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오랫동안 당한 학교폭력은 트라우마가 되었고, 내게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내 몸이 OO대학교 OOO학과에 다니는 동안에도 마음은 XX고등학교 X반 교실에 갇혀 있었다.
누구라도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내 힘든 얘기를 자주 했다. 고생 끝에 대학 와서 캠퍼스 라이프 즐기기도 바쁜데, 나 같은 우중충한 녀석과 굳이 어울리려는 학우는 찾기 어렵더라. 그렇게 대학에서마저도 외톨이 신세인가 싶었는데,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아.”
라는 내 얘기를 옆에서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두고 엉뚱한 데서 친구를 찾고 있었더라.
나와 친구들은 서로의 정신적인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오래 앓다 보니 자기 비스무리한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에 눈을 뜬 게 아니다. ‘피곤한 사람 따라서 나까지 피곤해지는 건 피한다’라는, 보편적이고 편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뿐.
나에게도 친구들이 있었다
우린 서로에게 썩 나쁘지 않은 친구였다. 혼자 내버려 뒀다간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은 친구가 있으면 가난한 주머니를 탈탈 털어 술이든 밥이든 커피든 샀다. 돈이 없으면 밤늦게까지 같이 걸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친구들과 한동안은 꽤 가깝게 지냈다. 친구가 위태로운 상태지만 도우러 갈 수 없으면 경찰에 연락했고, 갑자기 친구의 연락이 끊기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보려 나섰다.
무슨 대단한 일을 서로 해준 건 아니었다. 신경 쓰이는 만큼 신경 쓴 게 전부였다. 달리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거라도 열심히 했던 것도 같다.
세월이 더 흐르면서 관계의 거리감과 양상은 변했다. 요즘도 심심할 때마다 메시지를 주고받는 녀석도 있고, 연락이 영 뜸해진 녀석도 있다. 그래도 친구들과의 기억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내 마음을 지탱해주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애쓴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타인으로부터 그런 애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인정하든 않든, 경험적인 사실이 그렇다.
인터넷에 비명을 지른 이유
학교폭력이라는 트라우마의 후유증은 나를 안에서부터 병들게 한 가장 큰 원인이지만,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나는 성소수자라서, 여자라서, 사람으로서 겪지 말아야 했던 일들을 겪었다.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사연은 많고 하나하나 기구하다. 여전히 나는 고통 속에서 산다. 나를 괴롭힌 사람 중 누구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맥락 없는 우울감. 제멋대로 떠오르는 부정적 사고.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공황.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내면의 괴물들은 그 기구한 사연들을 양분삼아 자랐다.
어떤 친구도 나를 365일 24시간 내내 신경 쓸 수는 없었고, 필연적으로 혼자일 때 나의 일상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경청이 없다. 지지가 없다. 정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따위 세상에서 사는 것이 벌이 아니면 뭐지?’
생각과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울, 불안, 공황을 게워내어 빨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뿐이었다. 가명으로 SNS 계정을 만들고 타임라인에 열심히 감정을 쏟은 것은 ‘그래도 일단은 살고 보자’라는, 나름 바람직하고 끈질긴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SNS 친구를 구하는 소개 글에는 내 계정의 특징을 해시태그(#)와 함께 적었다. 십수 번 올렸던 소개 글에 개근하다시피 했던 해시태그를 기억한다.
#트랜스젠더 #MTF #LGBT #정병러 #우울증 #불안
이 중 ‘정병러’는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정병’은 ‘정신병, 정신질환’을 줄인 것이다. 여기에 ‘무언가를 하는 사람, 무언가에 관련된 사람’을 ‘~러(~er)’로 이르는 표현을 붙이면 ‘정병러’가 된다. ‘정신병,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 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본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신조어 ‘멘헤라’도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하는, ‘정병러’ 비슷한 말이다. SNS를 떠난 내가 멘헤라를 알게 된 것은 여성신문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기사는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멘헤라 여자가 자신에게 빠져들고 의존하도록 그루밍하고 성착취를 하는 남자들의 행태를 폭로하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성착취의 ‘노하우’와 멘헤라 여자의 취약점, 멘헤라 여자를 향한 노골적인 성적 기대를 누구든 접속해서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어떻게든 여자 자빠트릴 기회 살살 엿보는 게 일상 과제인, 한심해 빠진 남자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사람이 발정기가 없는 동물이라는 걸 심히 의심케 하는 치들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저들도 사람으로서 수치스러운 줄은 알고 겁먹은 채 음지에 숨어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공공연하게 설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은 무엇을 모의하고 욕망하는 걸까
나는 정신건강이나 인터넷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다. 페미니즘의 권위자도 아니고. 그저 한때 SNS 좀 열심히 했고 오래도록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인 환자, 다시 말하면 어떤 남자들에게 노려질 수도 있었던 멘헤라 여자다.
