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엄한 경고에 등돌린 윤석열
IPCC 6차보고서는 단호했다. 인간이 지구의 온도를 끌어올린 것이 명백하며, 2020년생부터는 기후변화에 가장 큰 부정적인 영향을 경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 최고결정권자는 탄소예산이 10년이 채 남지 않았다는 심각한 보고를 듣고도, 여전히 ‘과학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에 몰두하며 인류를 두고 도박을 하려하고 있다. 탄소중립 기본계획에서 산업의 탄소감축 목표를 줄였고 원자력발전을 계속하겠다고 했으며 이산화탄소 포집‘저장’활용 기술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나와 함께 사는 여섯 살 어린이가 기후위기의 문제를 인식하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2018년생인 같이 사는 어린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고, 이미 많은 지식과 실천방법을 안다. 어린이집에서 환경교육이 잘 이뤄지고 있고 EBS와 같은 공영방송에서도 <그린조끼 구조대>와 같은 어린이를 위한 환경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한 덕분이다. 아이는 ‘비닐과 플라스틱 쓰지 말자, 자동차 타지 말자, 고기 많이 먹으면 안된다’는 등 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여섯 살 어린이가 살아가야할 지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제도와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국가정책 최고결정권자들이다. 동시에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한 초국적 협력이 필요한 인류생존의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1년 7월 6일 대전 유성구 한 호프집에서 ‘문재인정권 탈원전 4년의 역설-멀어진 탄소중립과 에너지 자립’을 주제로 열린 만민토론회에 참석해 ‘탄소중심’이라고 써있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 2021.07.06. ⓒ뉴시스
국익이라는 거짓말
그러나 눈앞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본가의 욕망을 국익으로 위장하며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생존할 권리를 철저하게 외면한다. 투자를 받기위해 어쩔 수 없이 ESG를 하는 척이라도 하는 기업들에게, 오히려 국가가 괜찮다며 인류의 생존문제를 뒤로하고 기후재앙을 앞당기는 결정을 했다. 10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급박한 경고에 이성적으로 대응하려면 인류는 삶의 방식을 바꿔야만 한다. 그러나 ‘어차피 맞을 매, 미리 맞는게 낫다’며 대단한 결단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의 강제동원이라는 범죄에 면죄부를 갖다 바치고 온 윤석열은, 기후재앙이라는 절박한 경고 앞에선 강력한 대응의지를 보여줄 생각이 없다.
윤석열의 기준은 아주 단순하다.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일은 교역을 재개하는 것을 통해 기업의 돈벌이에 도움이 되고, 기후위기 대응은 탄소감축을 통해 기업의 부담을 늘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윤석열이 말하는 국익이란 눈앞의 자본가를 위한 이윤창출의 기회를 주는 일이다. 국가의 역할을 스스로 저버린 채 국민의 생존이나 존엄한 삶은 처음부터 논외로 한다. 윤석열의 아주 단순한 사고방식은 신자유주의적인 욕망의 시스템에 철저히 부합한다. 아주 소수의 기득권자들만을 배불리는 시스템은 그들을 위해 착취당하고 배제되는 이들을 점점 더 많아지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이러한 착취와 배제가 만들어 내는 돈을 ‘국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재앙, 인류의 카운트다운
인간이 만든 기후재앙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으며, 그 시한이 10년이 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설익은 음모론이나 거짓 선지자의 예언이 아니며, 심지어 일부 급진적인 과학자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는 보수적인 과학자들이 국가간 기후변화협의체를 만든 지 30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검증한 사실이다. 30년이라는 세월은 이미 새로운 발견보다는 검증의 시간이었던 만큼, 인간이 만든 기후재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류가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극도의 인지부조화와 현실을 부정하는 집단최면 가운데 인류는 이 사실들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불편한 마음을 무책임하게 다스리기 위해 막연히 ‘과학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며 과학에 종교적 믿음을 부여했다. 하지만 비용의 최소화, 이윤의 극대화, 최고의 효율만이 요구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많은 비용과 비효율이 동반되는 작업인 기후위기 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서야 가장 보수적인 과학자들로부터 가장 극단적인 경고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책임 있게 행동해야할 국가 최고결정권자들은 여전히 자살골만 넣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제 그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 중엔 누구도 하지 않는다.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 ⓒpixabay
포기할 수 없는 욕망, 행복해졌나? 행복해질까?
