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으로 출근하고 있다. 2026.8.31 ⓒ뉴스1
이재명 대통령이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을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환영할 만한 면이 있다. 1990년생의 젊은 정치인이 장관 후보자가 된 것도 의미가 있고, 세월호 참사 이후 인권과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꾸준히 이야기해 온 정치인이 성평등 정책을 책임지게 된 것도 기대할 만한 일이다. 나는 용혜인 후보자가 차별금지법 제정과 포괄적 성교육의 제도화에도 힘쓰며 성평등가족부 장관으로서 맡은 역할을 잘 해내길 바란다.
용혜인 의원에 대한 평가나 기대와 별개로, 나는 이번 인선을 보며 한국 정치가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에 보내고 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생각하게 된다. 메시지는 꽤 분명하다.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세력을 만들기 위해 지난한 길을 걷는 것보다 민주당 중심의 정치연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많은 정치적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이라는 것이다.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김영훈은 현재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그는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뒤 정의당에서 활동했고, 2024년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주도한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2025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선대위 노동본부장을 맡았고, 이후 이재명 정부의 초대 고용노동부 장관이 되었다.
용혜인은 2020년 민주당 주도의 더불어시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고, 2024년에도 민주당 주도의 더불어민주연합을 통해 다시 국회에 들어왔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는 이재명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고, 이제 이재명 정부의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되었다.
나는 이것을 두 사람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어떤 정치적 계산을 했는지 추측할 이유도 없고, 민주당과 협력했다는 사실 자체를 비난할 이유도 없다. 연합정치는 정치의 중요한 일부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이 민주당과 함께해야 할 일도 많다. 극우와 싸울 때도, 민주주의를 지킬 때도, 노동권과 인권을 확대할 때도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다.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그러한 선택을 ‘합리적인 선택’이자 ‘현실적인 선택’으로 만들어버리는 정치적 유인 구조가 문제다.
독립적인 진보정당을 만들고 원내 진입을 위해 전국을 뛰어다니는 것보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비례연합에 참여하는 것이 국회에 들어갈 가능성을 높여준다. 독립적인 노동정치를 조직하는 것보다 민주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국정에 직접 참여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민주당과 다른 정치를 만들어보자”는 선택과 “민주당과 연합해 그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선택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이고 정치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경로로 보이게 될까? 이것은 이번 정부에서 처음 생긴 문제도 아니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의 많은 인재를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후보로 영입하고, 정부와 지방정부의 정무직으로 불러들였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 출신의 사람들이 제도정치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진출의 가장 크고 안정적인 통로가 민주당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 출신은 더 많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문제는 그 진출의 가장 크고 안정적인 통로가 민주당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민주당의 욕심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한국의 정치제도 자체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지역구 의원은 254명이고 비례대표 의원은 46명에 불과하다. 전체 의석의 약 15%만이 비례대표다.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을 확대한다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지만 거대 양당은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다당제를 확대하겠다던 제도는 오히려 작은 정당들을 거대정당 중심으로 줄 세우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올해 1월 헌법재판소가 비례대표 의석을 얻기 위해 정당득표율 3%를 넘도록 한 이른바 ‘3% 봉쇄조항’을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헌재는 소선거구제 중심의 현행 제도 자체가 거대정당에 유리한 상황에서 별도의 봉쇄조항까지 두는 것은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에 이중의 장벽이 되고 정치적 다양성과 선거의 대표성을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작은 정당을 향해 그저 “민주당에 기대지 말고 독립적으로 성장하라”고 말하는 것 역시 무책임하다. 정치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연합과 종속은 구분돼야 한다. 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정치가 민주당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정적으로 의석을 얻기 어렵고, 민주당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지 않고서는 국정에 참여하기 어렵다면 그것을 다당제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두 거대한 정당 사이에서 다른 정치세력이 독립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면, 사람 몇 명을 정부에 더 참여시킨다고 양당제가 다당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이 정말 연합정치와 다당제를 원한다면 자신의 품을 넓혀 다른 정치인을 데려오는 것, 지금 흔히 ‘포용의 정치’라고 불리는 것보다 자신의 권력을 나눌 수 있는 정치구조를 만드는 일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비례성을 높이는 선거제도를 만들고, 위성정당이 다시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제도를 정비하며, 작은 정당도 시민에게 받은 지지만큼 정치적 대표성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연립정부를 만들고 싶다면 개인 몇 사람을 발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당과 정당이 정책과 권한,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공개적으로 합의하는 정치도 가능해야 한다. 연립정부란 작은 정당에서 사람 몇 명을 데려와 큰 정당의 정부에서 일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자신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목표에 합의하고 함께 책임지는 것이다. 협력할 때는 협력하지만 의견이 다를 때는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싸울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도 상대의 정치적 존립 자체를 위협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연립이다.
