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회차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 미래에서 얻은 기억과 능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시간만 되돌린 듯한 사람. 그런 사람을 요즘은 ‘2회차 인생’이라고 하더라. 이 ‘회차’는 게임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개념인데, 쉽게 말하면 게임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이클’을 뜻한다.
캐릭터 생성 이후, 모험 시작부터 최종 스테이지 클리어까지. 이것이 한 회차다. 첫 회차는 보통 ‘초회차’라 한다. 회차가 도입된 게임의 초회차를 클리어한 플레이어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정복한 세계를 떠나거나, 다시 처음부터 이 세계를 모험하거나. 두 번째 모험을 선택할 경우 2회차가 시작된다.
회차의 반복 그리고 선택
전 회차보다 더 강해진 적과 다시 싸울 수 있는 것은 회차 반복의 매력 중 일부에 불과하다. 회차 반복의 진짜 매력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분기점에서 전 회차와 다른 선택을 하거나, 미래를 결정하는 분기점인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순간에 전 회차와 다른 행동을 해서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장면 장면마다 세이브 데이터를 남겨서 재접속을 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 방법은 지나치게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숨겨진 분기점을 놓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구나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시간을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리고 싶다고. 과거로 시간을 되돌린 것이 유의미하려면 예전 과거 시점과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과거로 회귀하기 전,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넓게 보면 이것 또한 시작점이 맨 처음이 아닐 뿐, 회차 반복의 하나로 볼 수 있겠다.
회차가 있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선택할 수 있다. 전과 똑같은 선택. 또는 아주 다른 선택. 그럴 기회가 있다. 선택에 따르는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선택하는 것도 고회차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 삶도 한 회차일 뿐이라면
가끔 나는 망상에 빠지곤 한다. 내 삶은 어쩌면 게임이 아닐까? 플레이어가 깨닫지도 못할 만큼 정밀하게 설계된 매트릭스형 게임. 하루씩 살아내는 힘겨운 삶을 완주했을 때. 진짜 현실의 기억이 돌아오고, 나는 서서히 눈을 뜬다. 게임 마스터의 음성이 들려오겠지.
“OOO고객님, 설정하신 199X년생 태연 인물로 살아보셨습니다. 초회차 도전자, 비숙련자에게 추천 드리지 않는 캐릭터라고 사전에 안내를…”
짧게 말하자면, ‘네가 경험한 모든 것은 사전에 동의를 구하여 구현된 것이므로 후유증이 있더라도 게임사 측에는 책임이 없음’이라는 소리를 장황하게 하는 게임 마스터의 음성을 들으면서. 나는 길었던 삶 중 어떤 장면들을 떠올릴까.
‘여자,’ ‘계집애,’ 라는 말을 나를 놀리는 데에 쓰는 짓궂은 사내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눈물을 꾹 참던 열세 살의 봄.
“그래, 나 여자야. 계집애 맞아. 이 몸으로 원해서 태어난 거 아니야. 나 남학교 오기 싫었어. 기분은 너희 말고 내가 더럽다고. 내가 나인 걸 욕으로 쓰는 너희는 쓰레기들이야. 엿이나 처먹어.”
라고 쏘아붙였다면. 그 회차의 남은 삶은 하루라도 덜 두려웠을까? 후회가 적었을까?
성별적합수술을 받고 한국으로 귀국하던 날. 공항으로 나를 마중하러 나오겠다던 오빠를 ‘늘 나를 때리고 괴롭혔잖아’라며 거부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 회차의 남은 삶 동안 나는 빨간 날에 가족과 함께였을까? 그 삶에서는 나에게도 귀여운 조카들이 있었을까?
병무청에 마지막으로 불려간 날. ‘아가씨가 여긴 왜 와요?’라는 어느 아저씨의 말로 시작된, 끊이지 않았던 불편한 관심. 신체검사를 받으러 온 남자들의, 나를 바라보던 그 싸늘하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시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글쎄. 적어도,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건 좀 부담스럽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랑했고, 끝까지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으로부터 상처 입은 그날 밤. 내가 ‘남자 몸일 때’ 누구랑 어떻게 어울렸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나를 추궁하던 애인 앞에서 무력하게 입술을 깨물던 그때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
“네가 내 애인이면 내 얘기 함부로 하고 다니는 그놈들한테 화를 내야지! 그 얘길 듣고 나한테 과거 행실 운운하는 게 말이나 되는 짓이야?”
어차피 헤어지게 될 사이인데. 그렇게 소리 빽 지르는 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 회차의 남은 삶 동안 가슴이 덜 시렸을까?
