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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부정, 방어, 축소를 넘어선 연대를 생각한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역량을 미리 준비하자’는 취지로 주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혹은 노출되는 미디어를 다양성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미력하게나마 제공하고자 했다. 이를위해 많이 회자되는 이슈들이나 시의성 등을 고려해 주제를 선택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뉴스, 예능, 스포츠, 교육, 문화, 노동, 기업, 영화 등을 통해 우리가 접하게 되는 미디어 메시지들을 어떻게 분석하고 적용하고 활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긍정적인 반응이든 부정적인 반응이든 그 칼럼에서 가장 큰 반응이 있었던 글은 슬램덩크와 지구오락실에 대한 글이다. 두 편의 글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두 편의 글은 다른 칼럼에 비해 내용적으로 평이한 편에 속하는데 어떤 면에서 가장 많이 읽히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많은 의견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견이 가장 많았다. 첫째, 화제성이 높고 팬덤이 큰 만큼 그 미디어(슬램덩크)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미디어가 비판받는 것을 자신을 비난하는 것처럼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자신이 즐기는 미디어(지구오락실)를 비판하는 것이 자신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처럼 여길수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나눈 분들의 결론은 자신들 역시 이런 일을 종종 경험하는데 조금 더 배경, 맥락, 역사를 설명하며 친절하게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론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더 쉽고 친절하게 말해라’는 말을 더 자주 혹은 매번 듣겠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사람을 마주할 때 많은 사람들은 패닉을 경험하며 방어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도록 요구받고, 스스로 자신을 증명해야한다. 이 사회가 들어주지 않아도 친절하게 ‘합법’적으로 이야기를 하도록 요구받는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사회적으로 ‘정상’기준에 포섭된 사람들은 전혀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스트레스를 경험하며 살아야 한다. 결국 그런 스트레스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소수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선택을 하게 만든다. 이렇게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은 존재하지만 지워진 존재가 된다.


지구오락실이 고깔모자 게임과 고요속의 외침을 통해 장애인들이 마주하는 현실을 웃음의 소재로 만들었다는 지적과 슬램덩크가 묘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문제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공감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공감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공감을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다. 사람마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 배경, 역사, 맥락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바로 공감을 할 수도 있고, 부정을 하거나, 방어하거나, 축소할 수도 있다. 배움을 통해 공감하고 수용하며 변화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억압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이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서 들었을 때 보이는 반응으로, ‘부정-방어-축소-배움-공감-수용-변화의 단계’에 포함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NCCJSTL은 Reactions to personal responsibility(개인적 책임에 대한 반응)라는 억압에 대한 이론을 통해 사람들의 방어기재와 변화에 단계를 제시한다.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서 들었을 때, 특히 그것이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문제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억압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의 패턴이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단계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세상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거나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단계다. 또한/또는 자신의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단계다. 두 편의 칼럼에 대한 댓글들 중에는 ‘무슨 병 있어요?’, ‘정신병자인가요?’, ‘일상생활 가능하냐’와 같은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하표현이 될 수 있는 표현과 함께 억압을 전면 부인하는 반응이 여기에 해당된다. ‘어딜봐도 여성비하적인 요소는 없다’, ‘슬램덩크의 여성재현은 아무 문제없다. 여자들도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이유는 슬램덩크의 등장인물들이 가부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어이가 없다. 모든 게임을 다 장애인 차별이라고 해라’와 같이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반응도 있다. ‘아무 문제 없는 것을 문제로 만드는 네가 문제다’라는 식의 ‘PC주의자들 지겹다’는 반응들이 부정의 단계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단계는 그런 일이 있긴 하지만 억압은 아니라고 방어하는 단계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거나 억측을 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단계다. 자신이 공격을 당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 두 편의 칼럼에 대한 댓글들 중에는 ‘예능을 다큐로 보냐’, ‘오락은 오락으로만 봐라. 모든 프로가 다 교양, 교훈, 교육 프로그램이어야겠냐’, ‘확대 해석이다. 그럼 애초에 TV나 라디오는 시청각 장애인 차별이냐’, ‘30년 전 만화를 가지고 왜 그러냐’, ‘남성 스포츠 청춘 만화에서 뭘 바라냐’와 같은 반응이 있다. ‘사극을 보면서 왕정시대를 비판하는 것 같다’는 말로 ‘그 시대에는 당연한 것이었다’며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것, 그럴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바로 방어의 단계에 해당한다.