내가 오랫동안 다양성 운동을 통해 이야기해 온 다양성과 포함(inclusion)의 원칙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소수자 몇 명을 조직 안에 합류시키는 것만으로 그 조직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조직이 되었다거나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구조와 문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이 가진 다양성과 권력구조의 다양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여성 한 명을 임원으로 만들었다고 성평등한 조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장애인 한 명을 채용했다고 장애인을 포함하는 조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성소수자 한 명을 대표자로 세웠다고 성소수자를 억압해 온 제도와 문화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다양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적 선택지가 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양성의 정치가 아니다

20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경기지방고용노동청에서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최승호 삼성전자 노조 공동투쟁본부 위원장, 여명구 DS(반도체 부문) 피플팀장이 손을 맞잡고 있다. ⓒ뉴시스
정치도 마찬가지다. 노동운동가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진보정당의 젊은 여성 정치인을 성평등가족부 장관으로 임명했다는 사실만으로 정치적 다양성이 확대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정치세력의 독립적인 힘은 계속 약화되는 동안 그 집단에 속한 일부 사람만 선택적으로 권력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포함(inclusion)’보다는 ‘포섭(co-optation)’에 가깝다.
포함은 “우리의 넓은 품으로 당신도 받아주겠다”는 포용적인 태도나 시혜가 아니다. 포함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채로 동등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존의 중심에 주변부 사람 몇 명을 끌어들여 중심의 질서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중심이 되고 누가 주변으로 밀려나는지를 결정해 온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다양성의 정치 역시 얼굴의 다양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정치적 목소리와 정치세력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어떤 사안에서는 협력하고 다른 사안에서는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서로가 정치의 주체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용혜인과 김영훈이 대통령과 민주당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장관이 아니라, 여성과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두의 성평등과 노동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확대한 장관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기본소득당이 민주당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역시 정부와 협력해야 할 때는 협력하면서도 정부가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할 때는 누구보다 먼저 비판하고 싸울 수 있기를 바란다.
정부 안에 들어간 사람의 성공과 정부 밖에 남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세력의 성장이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연합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람은 다양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적 선택지가 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양성의 정치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당의 품을 더 크게 만드는 정치가 아니라, 민주당의 품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를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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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으로 출근하고 있다. 2026.8.31 ⓒ뉴스1
이재명 대통령이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을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환영할 만한 면이 있다. 1990년생의 젊은 정치인이 장관 후보자가 된 것도 의미가 있고, 세월호 참사 이후 인권과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꾸준히 이야기해 온 정치인이 성평등 정책을 책임지게 된 것도 기대할 만한 일이다. 나는 용혜인 후보자가 차별금지법 제정과 포괄적 성교육의 제도화에도 힘쓰며 성평등가족부 장관으로서 맡은 역할을 잘 해내길 바란다.
용혜인 의원에 대한 평가나 기대와 별개로, 나는 이번 인선을 보며 한국 정치가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에 보내고 있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생각하게 된다. 메시지는 꽤 분명하다.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치세력을 만들기 위해 지난한 길을 걷는 것보다 민주당 중심의 정치연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많은 정치적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이라는 것이다.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김영훈은 현재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그는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뒤 정의당에서 활동했고, 2024년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주도한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2025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선대위 노동본부장을 맡았고, 이후 이재명 정부의 초대 고용노동부 장관이 되었다.
용혜인은 2020년 민주당 주도의 더불어시민당을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고, 2024년에도 민주당 주도의 더불어민주연합을 통해 다시 국회에 들어왔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는 이재명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고, 이제 이재명 정부의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되었다.
나는 이것을 두 사람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어떤 정치적 계산을 했는지 추측할 이유도 없고, 민주당과 협력했다는 사실 자체를 비난할 이유도 없다. 연합정치는 정치의 중요한 일부다.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이 민주당과 함께해야 할 일도 많다. 극우와 싸울 때도, 민주주의를 지킬 때도, 노동권과 인권을 확대할 때도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다.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그러한 선택을 ‘합리적인 선택’이자 ‘현실적인 선택’으로 만들어버리는 정치적 유인 구조가 문제다.
독립적인 진보정당을 만들고 원내 진입을 위해 전국을 뛰어다니는 것보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비례연합에 참여하는 것이 국회에 들어갈 가능성을 높여준다. 독립적인 노동정치를 조직하는 것보다 민주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국정에 직접 참여할 가능성을 높여준다.