“인생 2회차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 미래에서 얻은 기억과 능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시간만 되돌린 듯한 사람. 그런 사람을 요즘은 ‘2회차 인생’이라고 하더라. 이 ‘회차’는 게임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개념인데, 쉽게 말하면 게임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이클’을 뜻한다.
캐릭터 생성 이후, 모험 시작부터 최종 스테이지 클리어까지. 이것이 한 회차다. 첫 회차는 보통 ‘초회차’라 한다. 회차가 도입된 게임의 초회차를 클리어한 플레이어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정복한 세계를 떠나거나, 다시 처음부터 이 세계를 모험하거나. 두 번째 모험을 선택할 경우 2회차가 시작된다.
회차의 반복 그리고 선택
전 회차보다 더 강해진 적과 다시 싸울 수 있는 것은 회차 반복의 매력 중 일부에 불과하다. 회차 반복의 진짜 매력은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분기점에서 전 회차와 다른 선택을 하거나, 미래를 결정하는 분기점인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순간에 전 회차와 다른 행동을 해서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장면 장면마다 세이브 데이터를 남겨서 재접속을 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 방법은 지나치게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숨겨진 분기점을 놓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누구나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시간을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리고 싶다고. 과거로 시간을 되돌린 것이 유의미하려면 예전 과거 시점과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과거로 회귀하기 전,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넓게 보면 이것 또한 시작점이 맨 처음이 아닐 뿐, 회차 반복의 하나로 볼 수 있겠다.
회차가 있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선택할 수 있다. 전과 똑같은 선택. 또는 아주 다른 선택. 그럴 기회가 있다. 선택에 따르는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선택하는 것도 고회차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 삶도 한 회차일 뿐이라면
가끔 나는 망상에 빠지곤 한다. 내 삶은 어쩌면 게임이 아닐까? 플레이어가 깨닫지도 못할 만큼 정밀하게 설계된 매트릭스형 게임. 하루씩 살아내는 힘겨운 삶을 완주했을 때. 진짜 현실의 기억이 돌아오고, 나는 서서히 눈을 뜬다. 게임 마스터의 음성이 들려오겠지.
“OOO고객님, 설정하신 199X년생 태연 인물로 살아보셨습니다. 초회차 도전자, 비숙련자에게 추천 드리지 않는 캐릭터라고 사전에 안내를…”
짧게 말하자면, ‘네가 경험한 모든 것은 사전에 동의를 구하여 구현된 것이므로 후유증이 있더라도 게임사 측에는 책임이 없음’이라는 소리를 장황하게 하는 게임 마스터의 음성을 들으면서. 나는 길었던 삶 중 어떤 장면들을 떠올릴까.
‘여자,’ ‘계집애,’ 라는 말을 나를 놀리는 데에 쓰는 짓궂은 사내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눈물을 꾹 참던 열세 살의 봄.
“그래, 나 여자야. 계집애 맞아. 이 몸으로 원해서 태어난 거 아니야. 나 남학교 오기 싫었어. 기분은 너희 말고 내가 더럽다고. 내가 나인 걸 욕으로 쓰는 너희는 쓰레기들이야. 엿이나 처먹어.”
라고 쏘아붙였다면. 그 회차의 남은 삶은 하루라도 덜 두려웠을까? 후회가 적었을까?
성별적합수술을 받고 한국으로 귀국하던 날. 공항으로 나를 마중하러 나오겠다던 오빠를 ‘늘 나를 때리고 괴롭혔잖아’라며 거부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 회차의 남은 삶 동안 나는 빨간 날에 가족과 함께였을까? 그 삶에서는 나에게도 귀여운 조카들이 있었을까?
병무청에 마지막으로 불려간 날. ‘아가씨가 여긴 왜 와요?’라는 어느 아저씨의 말로 시작된, 끊이지 않았던 불편한 관심. 신체검사를 받으러 온 남자들의, 나를 바라보던 그 싸늘하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시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글쎄. 적어도,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건 좀 부담스럽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사랑했고, 끝까지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으로부터 상처 입은 그날 밤. 내가 ‘남자 몸일 때’ 누구랑 어떻게 어울렸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나를 추궁하던 애인 앞에서 무력하게 입술을 깨물던 그때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
“네가 내 애인이면 내 얘기 함부로 하고 다니는 그놈들한테 화를 내야지! 그 얘길 듣고 나한테 과거 행실 운운하는 게 말이나 되는 짓이야?”
어차피 헤어지게 될 사이인데. 그렇게 소리 빽 지르는 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 회차의 남은 삶 동안 가슴이 덜 시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