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눈뜨자마자 담배를 물고 컴퓨터 앞에 앉아 떡진 머리칼을 벅벅 긁는다. 불 꺼진 방 곳곳에는 언제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나는 플라스틱 커피잔이 버섯처럼 무리 지어 자라는 중.
‘치울까?’
잠깐 고민하다가, 색이 꽉 채워진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게임 로그인을 하려는데, 망할. 서버 점검 중이다.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방을 치운다. 한 30분 정도 움직였을까. 원고 생각이 나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는 게임에 진심인 여자, 태연. 프롬소프트웨어* 게임보다 더하지 싶은 현실의 난이도에 지칠 때면, 게임 속 언어를 일상에 가져오곤 한다. 버프*, 디버프*, 메즈*, 같은 것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작은 구멍을 내면, 희망 한 줄 없는 현실이 재미라도 있어진다. 그렇게라도 하루씩 버티다 보면 모기 눈알 만한 희망이 생겨 있더라.
현실에서 가장 자주 벌어지는 일은 ‘침묵’이라는 디버프에 걸리는 것이다. 침묵은 타깃의 언어능력과 특기를 봉인하는 디버프 주문이다.
침묵에 걸린 캐릭터는 효과가 유지되는 동안 말을 할 수도, 스킬*을 사용할 수도 없다. 만약 공격대 전원이 침묵에 걸렸다면? '대환장파티' 열리는 거다. 마법을 못 쓰는 마법사, 활을 못 쏘는 궁수, 검술에 젬병인 검사로 구성된 공격대에게 벌어질 일을 생각해 보라. 이러다 다 죽어...
스킬에는 캐릭터의 설계와 고유한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성장시키면서 원하는 스킬을 채용하고 연마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같은 캐릭터는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캐릭터들이 모여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뭐다? 소통이다. 침묵 디버프는 일시적으로나마 타깃이 자기 정체성을 잊고 의사소통 능력을 잃게 만드는 주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인게임에서 침묵 디버프는 당연히 기피 대상이다. 침묵 상태에 걸리면 디버프를 해제해줄 치유사를 찾거나, 디버프 유지 시간이 끝날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쉰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망한 게임의 한국 서버에서 침묵은 기피 대상이 아니다. 효과는 디버프인 게 맞는데, 너무나 일상적이라서 디버프라고 말하기가 새삼스러울 지경이랄까? 심지어 침묵을 디버프가 아닌 버프이자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성으로 여기는 경향마저 짙다.
이 서버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불필요한 사치 내지는 일탈이다.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라고 정해진 루트를 따라서 육성해야만 '제대로 된 캐릭터'가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한국 서버의 플레이어 캐릭터 중 상당수가 스스로 훌륭한 NPC*로 거듭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아주 잘 설계되어, 변수를 만들지 않고 제 역할 걱실걱실 해내는 그런 캐릭터.
그래 뭐, 그런 삶이 좋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 NPC에 한없이 가까운 삶을 다른 캐릭터에게 강요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게 문제다. 자신과 다를 뿐, 멀쩡하게 플레이 중인 남의 캐릭터를 대하는 그들의 방식은 이러하다. 상대를 버그 캐릭터라고 매도하기, 어느 공격대에도 들어갈 수 없게 거짓 소문을 흘려서 괴롭히기, 아예 일방적으로 공격하기, 등등. 이러한 만행에 수도 없이 당하는 캐릭터 중엔 나도 있다.
몇 번째인지 모를 깊은 침묵에 빠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날. 나는 한국다양성연구소의 웹진 <까끌까끌>에서 [말풍선]이라는 이름의 코너에 글을 연재할 기회를 얻었다. 기쁘게 받아들였다. 서버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캐릭터 중 하나. 대부분의 공격대에서 믿고 거르는, '소문에 의하면' 썩은 사과 그 자체인 캐릭터. 그야말로 이름난 '망캐(망한 캐릭터)'인 나, 태연. 할 말이 아주 많거든.
[말풍선]은 자꾸만 쏟아지는 침묵을 향한 나의 사소한, 그러나 솔직한 저항이다. 나는 말을 할 것이다. 글을 쓸 것이다. 다 못 꺼낸 얘기들은 기억해두었다가 말풍선에 담아 띄워 올릴 것이다. 침묵, 어디 한번 계속 쏟아져 보든가.
* 프롬소프트웨어(FROM SOFTWARE) 난이도가 사악한 수준으로 높은 동시에 게임으로서 퀄리티와 디자인 수준 또한 대단히 높은 명작을 여럿 출시한 게임 개발사. 대표작으로 다크소울 시리즈, 블러드본 시리즈, 엘든링 등이 있다.
* 버프(BUFF) 자신이나 타깃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 디버프(DEBUFF) 타깃의 능력을 저하시키거나 타깃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
* 메즈(MEZ) 타깃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타깃을 무력화하는 것. 수면, 환각, 강제 변신, 함정, 저주 등 종류가 다양하다.
* 게임에서의 스킬(SKILL)은 기술보다는 능력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스킬은 별다른 언급이 없으면 일반적으로 액티브(ACTIVE) 스킬을 말하며, 액티브 스킬은 플레이어가 직접적으로 개입(클릭, 입력, 등)하여 발동시켜야 한다. 반면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이 상시 발동중이거나 특정 조건이 만족되는 상태에서 자동으로 발동되는 스킬은 패시브(PASSIVE) 스킬이라 한다.
* NPC는 Non-Player Character, 즉 누군가가 플레이하지 않는 캐릭터를 말한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말, 행동, 능력, 경우에 따라 동선, 패턴, 등장 주기나 확률까지 모든 것이 사전에 설계된 캐릭터이다.