누구도 내 옆에 있을 수 없을 때. 나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 혼자 있음을 견뎌야만 할 때. 그럴 때 나는 스마트폰을 쥐고 SNS에 텍스트를 필사적으로 찍었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다. 누군가 내 편에 서 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다른 누군가도 알고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견뎌야 했다.
물론 멘헤라 사냥하는 남자들에게는 이런 절박함조차 다 사냥감의 취약점에 불과하겠지. 경청하는 척. 지지하는 척. 소중하게 여기는 척. 예뻐하는 척. 멘헤라 여자를 그루밍해서 이루려는 목표는 결국, 섹스. 그놈의 섹스다.
어쩌면 나는 그나마 운이 좋아서 사냥감이 되는 불운이라도 면한 것은 아니었을까. 나에게 그루밍 성착취, 성범죄가 벌어졌다고 상상만 해도 이마에 피가 쏠린다.
내가 그런 일을 겪는다면, 아마 처음엔 ‘당했다’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혼란에서 확신으로 생각이 기울 때쯤엔 이미 치명상을 입은 마음이 피를 사방에 뿌리고 있을 것이다.
남자는 ‘나와 섹스를 한’ 것이 아니다. 나를 ‘거짓으로 길들이고 속여서 간음한’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성범죄 내지는 성착취라 한다. 그리고 이 정도 상식이 멘헤라 사냥하는 남자들에게 없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령 무지했다 한들 면죄 받을 수도 없고.
나는 그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모의하고 저지르는 것이 성범죄, 성착취이며 상대의 마음을 농락하고 파괴하는 폭력이라는 걸 알고도 개의치 않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욕망하는 것인지.
그리고 앞선 질문의 대답이 어느 쪽이든 끔찍한데, 도대체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당신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건지. 나는 묻고 싶다.
*“‘우울증 갤러리’뿐만이 아니다… 성착취 위해 ‘멘헤라’ 사냥하는 남성들”, 2023.05.03. 여성신문, 박상혁 기자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오랫동안 당한 학교폭력은 트라우마가 되었고, 내게 깊은 후유증을 남겼다. 내 몸이 OO대학교 OOO학과에 다니는 동안에도 마음은 XX고등학교 X반 교실에 갇혀 있었다.
누구라도 들어주기를 바라면서 내 힘든 얘기를 자주 했다. 고생 끝에 대학 와서 캠퍼스 라이프 즐기기도 바쁜데, 나 같은 우중충한 녀석과 굳이 어울리려는 학우는 찾기 어렵더라. 그렇게 대학에서마저도 외톨이 신세인가 싶었는데,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아.”
라는 내 얘기를 옆에서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두고 엉뚱한 데서 친구를 찾고 있었더라.
나와 친구들은 서로의 정신적인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오래 앓다 보니 자기 비스무리한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에 눈을 뜬 게 아니다. ‘피곤한 사람 따라서 나까지 피곤해지는 건 피한다’라는, 보편적이고 편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뿐.
나에게도 친구들이 있었다
우린 서로에게 썩 나쁘지 않은 친구였다. 혼자 내버려 뒀다간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은 친구가 있으면 가난한 주머니를 탈탈 털어 술이든 밥이든 커피든 샀다. 돈이 없으면 밤늦게까지 같이 걸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친구들과 한동안은 꽤 가깝게 지냈다. 친구가 위태로운 상태지만 도우러 갈 수 없으면 경찰에 연락했고, 갑자기 친구의 연락이 끊기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보려 나섰다.
무슨 대단한 일을 서로 해준 건 아니었다. 신경 쓰이는 만큼 신경 쓴 게 전부였다. 달리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거라도 열심히 했던 것도 같다.
세월이 더 흐르면서 관계의 거리감과 양상은 변했다. 요즘도 심심할 때마다 메시지를 주고받는 녀석도 있고, 연락이 영 뜸해진 녀석도 있다. 그래도 친구들과의 기억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내 마음을 지탱해주고 있다.
내가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애쓴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타인으로부터 그런 애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인정하든 않든, 경험적인 사실이 그렇다.
