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디즈니사가 100주년을 기념한 영화를 개봉했다. 그리고 그 영화의 엔딩크레딧에는, 그간 디즈니가 공개한 대표작의 캐릭터들이 반갑게 등장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부터 최근 개봉한 위시까지, 디즈니의 캐릭터와 그 메시지는 그동안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지난해 개봉해 큰 이슈가 되었던 인어공주 실사판이 에리얼을 유색인종으로 등장시켰다는 것에 대해 공격을 심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시의 주인공 아샤 역시 유색인종으로 등장했다. 또한 아샤는 어린 여성이자 평범한 시민이다. 반면 악당으로 등장한 매그니피코는 "잘생긴"(자타공인)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 생겼니?'라는 대사도 나온다) 백인 남성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비장애인 시스젠더 이성애자인 권력자 남성이다. 인종뿐만 아니라 머리와 의상에도 흰색 계열을 사용했다. 악역이나 악당을 검정색과 연결시키던 과거의 미디어들과 반대다.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아샤가 가장 먼저 저항의 노래와 행동을 했을 때 두 번째 사람으로 뒤따라 곧바로 행동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배역으로 목발을 이용하는 장애인이 등장했다. 디즈니 영화들을 흥행 수익으로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디즈니 영화는 캐릭터와 메시지 변천사를 알고 보면 훨씬 더 재미있다. 다양성과 포함의 관점으로 어떤 변화의 과정이 있었는지 함께 살펴보자.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 ⓒ자료사진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의식이 없거나 잠자고 있거나 죽었거나 자신의 상황과 삶에 대한 아무런 힘이 없이 누군가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 상태로 왕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에서의 공주는 여전히 왕자가 필요하긴 했지만 이전의 세 공주보다는 훨씬 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주도적으로 표현하고 행동하는 공주였다. '여자에게는 남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삶에 대해 갈망하고 모험을 떠나고 자신이 원하는 파트너를 찾아 떠나는 캐릭터로 변화했다. 그다음은 실화 바탕의 이야기이기도 한 포카혼타스와 뮬란이다. 처음으로 백인이 아닌 공주로 등장한 알라딘의 자스민에 이어 포카혼타스와 뮬란도 소수인종의 이야기이다. 포카혼타스와 뮬란은 남성들과의 관계로 규정되지 않는다. 자신의 가족, 민족, 국가를 외교와 전투를 통해 지킨다. 그전에는 남성 주인공들에게만 부여됐던 역할이다. 바로 이 지점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칭찬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점이 이 두 영화의 한계로 지목되기도 했다. 여성은 국가를 구하는 영웅 정도는 돼야만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이렇게 90년도에도 성역할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여성상에 조금씩 도전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지금 갑자기" 그러는 게 아니다. 성역할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디즈니가 픽사와 함께 작업한 영화인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메리다를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야 한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모든 것(여성이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외모, 성격, 행동 그리고 결혼을 포함해 여성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는 것들)이 불편한 메리다는 절대 그냥 순응하는 법이 없다. 메리다는 기존의 틀에 도전하고 자신의 삶과 세상을 만들어내는 캐릭터다.
엘사와 모아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여는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엘사와 모아나와 같은 캐릭터는 그동안 남성들에게만 주어졌던 캐릭터다. 엘사와 모아나는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자기 자신을 탐구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엘사는 자기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쌓아 올린 성이 무너질 것을 각오하고 그들이 잘못 형성해 놓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한다. 모아나 역시 아버지가 아버지의 과거 경험 때문에 모두에게 금지한 것에 도전한다. 그 도전을 할 수 있도록 강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친근하게 계속 슬쩍슬쩍 밀며 당기며 격려하며 돕는 사람이 할머니(다른 여성, 선배 여성)라는 것이 너무 좋다. 엘사와 모아나는 기존의 가부장제 사회 질서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문제를 여성들(젊은 여성, 다음 세대 여성)이 해결한다. 인간과 자연의 망가진 관계도 회복한다.
특히 초능력이나 마법과 같은 막강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의 열쇠로 등장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겨울왕국의 안나 이야기다. 흔히 겨울왕국의 주인공은 엘사라고 생각되지만 안나가 숨은 주인공이다. 안나는 엘사가 죽었고 더 이상 울라프도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자신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을 한다. 이때 나오는 '해야 할 일(the next right thing)'이라는 노래는 겨울왕국2의 주제가에 버금가는 상징성을 갖는다. 어떠한 특별한 능력이 없는 평범해 보이는 캐릭터만을 남겨둔 채, 디즈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순간에 멀리 보지 않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이 메시지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은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절대 자발적으로 내려놓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은 너무나 공고하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체가 억압받고 있으며 그 결과로 만들어진 기후위기는 곧 인류를 종말 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안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한다.