오늘도 눈뜨자마자 담배를 물고 컴퓨터 앞에 앉아 떡진 머리칼을 벅벅 긁는다. 불 꺼진 방 곳곳에는 언제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나는 플라스틱 커피잔이 버섯처럼 무리 지어 자라는 중.
‘치울까?’
잠깐 고민하다가, 색이 꽉 채워진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게임 로그인을 하려는데, 망할. 서버 점검 중이다.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방을 치운다. 한 30분 정도 움직였을까. 원고 생각이 나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는 게임에 진심인 여자, 태연. 프롬소프트웨어* 게임보다 더하지 싶은 현실의 난이도에 지칠 때면, 게임 속 언어를 일상에 가져오곤 한다. 버프*, 디버프*, 메즈*, 같은 것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작은 구멍을 내면, 희망 한 줄 없는 현실이 재미라도 있어진다. 그렇게라도 하루씩 버티다 보면 모기 눈알 만한 희망이 생겨 있더라.
현실에서 가장 자주 벌어지는 일은 ‘침묵’이라는 디버프에 걸리는 것이다. 침묵은 타깃의 언어능력과 특기를 봉인하는 디버프 주문이다.
침묵에 걸린 캐릭터는 효과가 유지되는 동안 말을 할 수도, 스킬*을 사용할 수도 없다. 만약 공격대 전원이 침묵에 걸렸다면? '대환장파티' 열리는 거다. 마법을 못 쓰는 마법사, 활을 못 쏘는 궁수, 검술에 젬병인 검사로 구성된 공격대에게 벌어질 일을 생각해 보라. 이러다 다 죽어...
스킬에는 캐릭터의 설계와 고유한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성장시키면서 원하는 스킬을 채용하고 연마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같은 캐릭터는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캐릭터들이 모여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려 할 때, 필요한 것은 뭐다? 소통이다. 침묵 디버프는 일시적으로나마 타깃이 자기 정체성을 잊고 의사소통 능력을 잃게 만드는 주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인게임에서 침묵 디버프는 당연히 기피 대상이다. 침묵 상태에 걸리면 디버프를 해제해줄 치유사를 찾거나, 디버프 유지 시간이 끝날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쉰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망한 게임의 한국 서버에서 침묵은 기피 대상이 아니다. 효과는 디버프인 게 맞는데, 너무나 일상적이라서 디버프라고 말하기가 새삼스러울 지경이랄까? 심지어 침묵을 디버프가 아닌 버프이자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성으로 여기는 경향마저 짙다.
이 서버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불필요한 사치 내지는 일탈이다.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이라고 정해진 루트를 따라서 육성해야만 '제대로 된 캐릭터'가 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한국 서버의 플레이어 캐릭터 중 상당수가 스스로 훌륭한 NPC*로 거듭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아주 잘 설계되어, 변수를 만들지 않고 제 역할 걱실걱실 해내는 그런 캐릭터.
그래 뭐, 그런 삶이 좋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 NPC에 한없이 가까운 삶을 다른 캐릭터에게 강요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게 문제다. 자신과 다를 뿐, 멀쩡하게 플레이 중인 남의 캐릭터를 대하는 그들의 방식은 이러하다. 상대를 버그 캐릭터라고 매도하기, 어느 공격대에도 들어갈 수 없게 거짓 소문을 흘려서 괴롭히기, 아예 일방적으로 공격하기, 등등. 이러한 만행에 수도 없이 당하는 캐릭터 중엔 나도 있다.
몇 번째인지 모를 깊은 침묵에 빠졌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날. 나는 한국다양성연구소의 웹진 <까끌까끌>에서 [말풍선]이라는 이름의 코너에 글을 연재할 기회를 얻었다. 기쁘게 받아들였다. 서버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캐릭터 중 하나. 대부분의 공격대에서 믿고 거르는, '소문에 의하면' 썩은 사과 그 자체인 캐릭터. 그야말로 이름난 '망캐(망한 캐릭터)'인 나, 태연. 할 말이 아주 많거든.
[말풍선]은 자꾸만 쏟아지는 침묵을 향한 나의 사소한, 그러나 솔직한 저항이다. 나는 말을 할 것이다. 글을 쓸 것이다. 다 못 꺼낸 얘기들은 기억해두었다가 말풍선에 담아 띄워 올릴 것이다. 침묵, 어디 한번 계속 쏟아져 보든가.
* 프롬소프트웨어(FROM SOFTWARE) 난이도가 사악한 수준으로 높은 동시에 게임으로서 퀄리티와 디자인 수준 또한 대단히 높은 명작을 여럿 출시한 게임 개발사. 대표작으로 다크소울 시리즈, 블러드본 시리즈, 엘든링 등이 있다.
* 버프(BUFF) 자신이나 타깃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 디버프(DEBUFF) 타깃의 능력을 저하시키거나 타깃이 어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
* 메즈(MEZ) 타깃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타깃을 무력화하는 것. 수면, 환각, 강제 변신, 함정, 저주 등 종류가 다양하다.
* 게임에서의 스킬(SKILL)은 기술보다는 능력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스킬은 별다른 언급이 없으면 일반적으로 액티브(ACTIVE) 스킬을 말하며, 액티브 스킬은 플레이어가 직접적으로 개입(클릭, 입력, 등)하여 발동시켜야 한다. 반면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이 상시 발동중이거나 특정 조건이 만족되는 상태에서 자동으로 발동되는 스킬은 패시브(PASSIVE) 스킬이라 한다.
* NPC는 Non-Player Character, 즉 누군가가 플레이하지 않는 캐릭터를 말한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말, 행동, 능력, 경우에 따라 동선, 패턴, 등장 주기나 확률까지 모든 것이 사전에 설계된 캐릭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