인터넷에 비명을 지른 이유
학교폭력이라는 트라우마의 후유증은 나를 안에서부터 병들게 한 가장 큰 원인이지만,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나는 성소수자라서, 여자라서, 사람으로서 겪지 말아야 했던 일들을 겪었다.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사연은 많고 하나하나 기구하다. 여전히 나는 고통 속에서 산다. 나를 괴롭힌 사람 중 누구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맥락 없는 우울감. 제멋대로 떠오르는 부정적 사고.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공황.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르는 내면의 괴물들은 그 기구한 사연들을 양분삼아 자랐다.
어떤 친구도 나를 365일 24시간 내내 신경 쓸 수는 없었고, 필연적으로 혼자일 때 나의 일상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경청이 없다. 지지가 없다. 정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따위 세상에서 사는 것이 벌이 아니면 뭐지?’
생각과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울, 불안, 공황을 게워내어 빨리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뿐이었다. 가명으로 SNS 계정을 만들고 타임라인에 열심히 감정을 쏟은 것은 ‘그래도 일단은 살고 보자’라는, 나름 바람직하고 끈질긴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SNS 친구를 구하는 소개 글에는 내 계정의 특징을 해시태그(#)와 함께 적었다. 십수 번 올렸던 소개 글에 개근하다시피 했던 해시태그를 기억한다.
#트랜스젠더 #MTF #LGBT #정병러 #우울증 #불안
이 중 ‘정병러’는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정병’은 ‘정신병, 정신질환’을 줄인 것이다. 여기에 ‘무언가를 하는 사람, 무언가에 관련된 사람’을 ‘~러(~er)’로 이르는 표현을 붙이면 ‘정병러’가 된다. ‘정신병,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 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본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신조어 ‘멘헤라’도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하는, ‘정병러’ 비슷한 말이다. SNS를 떠난 내가 멘헤라를 알게 된 것은 여성신문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기사는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멘헤라 여자가 자신에게 빠져들고 의존하도록 그루밍하고 성착취를 하는 남자들의 행태를 폭로하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성착취의 ‘노하우’와 멘헤라 여자의 취약점, 멘헤라 여자를 향한 노골적인 성적 기대를 누구든 접속해서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어떻게든 여자 자빠트릴 기회 살살 엿보는 게 일상 과제인, 한심해 빠진 남자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사람이 발정기가 없는 동물이라는 걸 심히 의심케 하는 치들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저들도 사람으로서 수치스러운 줄은 알고 겁먹은 채 음지에 숨어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공공연하게 설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은 무엇을 모의하고 욕망하는 걸까
나는 정신건강이나 인터넷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다. 페미니즘의 권위자도 아니고. 그저 한때 SNS 좀 열심히 했고 오래도록 정신과 치료를 받는 중인 환자, 다시 말하면 어떤 남자들에게 노려질 수도 있었던 멘헤라 여자다.
누구도 내 옆에 있을 수 없을 때. 나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 혼자 있음을 견뎌야만 할 때. 그럴 때 나는 스마트폰을 쥐고 SNS에 텍스트를 필사적으로 찍었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다. 누군가 내 편에 서 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다른 누군가도 알고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견뎌야 했다.
물론 멘헤라 사냥하는 남자들에게는 이런 절박함조차 다 사냥감의 취약점에 불과하겠지. 경청하는 척. 지지하는 척. 소중하게 여기는 척. 예뻐하는 척. 멘헤라 여자를 그루밍해서 이루려는 목표는 결국, 섹스. 그놈의 섹스다.
어쩌면 나는 그나마 운이 좋아서 사냥감이 되는 불운이라도 면한 것은 아니었을까. 나에게 그루밍 성착취, 성범죄가 벌어졌다고 상상만 해도 이마에 피가 쏠린다.
내가 그런 일을 겪는다면, 아마 처음엔 ‘당했다’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다. 혼란에서 확신으로 생각이 기울 때쯤엔 이미 치명상을 입은 마음이 피를 사방에 뿌리고 있을 것이다.
남자는 ‘나와 섹스를 한’ 것이 아니다. 나를 ‘거짓으로 길들이고 속여서 간음한’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성범죄 내지는 성착취라 한다. 그리고 이 정도 상식이 멘헤라 사냥하는 남자들에게 없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령 무지했다 한들 면죄 받을 수도 없고.
나는 그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모의하고 저지르는 것이 성범죄, 성착취이며 상대의 마음을 농락하고 파괴하는 폭력이라는 걸 알고도 개의치 않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욕망하는 것인지.
그리고 앞선 질문의 대답이 어느 쪽이든 끔찍한데, 도대체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당신들과 같은 하늘 아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건지. 나는 묻고 싶다.
*“‘우울증 갤러리’뿐만이 아니다… 성착취 위해 ‘멘헤라’ 사냥하는 남성들”, 2023.05.03. 여성신문, 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