“민주당과 다른 정치를 만들어보자”는 선택과 “민주당과 연합해 그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선택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이고 정치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경로로 보이게 될까? 이것은 이번 정부에서 처음 생긴 문제도 아니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의 많은 인재를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후보로 영입하고, 정부와 지방정부의 정무직으로 불러들였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 출신의 사람들이 제도정치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진출의 가장 크고 안정적인 통로가 민주당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와 노동운동 출신은 더 많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문제는 그 진출의 가장 크고 안정적인 통로가 민주당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민주당의 욕심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한국의 정치제도 자체가 그렇게 작동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지역구 의원은 254명이고 비례대표 의원은 46명에 불과하다. 전체 의석의 약 15%만이 비례대표다.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을 확대한다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지만 거대 양당은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다당제를 확대하겠다던 제도는 오히려 작은 정당들을 거대정당 중심으로 줄 세우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올해 1월 헌법재판소가 비례대표 의석을 얻기 위해 정당득표율 3%를 넘도록 한 이른바 ‘3% 봉쇄조항’을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헌재는 소선거구제 중심의 현행 제도 자체가 거대정당에 유리한 상황에서 별도의 봉쇄조항까지 두는 것은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에 이중의 장벽이 되고 정치적 다양성과 선거의 대표성을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작은 정당을 향해 그저 “민주당에 기대지 말고 독립적으로 성장하라”고 말하는 것 역시 무책임하다. 정치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연합과 종속은 구분돼야 한다. 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정치가 민주당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정적으로 의석을 얻기 어렵고, 민주당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지 않고서는 국정에 참여하기 어렵다면 그것을 다당제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두 거대한 정당 사이에서 다른 정치세력이 독립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면, 사람 몇 명을 정부에 더 참여시킨다고 양당제가 다당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이 정말 연합정치와 다당제를 원한다면 자신의 품을 넓혀 다른 정치인을 데려오는 것, 지금 흔히 ‘포용의 정치’라고 불리는 것보다 자신의 권력을 나눌 수 있는 정치구조를 만드는 일에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비례성을 높이는 선거제도를 만들고, 위성정당이 다시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제도를 정비하며, 작은 정당도 시민에게 받은 지지만큼 정치적 대표성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연립정부를 만들고 싶다면 개인 몇 사람을 발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당과 정당이 정책과 권한,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공개적으로 합의하는 정치도 가능해야 한다. 연립정부란 작은 정당에서 사람 몇 명을 데려와 큰 정당의 정부에서 일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자신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목표에 합의하고 함께 책임지는 것이다. 협력할 때는 협력하지만 의견이 다를 때는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싸울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도 상대의 정치적 존립 자체를 위협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연립이다.
내가 오랫동안 다양성 운동을 통해 이야기해 온 다양성과 포함(inclusion)의 원칙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소수자 몇 명을 조직 안에 합류시키는 것만으로 그 조직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조직이 되었다거나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구조와 문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이 가진 다양성과 권력구조의 다양성은 같은 것이 아니다. 여성 한 명을 임원으로 만들었다고 성평등한 조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장애인 한 명을 채용했다고 장애인을 포함하는 조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성소수자 한 명을 대표자로 세웠다고 성소수자를 억압해 온 제도와 문화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다양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적 선택지가 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양성의 정치가 아니다
20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경기지방고용노동청에서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최승호 삼성전자 노조 공동투쟁본부 위원장, 여명구 DS(반도체 부문) 피플팀장이 손을 맞잡고 있다. ⓒ뉴시스
정치도 마찬가지다. 노동운동가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진보정당의 젊은 여성 정치인을 성평등가족부 장관으로 임명했다는 사실만으로 정치적 다양성이 확대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정치세력의 독립적인 힘은 계속 약화되는 동안 그 집단에 속한 일부 사람만 선택적으로 권력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포함(inclusion)’보다는 ‘포섭(co-optation)’에 가깝다.
포함은 “우리의 넓은 품으로 당신도 받아주겠다”는 포용적인 태도나 시혜가 아니다. 포함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채로 동등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존의 중심에 주변부 사람 몇 명을 끌어들여 중심의 질서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누가 중심이 되고 누가 주변으로 밀려나는지를 결정해 온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다양성의 정치 역시 얼굴의 다양성만을 뜻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정치적 목소리와 정치세력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어떤 사안에서는 협력하고 다른 사안에서는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서로가 정치의 주체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용혜인과 김영훈이 대통령과 민주당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장관이 아니라, 여성과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두의 성평등과 노동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확대한 장관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기본소득당이 민주당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역시 정부와 협력해야 할 때는 협력하면서도 정부가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할 때는 누구보다 먼저 비판하고 싸울 수 있기를 바란다.
정부 안에 들어간 사람의 성공과 정부 밖에 남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세력의 성장이 동시에 가능해야 한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연합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람은 다양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적 선택지가 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다양성의 정치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당의 품을 더 크게 만드는 정치가 아니라, 민주당의 품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를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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