엘칸토의 미라벨도 마찬가지다. 미라벨의 가족들은 모두 초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미라벨만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못해 별 볼 일 없어 보인다. 주변 사람들도 미라벨을 불쌍히 여기거나 안타깝게 여긴다. 그런데 결국은 미라벨이 위기에 처한 가족을 살리고 집을 살리고 마을을 살린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메시지를 준다. 이 메시지가 더 확장된 것이 오늘 가장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 위시(Wish)다. 위시는 어떤 영웅이나 리더에게 우리들의 삶을 맡기지 말라고 말한다. 위시의 주인공 '아샤'는 공주도 귀족도 아니다. 마을에 사는 평범한 한 사람이다. 아샤가 공주도 귀족도 아니었기에 그리고 혼자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이 아니었기에 나는 위시의 문제 해결 묘사가 민중운동이자 혁명으로 보였다. "우린 모두 별이야"라고 함께 부르는 노래가 혁명의 노래로 느껴졌다.
이 노래는 모두가 별처럼 빛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뜻으로도 들리지만 동시에 '너도 별이고 나도 별이고 동물도 식물도 모두 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원자로 만들어져 있는 같은 존재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상당히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다. 우리는 모두 달라서 아름답고 동등하게 존귀하다는 메시지다.
*다음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로사스'라는 왕국은 '매그니피코 왕'이 다스린다. 매그니피코는 사람들이 그에게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루어 주는 존재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자신이 허락하는 소원(자신의 권력과 자신이 세운 왕국의 안위에 아무런 도전이 되지 않는 소원)만 이루어 준다. 현실 세계를 너무도 잘 묘사했다. 현재 한국사회는 우리에게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꿈은 어떤 꿈인가? '돈 잘 버는 꿈' 정도의 꿈이다. 이젠 그런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긴 하지만, 그런 꿈을 가진 사람들의 꿈은 이루어져도 기득권자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이루어진다. 위시에서의 '소원 성취식'처럼 말이다. 자본가들과 정치 권력가들은 우리에게 소원을 심어준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물건을 끊임없이 사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비싼 물건, 비싼 음식을 욕망하게 한다. 없던 욕망도 창조해낸다. 쓸데없는 물건도 사게 한다. 그 물건이 없으면 나의 삶이 궁핍하거나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본가들이 심어준 소원이 마치 본인들의 소원인 것처럼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걸 탐구해 볼 기회조차 박탈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채기 힘들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위시 포스터 ⓒ자료사진
우리는 자본주의/능력주의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면 누구나 다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그 소원 자체가 자본가들과 정치 권력가들에 의해 허락된 소원만을 말한다. 평등, 평화, 인권, 다양성의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소원은 “위험한 소원”으로 규정되고 이루어질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된다. 집회와 시위를 탄압한다. 공교육의 목적을 성숙한 시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입시만을 위해 경쟁하는 것으로 만든다. 아샤의 할아버지의 소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었는데, 매그니피코에 의해 ‘너무 위험한 소원’으로 규정되어 그의 소원은 영영 들어주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아샤는 누가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었느냐고 질문한다. 매그니피코가 “사람들이 무엇을 누릴 것인지는 내가 결정한다”고 말할 때, 아샤는 ‘그것은 그가 그에게 스스로 부여한 권한일 뿐 우리는 그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진짜 삶”을 빼앗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게 만들며 그것을 기반으로 권력을 누리며 사는 매그니피코에게 저항하자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하지 않으면 누가 언제 하겠어?’라고 노래한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승리는 그의 것’이라고 말하며 ‘이젠 진실을 알게 됐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혁명(Revolution)을 노래한다.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 줄 세상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이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살되 정치인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계속 무릎 꿇리는 세력이 있다 하더라도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며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노래하며 나아가야 한다. 위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조차 없게 우리들의 상상력조차 막아버린 세상을 향한 메시지다. 누군가의 손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지 말고 모든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별처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것 이상을 꿈꿀 수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삶(모두가 안전하고 평등한 삶,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도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디즈니 영화는 변화해 왔다. 디즈니의 메시지 변화의 흐름을 알고 이러한 내용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 감상은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디즈니 영화의 메시지의 변화는 단순히 흥행 순위와 매출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디즈니가 사회변화를 어떻게 따라가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지 분석하며 영화를 즐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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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디즈니사가 100주년을 기념한 영화를 개봉했다. 