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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레터THE LITTLE MERMAID



 세상 모든 게 크던 시절. 나의 하루는 길고도 무료했다. 오늘은 어제와 같았고, 내일은 오늘과 별 다를 게 없을 것 같은 느낌. 길고 긴 하루. 일 나간 부모님. 텅 비어버린 집. 온통 나만의 시간으로 채워진 하루는 자유롭다 못해 고독했다.


 이 따분한 일상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기를 바랐다. 단발적인 사건 말고, 삶의 서사가 아주 바뀌는 무언가. 동화책에 나오는 거. 구구절절한 사연. 나에게도 그런 게 생긴다면 삶이 특별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동화책을 읽을 나이가 지나면서 나는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새로이 알아갔다. 나에게도 동화 속 주인공들 못잖은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나와 닮은 동화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었다. 하필 인어공주. 인어로 태어났지만 인간을 사랑했고 지상을 동경한 여자.


 그 말로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다른 공주의 서사일 수는 없었을까. 박복하고 가난한 줄 알았던 나, 요정 할머니의 인도로 유리 구두 신고 호박 마차 타고 왕자와 결혼한다든지. 독사과를 먹고도 지나가던 왕자의 키스를 받고 사과 조각을 뱉어내는, 천하무적의 맷집을 자랑하고는 왕자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산다든지. 어떻게 억지스럽게라도 좋게 좋게 끝나는 동화도 많은데.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나는 다른 여자보다 한 10년 늦게 2차 성징을 겪었고 지겹고 갑갑하던 껍데기를 벗어던졌으며 법적으로 여성으로 인정되었다. 인어공주와 달리 나는 죽지 않고 잘 살아있다. 다만 이따금씩 ‘톡’ 하는, 거품이 터지는 소리를 듣는 것도 같다.


 지느러미를 두 쪽으로 갈라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는 지상에 발을 디딜 때마다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고 했던가. 태생이 바다인 내게 지상에서 뚜벅뚜벅 곧게 걷는 일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 날을 기억한다. 단발머리 직장인이었던 시절. 호기롭게 명절 선물세트를 사들고 부모님 댁을 방문한 가을날. 추석.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오빠의 구겨진 표정. 말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시궁창 냄새를 맡은 것처럼 찌푸린 그 표정이 나를 쫓아냈다.


 남동생으로 살던 시절에 오빠에게 얻어맞은 일이 수없이 많았다. 이유는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다. 정당한 폭력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과는 없었다.


 나는 용서하려 했다. 용서하고 싶었다. 오빠가 나를 동생으로 받아들인다면. 나에게 조카한테 용돈 팍팍 주는 고모가 되는 미래를 선물해준다면. 어릴 때 일은 덮고 넘어갈 결심을 나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오빠는 별다른 노력 없이, 그저 나를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것만으로도 나를 그 집으로부터 쫓아낼 수 있었다. 인심 좋은 고모가 될 날은 오지 않는다. 오빠를 용서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명절도 오지 않는다.


 매일 저녁 개근하는 것은 불 꺼진 원룸의 담뱃재 냄새다. 나도 어렴풋 알고 있는 것이다. 손님이 올 일 따위 어지간해선 없다는 걸. 사는 동안 아주 혼자일 거라는 사실. 지금껏 그랬고, 앞으로도 쭉.


 이게 내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느낄 아픔인 줄 알았다면, 그래도 나는 지느러미를 갈라 다리를 얻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