현대 인류가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이 극대화한 사회는,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하는 ‘욕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욕망의 시스템을 끊임없이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신자유주의 구조의 문제다. 개인이 욕망하는 것이라 믿게 만들고 있지만, 이는 자본가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동원된 만들어진 욕망이다. 욕망을 손쉽게 채우기 위해 욕망의 재화는 저렴해야 하고,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한 노동력 착취, 비인간동물 착취로 이어지며, 일상에서 행복감을 찾기 어려운 노동자는 소비를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이 구조는 서로를 착취함으로써, 그중 에서도 저렴한 노동력으로 동원하는 것이 쉽게 정당화되는 약자(저학벌/저학력 노동자,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여성 등)를 착취함으로써 완성된다. 욕망의 시스템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유리한 구조이지만, 서로를 착취하는 가운데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욕망의 충족을 통해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굴레로 만들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심지어 인류의 생존에 현실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류를 위협하는 욕망의 시스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기 자신을 남들보다 우월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을 갖도록 요구한다. 외모, 학위, 학벌, 고액 연봉, 대기업 명찰, 강남 아파트, 브랜드 아파트, 슈퍼카, 골프장 회원권, 백화점 VVIP 등급, 명품 시계, 명품 가방, 최근에는 ‘오미카세’로 대표되는 비싼 식사 등 나를 남들과 구분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욕망하게 만든다. 그것은 가졌을 때 자랑이 된다.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원하게 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격차를 보여줌으로써 나와 너는 다른 존재라며 구분짓기를 한다. 무시, 조롱, 차별, 폭력을 경험하는 사람들 역시 이를 구조적인 문제로 분석하고 저항할 수 있는 관점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이를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할 개인의 문제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윤석열이 포기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그 근간이 되는 욕망의 시스템은 안타깝게도 인류의 생존문제에까지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인류의 재앙은 욕망의 시스템 내에서 구분짓기를 통해 배제와 억압이 지속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인간과 비인간으로 나누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비인간동물을 착취했다. 그렇게 생명다양성은 크게 줄어들었다. 인간 가운데서도 정상인간과 비정상인간을 나눠 착취해도 되는 ‘루저’를 만들고 배제해도 되는 ‘약자’를 만들었다. 그렇게 수많은 인간들을 과로사나 자살이라는 방식의 죽음으로 내몰았다. 비인간동물의 비극적인 삶은 비정상인간으로 규정된 사람들의 삶과 닮았다. 그 작동방식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끊임없는 착취의 굴레 속에서 소수의 사람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국익’으로 위장된 것들이다.
지난해 9월 24일 서울 중구 숭례문 일대에서 열린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924 기후정의행진 대회에서 참석한 어린이가 기후위기 경고 피켓을 들고 있다. 2022.0924 ⓒ민중의소리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다양성 관점
다양성(Diversity)을 그저 ‘여러 가지(Variety)’가 아니게 만드는 것은 권력(Power)에 대한 관점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관점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사회적 정체성(인종, 민족,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장애, 질병, 나이, 지역, 종교, 가족의 형태, 고용의 형태, 소득, 경제력, 학력/학벌 등)과 상관없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모두가 동등한 인격체로 포함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다양성 훈련의 목표다. 지구의 카운트다운이라는 준엄한 경고를 마주한 이 시기에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다양성 관점이다. ‘돈벌이’가 되는 욕망의 시스템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전면적으로 재논의를 해야만 하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도 않았던 욕망의 시스템과 이를 통한 구분짓기, 배제, 억압을 끝내야 한다. 권력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이 끊임없이 구분되고 오직 인간 중심의, 그 중에서도 '정상인간' 중심으로 작동한 사회는 지속적인 착취를 통해 지금과 같은 위기를 만들었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 윤석열은 기후위기에 대한 미봉책조차 없이 ‘과학이 구원할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만 남아있는 처참한 상황이지만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기후재앙을 만든 권력의 작동방식과 착취와 억압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기후위기 적응의 시대를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자본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과 생명이 중심인 세상, 생산이나 성장이 아니라 분배와 평등이 목표인 세상, 경쟁이 아니라 서로 돌봄이 삶의 방식이 되는 세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내는 체제전환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며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사람을 평가하려는 제도와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의 힘을 모아야 한다.