그리고 그 영화의 엔딩크레딧에는, 그간 디즈니가 공개한 대표작의 캐릭터들이 반갑게 등장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부터 최근 개봉한 위시까지, 디즈니의 캐릭터와 그 메시지는 그동안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지난해 개봉해 큰 이슈가 되었던 인어공주 실사판이 에리얼을 유색인종으로 등장시켰다는 것에 대해 공격을 심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시의 주인공 아샤 역시 유색인종으로 등장했다. 또한 아샤는 어린 여성이자 평범한 시민이다. 반면 악당으로 등장한 매그니피코는 "잘생긴"(자타공인)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 생겼니?'라는 대사도 나온다) 백인 남성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비장애인 시스젠더 이성애자인 권력자 남성이다. 인종뿐만 아니라 머리와 의상에도 흰색 계열을 사용했다. 악역이나 악당을 검정색과 연결시키던 과거의 미디어들과 반대다.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아샤가 가장 먼저 저항의 노래와 행동을 했을 때 두 번째 사람으로 뒤따라 곧바로 행동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배역으로 목발을 이용하는 장애인이 등장했다. 디즈니 영화들을 흥행 수익으로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디즈니 영화는 캐릭터와 메시지 변천사를 알고 보면 훨씬 더 재미있다. 다양성과 포함의 관점으로 어떤 변화의 과정이 있었는지 함께 살펴보자.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 ⓒ자료사진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의식이 없거나 잠자고 있거나 죽었거나 자신의 상황과 삶에 대한 아무런 힘이 없이 누군가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 상태로 왕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에서의 공주는 여전히 왕자가 필요하긴 했지만 이전의 세 공주보다는 훨씬 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주도적으로 표현하고 행동하는 공주였다. '여자에게는 남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삶에 대해 갈망하고 모험을 떠나고 자신이 원하는 파트너를 찾아 떠나는 캐릭터로 변화했다. 그다음은 실화 바탕의 이야기이기도 한 포카혼타스와 뮬란이다. 처음으로 백인이 아닌 공주로 등장한 알라딘의 자스민에 이어 포카혼타스와 뮬란도 소수인종의 이야기이다. 포카혼타스와 뮬란은 남성들과의 관계로 규정되지 않는다. 자신의 가족, 민족, 국가를 외교와 전투를 통해 지킨다. 그전에는 남성 주인공들에게만 부여됐던 역할이다. 바로 이 지점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칭찬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 점이 이 두 영화의 한계로 지목되기도 했다. 여성은 국가를 구하는 영웅 정도는 돼야만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이렇게 90년도에도 성역할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여성상에 조금씩 도전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지금 갑자기" 그러는 게 아니다. 성역할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디즈니가 픽사와 함께 작업한 영화인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메리다를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야 한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모든 것(여성이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외모, 성격, 행동 그리고 결혼을 포함해 여성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는 것들)이 불편한 메리다는 절대 그냥 순응하는 법이 없다. 메리다는 기존의 틀에 도전하고 자신의 삶과 세상을 만들어내는 캐릭터다.
엘사와 모아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여는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엘사와 모아나와 같은 캐릭터는 그동안 남성들에게만 주어졌던 캐릭터다. 엘사와 모아나는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자기 자신을 탐구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엘사는 자기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쌓아 올린 성이 무너질 것을 각오하고 그들이 잘못 형성해 놓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한다. 모아나 역시 아버지가 아버지의 과거 경험 때문에 모두에게 금지한 것에 도전한다. 그 도전을 할 수 있도록 강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친근하게 계속 슬쩍슬쩍 밀며 당기며 격려하며 돕는 사람이 할머니(다른 여성, 선배 여성)라는 것이 너무 좋다. 엘사와 모아나는 기존의 가부장제 사회 질서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문제를 여성들(젊은 여성, 다음 세대 여성)이 해결한다. 인간과 자연의 망가진 관계도 회복한다.
특히 초능력이나 마법과 같은 막강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의 열쇠로 등장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겨울왕국의 안나 이야기다. 흔히 겨울왕국의 주인공은 엘사라고 생각되지만 안나가 숨은 주인공이다. 안나는 엘사가 죽었고 더 이상 울라프도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자신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을 한다. 이때 나오는 '해야 할 일(the next right thing)'이라는 노래는 겨울왕국2의 주제가에 버금가는 상징성을 갖는다. 어떠한 특별한 능력이 없는 평범해 보이는 캐릭터만을 남겨둔 채, 디즈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순간에 멀리 보지 않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이 메시지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은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절대 자발적으로 내려놓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은 너무나 공고하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체가 억압받고 있으며 그 결과로 만들어진 기후위기는 곧 인류를 종말 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안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한다.