세 번째 단계는 그런 일이 있고 억압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축소하는 단계다. 다시 말해 문제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단계다. 공감을 하게 되면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억압에 대한 자신의 책임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고 문제를 축소하고 싶어한다. 두 편의 칼럼에 대한 댓글들 중에는 ‘슬램덩크는 그 시대의 다른 일본 만화들 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와 같이 다른 만화와 비교하며 여기서 드러난 문제는 별 것 아니라는(양호한 것이라고) 표현들이 이에 해당한다. ‘작가가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며 ‘작가는 장애인 농구부의 이야기를 그리기도 했다’는 글도 있었다. 이 역시 여성재현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이에 대한 응답을 다른 작품의 다른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지으며 무마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축소의 단계에 해당하기도 한다.


억압을 경험하지 않는 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억압이 아니’라고 말하는 상황에서는 자신도 계속 그 차별과 억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나의 생각을 인정, 지지해 주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많은 사람이 ‘이것은 억압이다’라고 말하는 이슈가 돼야 아직 그것이 억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쉽게 무엇이 억압인지 알게 된다는 뜻이다. 가까운 예를 들어 불과 2년전만 하더라도 자녀 체벌은 민법에서 ‘자녀징계권’으로 보장되었다. 이것이 제도로서 ‘당연한 것’처럼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주양육자나 교사가 어린이, 청소년을 “교육을 위해서”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는 ‘체벌은 폭력이고 억압’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많았다. 이제는 때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체벌을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가 훨씬 더 쉽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고 그것이 제도로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수용될 때까지 자신의 태도를 계속 방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근거는 필수적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계기로 억압에 대해 이해하기 전까지는 차별과 억압을 축소한다. 그래서 직접적/간접적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을 직접 보고 들을 수도 있고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고 들을 수도 있다[배움의 단계]. 이렇게 계속 배우며 생각하면 공감하며 감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공감의 단계].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면 사회적 소수자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며 억압이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억압이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게 되는 단계가 된다[수용의 단계].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 함께 연대할 수 있다[변화의 단계].


이 단계들은 반드시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이슈마다 모든 단계가 다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단계를 건너뛰는 것도 자주 일어난다. 처음부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보여준다면(친한 친구나 가족이 아니라면 드문 일이지만), 바로 공감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다. 주변에 친한 소수자 친구가 있는 사람과 자신의 주변에는 소수자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자가 경험하는 억압에 대해 매우 다르게 느낀다. 문제를 방어하거나 또는 축소하더라도 부인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여러 반응을 동시에 경험할 수도 있다. 겉으로는 문제를 축소하는 태도를 보이더라도, 내적으로는 문제의 심각성을 수용하거나 공감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 사회적으로 유리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해서 자신이 실제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언행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다른 이슈들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이슈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고, 다른 이슈들에 대해서는 더 배우고 싶어하거나 이미 자신의 책임을 알고 변화를 만들어 가는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성소수자 억압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변화를 만들어 가고자 노력하지만 여성 억압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수동적이거나 방어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여성 억압 이슈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변화를 만들어 가고자 노력하지만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의 이슈에 대해서는 수동적이거나 방어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수많은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어떤 정체성에 의해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억압을 경험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정체성에 의해서는 아무 이유없이 누군가를 억압할 수도 있는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내가 억압의 사회구조와 문화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 인정할 수 있어야 사회문제의 해결책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억압이 구조적이라는 것과 내가 구조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해결책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자신이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정체성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회적 정체성들로 관심을 확대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