민중의소리에서 칼럼읽기
준엄한 경고에 등돌린 윤석열
IPCC 6차보고서는 단호했다. 인간이 지구의 온도를 끌어올린 것이 명백하며, 2020년생부터는 기후변화에 가장 큰 부정적인 영향을 경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 최고결정권자는 탄소예산이 10년이 채 남지 않았다는 심각한 보고를 듣고도, 여전히 ‘과학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에 몰두하며 인류를 두고 도박을 하려하고 있다. 탄소중립 기본계획에서 산업의 탄소감축 목표를 줄였고 원자력발전을 계속하겠다고 했으며 이산화탄소 포집‘저장’활용 기술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나와 함께 사는 여섯 살 어린이가 기후위기의 문제를 인식하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2018년생인 같이 사는 어린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고, 이미 많은 지식과 실천방법을 안다. 어린이집에서 환경교육이 잘 이뤄지고 있고 EBS와 같은 공영방송에서도 <그린조끼 구조대>와 같은 어린이를 위한 환경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한 덕분이다. 아이는 ‘비닐과 플라스틱 쓰지 말자, 자동차 타지 말자, 고기 많이 먹으면 안된다’는 등 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여섯 살 어린이가 살아가야할 지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제도와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국가정책 최고결정권자들이다. 동시에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한 초국적 협력이 필요한 인류생존의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1년 7월 6일 대전 유성구 한 호프집에서 ‘문재인정권 탈원전 4년의 역설-멀어진 탄소중립과 에너지 자립’을 주제로 열린 만민토론회에 참석해 ‘탄소중심’이라고 써있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 2021.07.06. ⓒ뉴시스
국익이라는 거짓말
그러나 눈앞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자본가의 욕망을 국익으로 위장하며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생존할 권리를 철저하게 외면한다. 투자를 받기위해 어쩔 수 없이 ESG를 하는 척이라도 하는 기업들에게, 오히려 국가가 괜찮다며 인류의 생존문제를 뒤로하고 기후재앙을 앞당기는 결정을 했다. 10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급박한 경고에 이성적으로 대응하려면 인류는 삶의 방식을 바꿔야만 한다. 그러나 ‘어차피 맞을 매, 미리 맞는게 낫다’며 대단한 결단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의 강제동원이라는 범죄에 면죄부를 갖다 바치고 온 윤석열은, 기후재앙이라는 절박한 경고 앞에선 강력한 대응의지를 보여줄 생각이 없다.
윤석열의 기준은 아주 단순하다.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일은 교역을 재개하는 것을 통해 기업의 돈벌이에 도움이 되고, 기후위기 대응은 탄소감축을 통해 기업의 부담을 늘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윤석열이 말하는 국익이란 눈앞의 자본가를 위한 이윤창출의 기회를 주는 일이다. 국가의 역할을 스스로 저버린 채 국민의 생존이나 존엄한 삶은 처음부터 논외로 한다. 윤석열의 아주 단순한 사고방식은 신자유주의적인 욕망의 시스템에 철저히 부합한다. 아주 소수의 기득권자들만을 배불리는 시스템은 그들을 위해 착취당하고 배제되는 이들을 점점 더 많아지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이러한 착취와 배제가 만들어 내는 돈을 ‘국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재앙, 인류의 카운트다운
인간이 만든 기후재앙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으며, 그 시한이 10년이 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설익은 음모론이나 거짓 선지자의 예언이 아니며, 심지어 일부 급진적인 과학자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는 보수적인 과학자들이 국가간 기후변화협의체를 만든 지 30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검증한 사실이다. 30년이라는 세월은 이미 새로운 발견보다는 검증의 시간이었던 만큼, 인간이 만든 기후재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류가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극도의 인지부조화와 현실을 부정하는 집단최면 가운데 인류는 이 사실들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불편한 마음을 무책임하게 다스리기 위해 막연히 ‘과학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며 과학에 종교적 믿음을 부여했다. 하지만 비용의 최소화, 이윤의 극대화, 최고의 효율만이 요구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많은 비용과 비효율이 동반되는 작업인 기후위기 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서야 가장 보수적인 과학자들로부터 가장 극단적인 경고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책임 있게 행동해야할 국가 최고결정권자들은 여전히 자살골만 넣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제 그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 중엔 누구도 하지 않는다.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 ⓒpixabay
포기할 수 없는 욕망, 행복해졌나? 행복해질까?