엘칸토의 미라벨도 마찬가지다. 미라벨의 가족들은 모두 초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미라벨만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못해 별 볼 일 없어 보인다. 주변 사람들도 미라벨을 불쌍히 여기거나 안타깝게 여긴다. 그런데 결국은 미라벨이 위기에 처한 가족을 살리고 집을 살리고 마을을 살린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메시지를 준다. 이 메시지가 더 확장된 것이 오늘 가장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 위시(Wish)다. 위시는 어떤 영웅이나 리더에게 우리들의 삶을 맡기지 말라고 말한다. 위시의 주인공 '아샤'는 공주도 귀족도 아니다. 마을에 사는 평범한 한 사람이다. 아샤가 공주도 귀족도 아니었기에 그리고 혼자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이 아니었기에 나는 위시의 문제 해결 묘사가 민중운동이자 혁명으로 보였다. "우린 모두 별이야"라고 함께 부르는 노래가 혁명의 노래로 느껴졌다.
이 노래는 모두가 별처럼 빛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뜻으로도 들리지만 동시에 '너도 별이고 나도 별이고 동물도 식물도 모두 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원자로 만들어져 있는 같은 존재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상당히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다. 우리는 모두 달라서 아름답고 동등하게 존귀하다는 메시지다.
*다음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로사스'라는 왕국은 '매그니피코 왕'이 다스린다. 매그니피코는 사람들이 그에게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루어 주는 존재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자신이 허락하는 소원(자신의 권력과 자신이 세운 왕국의 안위에 아무런 도전이 되지 않는 소원)만 이루어 준다. 현실 세계를 너무도 잘 묘사했다. 현재 한국사회는 우리에게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꿈은 어떤 꿈인가? '돈 잘 버는 꿈' 정도의 꿈이다. 이젠 그런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긴 하지만, 그런 꿈을 가진 사람들의 꿈은 이루어져도 기득권자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이루어진다. 위시에서의 '소원 성취식'처럼 말이다. 자본가들과 정치 권력가들은 우리에게 소원을 심어준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물건을 끊임없이 사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비싼 물건, 비싼 음식을 욕망하게 한다. 없던 욕망도 창조해낸다. 쓸데없는 물건도 사게 한다. 그 물건이 없으면 나의 삶이 궁핍하거나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본가들이 심어준 소원이 마치 본인들의 소원인 것처럼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걸 탐구해 볼 기회조차 박탈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채기 힘들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위시 포스터 ⓒ자료사진
우리는 자본주의/능력주의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면 누구나 다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그 소원 자체가 자본가들과 정치 권력가들에 의해 허락된 소원만을 말한다. 평등, 평화, 인권, 다양성의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소원은 “위험한 소원”으로 규정되고 이루어질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된다. 집회와 시위를 탄압한다. 공교육의 목적을 성숙한 시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입시만을 위해 경쟁하는 것으로 만든다. 아샤의 할아버지의 소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었는데, 매그니피코에 의해 ‘너무 위험한 소원’으로 규정되어 그의 소원은 영영 들어주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아샤는 누가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었느냐고 질문한다. 매그니피코가 “사람들이 무엇을 누릴 것인지는 내가 결정한다”고 말할 때, 아샤는 ‘그것은 그가 그에게 스스로 부여한 권한일 뿐 우리는 그 규칙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진짜 삶”을 빼앗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게 만들며 그것을 기반으로 권력을 누리며 사는 매그니피코에게 저항하자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하지 않으면 누가 언제 하겠어?’라고 노래한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승리는 그의 것’이라고 말하며 ‘이젠 진실을 알게 됐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혁명(Revolution)을 노래한다.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 줄 세상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이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살되 정치인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계속 무릎 꿇리는 세력이 있다 하더라도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며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노래하며 나아가야 한다. 위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조차 없게 우리들의 상상력조차 막아버린 세상을 향한 메시지다. 누군가의 손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지 말고 모든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별처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것 이상을 꿈꿀 수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삶(모두가 안전하고 평등한 삶,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도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디즈니 영화는 변화해 왔다. 디즈니의 메시지 변화의 흐름을 알고 이러한 내용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 감상은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디즈니 영화의 메시지의 변화는 단순히 흥행 순위와 매출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디즈니가 사회변화를 어떻게 따라가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지 분석하며 영화를 즐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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