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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에서의 이슬람 차별


유학시절 사회정의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가 이란 영화를 보여주었다. 그 영화에서 테러리스트로 묘사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예상이 되는가? 짐작했듯, 바로 미국에서 온 백인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백인에게 우호적인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신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당연했다. 자신이 사는 곳에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과 미사일을 쏘는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로 여겨질 것이다. 나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까지 나는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중동국가들에 사는 이슬람 신자들 혹은 북한을 떠올렸다. 그날 처음으로, '내가 반대해야 할 것들이 전쟁, 무기, 폭력 이런 것들인데 나는 여태까지 특정 지역, 국가, 종교 등을 적대시하게끔 사회화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루는 같은 수업을 듣는 히잡을 쓰는 학생에게 '히잡이 여성에 대한 억압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혹시 왜 히잡을 쓰는지 알려줄 수 있어?'라고 질문했다. 다행히 그는 내 질문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답변해주었다. 자신은 누가 시켜서 히잡을 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종교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도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표현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자발적"으로 히잡을 쓴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종교적, 문화적, 교육적인 영향을 고려했을 때 100% 자발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억압이 아니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미국에 와서 보니 이곳에 사는 여성들은 머리뿐 만 아니라 가슴, 배, 허리, 다리 등 신체의 많은 부분을 노출하고 있는데 그로인해 신체를 평가당하고 있는 것을 억압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는 말을 했다. 여성의 신체를 가리게 하든 노출하게 하든 그것을 여성 스스로 온전히 결정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억압이며 어느 사회, 어느 종교에서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구 북구 대현동 이슬람사원 건축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15일 오후 공사현장 앞에서 돼지고기를 구워 이웃과 나누며 송년회를 진행하고 있다. 2022.12.15 ⓒ뉴스1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착각

여전히 '명예'살인이 이슬람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명예'살인은 가족, 부족, 공동체의 여성 구성원이 그 조직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그 조직의 남성 구성원이 그 여성을 살인하는 행위다. 너무나 강력한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적인 문화 때문에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한 여성이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빠나 오빠에게 살인을 당하는 사건도 있다. 그렇다면, 이게 이슬람의 가르침이고 종교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 폭력, 살인, 범죄가 일어날 수 있고 용인될 수 있는 문화와 제도가 문제다. 성경에도 신명기 22장 20-21절에 '첫날밤에 여성에서 처녀의 표적이 없으면 제 아비의 집으로 끌고 와서 돌로 쳐죽이라'는 구절이 있다.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 성경 구절을 그대로 지켜야 할까?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을까? 코란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다고 한들 그것을 아직도 실제로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 아니라 뿌리 깊은 가부장제 때문이다.

이슬람교 자체가 성차별과 성폭력을 두둔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한 사회에서 종교와 문화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가 중요하다. 한국의 개신교의 많은 교파와 천주교에서 여성은 목사나 신부가 되지 못하거나 되기 어렵다. 전도사나 수녀는 많다. 왜 그럴까? 수녀복의 베일은 히잡 만큼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이야기되지 않는 것도 흥미롭다. 머리를 덮는 천으로 모양새는 비슷한데, 왜 그 의미나 상징에 대한 해석의 기준이 다를까? 그렇다면 개신교와 천주교의 성폭력은 어떨까? 슬프게도, 한국에서 전문직 중 성범죄 1위는 목회자(목사)다. 개신교라는 종교 자체의 문제일까? 아니다. 목회자와 신도들 사이의 절대적인 위계관계와 교회 내 성차별적인 문화 때문이다. 목회자와 신도들 사이에 신뢰관계를 이용해서 그루밍 성범죄(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심리적 지배와 종속 상태를 만들고 그 관계를 성적인 관계로 만드는 것)를 하기 쉬워진다는 특성도 있다. 천주교 내 성폭력도 역사가 깊고,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문화적인 권력이 크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며 개신교와 천주교 내의 성평등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개신교와 천주교 자체가 성차별과 성범죄를 옹호한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그들의 과오이자 부끄러운 역사와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교는 왜 다르게 생각할까? 이슬람 종교인의 성차별과 성범죄 역시 그들의 과오이자 부끄러운 역사이고 여전한 현실이다.