현대 인류가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이 극대화한 사회는,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하는 ‘욕망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욕망의 시스템을 끊임없이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신자유주의 구조의 문제다. 개인이 욕망하는 것이라 믿게 만들고 있지만, 이는 자본가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동원된 만들어진 욕망이다. 욕망을 손쉽게 채우기 위해 욕망의 재화는 저렴해야 하고,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한 노동력 착취, 비인간동물 착취로 이어지며, 일상에서 행복감을 찾기 어려운 노동자는 소비를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 이 구조는 서로를 착취함으로써, 그중 에서도 저렴한 노동력으로 동원하는 것이 쉽게 정당화되는 약자(저학벌/저학력 노동자,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여성 등)를 착취함으로써 완성된다. 욕망의 시스템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유리한 구조이지만, 서로를 착취하는 가운데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욕망의 충족을 통해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굴레로 만들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심지어 인류의 생존에 현실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류를 위협하는 욕망의 시스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기 자신을 남들보다 우월하게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것을 갖도록 요구한다. 외모, 학위, 학벌, 고액 연봉, 대기업 명찰, 강남 아파트, 브랜드 아파트, 슈퍼카, 골프장 회원권, 백화점 VVIP 등급, 명품 시계, 명품 가방, 최근에는 ‘오미카세’로 대표되는 비싼 식사 등 나를 남들과 구분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욕망하게 만든다. 그것은 가졌을 때 자랑이 된다.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원하게 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과시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격차를 보여줌으로써 나와 너는 다른 존재라며 구분짓기를 한다. 무시, 조롱, 차별, 폭력을 경험하는 사람들 역시 이를 구조적인 문제로 분석하고 저항할 수 있는 관점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이를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할 개인의 문제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윤석열이 포기하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그 근간이 되는 욕망의 시스템은 안타깝게도 인류의 생존문제에까지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인류의 재앙은 욕망의 시스템 내에서 구분짓기를 통해 배제와 억압이 지속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인간과 비인간으로 나누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비인간동물을 착취했다. 그렇게 생명다양성은 크게 줄어들었다. 인간 가운데서도 정상인간과 비정상인간을 나눠 착취해도 되는 ‘루저’를 만들고 배제해도 되는 ‘약자’를 만들었다. 그렇게 수많은 인간들을 과로사나 자살이라는 방식의 죽음으로 내몰았다. 비인간동물의 비극적인 삶은 비정상인간으로 규정된 사람들의 삶과 닮았다. 그 작동방식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끊임없는 착취의 굴레 속에서 소수의 사람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국익’으로 위장된 것들이다.
지난해 9월 24일 서울 중구 숭례문 일대에서 열린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924 기후정의행진 대회에서 참석한 어린이가 기후위기 경고 피켓을 들고 있다. 2022.0924 ⓒ민중의소리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다양성 관점
다양성(Diversity)을 그저 ‘여러 가지(Variety)’가 아니게 만드는 것은 권력(Power)에 대한 관점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관점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사회적 정체성(인종, 민족,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장애, 질병, 나이, 지역, 종교, 가족의 형태, 고용의 형태, 소득, 경제력, 학력/학벌 등)과 상관없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모두가 동등한 인격체로 포함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다양성 훈련의 목표다. 지구의 카운트다운이라는 준엄한 경고를 마주한 이 시기에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다양성 관점이다. ‘돈벌이’가 되는 욕망의 시스템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전면적으로 재논의를 해야만 하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도 않았던 욕망의 시스템과 이를 통한 구분짓기, 배제, 억압을 끝내야 한다. 권력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이 끊임없이 구분되고 오직 인간 중심의, 그 중에서도 '정상인간' 중심으로 작동한 사회는 지속적인 착취를 통해 지금과 같은 위기를 만들었다. 이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 윤석열은 기후위기에 대한 미봉책조차 없이 ‘과학이 구원할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만 남아있는 처참한 상황이지만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기후재앙을 만든 권력의 작동방식과 착취와 억압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기후위기 적응의 시대를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자본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과 생명이 중심인 세상, 생산이나 성장이 아니라 분배와 평등이 목표인 세상, 경쟁이 아니라 서로 돌봄이 삶의 방식이 되는 세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내는 체제전환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며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사람을 평가하려는 제도와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의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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