하고 피해자나 약자에게 공감을 한다. 폭력적인 사람들을 향해 “없어져야 한다”고 하고 “처벌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해서는 이것이 잘 안 되는 것이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문제는 왜 ‘폭력’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가해자의 성별’에 집중하여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일까?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에서 추상은(임지연役)은 가정폭력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임산부였던 그는 폭력 피해로 식욕을 잃었었다. ⓒ드라마 캡처
불편함을 느꼈다면 왜 불편했는지 돌아보자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이 사례가 왜 불편한지 무엇이 불편한지’ 자세하게 써보게 하는 활동을 진행하곤 한다. 교실 앞으로 나와서 칠판에 단체로 적어보게 할 때도 있고, 각자 가지고 있는 활동지에 적어보게 하기도 하고, 또는 손 들고 목소리로 이야기 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가해자가 남자라서 불편하다”는 얘기가 반드시 나온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대답이 대다수라는 점이다. 방금 다루었던 사례에서 그 어디에도 가해자가 남성이었다는 정보는 없었다고 이야기 하면 ‘그래도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렇게 가정하고 듣게 됐는지, 그리고 가해자가 남성이라면 왜 이 사례가 기분 나쁜 사례로 여겨지는지를 또 물어본다. 그러면 주로 ‘그냥 가해자가 남성이라서 기분이 나쁘다’ 그리고 ‘내가 마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싫다’는 답을 듣게 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 것이 익숙한 사회에서, 자신이 주로 정체화하는 정체성이 가해자로 등장하는 구조의 문제를 말할 때 ‘매도’당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럼 다음 질문이 필요하다. 직장에서나 군대에서 나에게 언어적, 심리적, 육체적 성적 폭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상급자나 상사가 남성이라면? 그 가해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그 사례에서도 남성인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고 그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나쁠까? 질문을 해보면 ‘그건 그렇지 않다’고 생각이 모아진다. 그럼 그 사례에서는 왜 기분이 나쁘지 않냐고 질문하면 그 사례에선 ‘내가 피해자가 될 것 같다, 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폭력이나 불합리한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가 한다. 그때 성폭력과 가정폭력 사례에서도 폭력 자체에 집중해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한다. 남성 역시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포함해서 군대와 직장 등 많은 곳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폭력이 없는 사회에 사는 것이 남성에게도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폭력 없는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묻는다. 폭력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사회적으로 필요한 변화를 적고 대화한다. 이렇게 진행했을 때 단 한 번도 끝끝내 반감을 표현하고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조를 논의해야 할 때 개인의 억울함만 이야기해선 안 된다
남편이 죽었을 때 안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폭력적인 일상에 방치되어있던 사람의 식사 장면에서 우리가 발견해야하는 것은 불쾌함이 아니다. 사망 정식이라는 단어가 불쾌한 단어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나를 공격하거나 나를 가해자 취급하는 단어로 들릴 이유는 없다. 이것은 폭력의 문제이고 폭력이 없는 사회는 우리가 바라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 왜 공감하는가? 나는 폭력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가해자 취급 당할까봐 걱정만 하고 있을 것인가?
구조를 바라봐야하는 논의가 필요한 순간마다 매번 개인의 ‘억울한 감정’만 이야기 된다면 이미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폭력들이 결코 해결될 수는 없다. 폭력을 용인하는 문화와 구조가 유지되는 한 ‘억울한 감정’을 해소해주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은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며, 정체성에 따라 억압을 받기도 누군가를 억압하기도 한다. “내가 언제 차별했다고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대부분 차별이 공고한 사회에서 자신도 모르게, 비의도적 수동적으로 구조적 차별에 동참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혹은 자신이 누군가를 차별을 할 수도 있는 사람, 폭력을 가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굳이 인정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외면하는 것이 편한, 매우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기를 시작하자. 가해자에 공감하는 쉬운 방법이 아닌, 피해자에 공감하고 진짜 문제를 발견하자. 차별, 억압,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임을 확인하자. 폭력없는 사회는 결국 모두에게 이롭다. 당신은 누구에게 공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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