'코란(이슬람의 경전)이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이라고 명하고 있으니 정말 무서운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성경에도 구약의 수많은 내용에서 하나님(여호와, 야훼)은 믿지 않는 사람을 죽인 것이 발견된다. '죽이라'고도 했다. '전쟁을 하라'고도 했다. 지금의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어도 될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약 5%정도가 이주민이다. 그러나 다문화정책이 실시된 지 15년이 넘도록 한국의 이주민 차별은 여전히 공고하다. 이주민 중 한국계 중국인들이 40%이상이다. 그런데 언론이나 영화 등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가 성찰 없이 고정관념과 편견을 재생산하는 까닭에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중국동포)을 범죄와 연결시켜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계 중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과 다른 지역을 비교했을 때 지역 간 범죄율의 차이는 발견되지 않는다. 인구 1,000명당 범죄율을 비교해 보더라도 이주민들의 범죄율은 선주민들의 범죄율보다 높지 않다.

서울 용산구 이슬람사원인 서울중앙성원을 찾은 이슬람교인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2019.5.6 ⓒ뉴스1


한국계 중국인들과 더불어 많은 차별을 받는 집단이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구 대현동에 모스크(이슬람 사원) 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북대학교 대구캠퍼스에 오는 유학생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필요한 공간이다. 바로 옆에는 큰 개신교 교회가 있는 것을 보아 반대하는 이유가 '종교 시설'이라는 것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는 개신교에 대한 인식과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슬람은 기독교 다음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기독교 31.11%, 이슬람 24.9%)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기원도 같고 종교를 통해 사랑, 평화, 조화를 만들어 내고 실천할 수 있다고 믿는 가치도 같다. 차별과 혐오, 극우 정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부 극우 개신교인들이 기독교의 가치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듯이 극우 이슬람 신자들이나 ISIS가 이슬람의 가치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 일부 주민들은 모스크가 생기면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하지만 전국에서 가장 큰 모스크가 있는 용산의 이태원을 포함해서 모스크가 생겨서 집값이 떨어진 사례는 없다. 오히려 주변 상권이 발전하기도 했다.


전세계 최하위 출생률, 다문화 다종교 사회 불가피

인구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 중에는 이주민의 비율이 빠른 속도로 15%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야 경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최근 출생률 0.78명(2022년)을 기록하며 여전히 전세계 최하위이자 점점 더 낮아지는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이미 2006년에 영국 옥스퍼드 인구문제연구소는 한국이 지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라고 전망했다. 성평등한 사회, 저성장시대에도 존엄하게 사는 것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출생률 지표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국가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의지가 없다. 국가권력의 유지와 기업의 이윤극대화만 생각하는 국가로서는 착취할 '노동력'을 기업에 제공하고 '세금'을 낼 사람들이 필요할 테니 이주를 대거 허용하는 것이 편한 선택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심각한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사회로 돌입하게 되면 이주배경 등을 차별의 근거로 두고 착취를 당연히 여기며 계급을 공고히 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경제력, 학력/학벌, 고용의 형태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계급이 다른 것처럼 대우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다시금 국가가 외면한 차별의 문제는 계속해 중요해질 것이다. 착취와 차별만이 공고한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결국 차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불투명한 미래, 희망이 없어 보이는 미래를 무기력하게 맞이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모든 존재가 평등한 공동체에서 동등한 주체로 포함되어 살아갈 수 있는 다양성사회는 지금 당장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우선 차별을 당하지 않기 위해 각자도생해야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사회 분위기를 전환해야만 한다. 인종, 민족, 종교 뿐만 아니라 성별,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장애, 질병, 나이, 학력, 학벌, 고용의 형태, 소득수준, 지역, 가족의 형태, 외모 등으로 사람을 정상/비정상 혹은 우월함/열등함으로 구분 짓고 차별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유형의 억압에 모두가 함께 연대하여 차별에 저항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억압은 연결되어 있다. 심각한 저출생률을 만든 성차별과, 경제력이나 학력/학벌을 차별을 근거로 두고 만들어진 착취구조는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이주배경이 차별의 근거가 되고 착취구조를 만드는 것 역시 함께 해결되어야 한다. 이주민 차별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은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 한국'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동일한 열쇠다. 차별을 금지조차 못하는 국가의 과오이자 부끄러운 역사를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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