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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김지학의 세상다양] SNS 사용 제한보다 더 필요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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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중독 이미지 ⓒpixabay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의 2024년 조사에서 만 10~19세 스마트폰 이용자의 42.6%가 ‘과의존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이를 의학적 중독으로 과장해서는 안 되지만, 많은 청소년이 사용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신호임은 분명하다.


호주는 세계 최초로 16세 미만 청소년의 SNS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시행에 들어갔다. 프랑스는 올가을 시행을 앞두고 있으며 영국, 그리스, 캐나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국가들에서도 추진 중이다.


이러한 배경들과 함께, 한 정부도 만 14세 미만 청소년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가입을 제한하고, 만 14세 이상 19세 이하에게는 추천 알고리즘과 무한 스크롤·자동 재생·‘좋아요’ 같은 과몰입 유도 장치의 노출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는 공론화와 청소년의 직접 참여를 거쳐 정책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이 문제를 개인과 가정의 책임이 아니라 ‘플랫폼의 책임’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반갑다. 그러나 규제의 중심이 청소년의 계정을 막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질문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용자들이 멈추기 어렵도록 서비스를 설계했는가’이다.


이 문제를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설명하면 가장 중요한 행위자가 사라진다. 플랫폼의 성공은 우리가 필요한 정보를 얻고 제때 나가는 데 있지 않다. 한 번이라도 더 화면을 넘기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게 하는 데 있다. 광고주가 돈을 내고 플랫폼은 우리의 주의와 시간, 행동 데이터를 수익으로 바꾼다.


무한 스크롤은 ‘여기까지’라는 끝을 지운다. 자동 재생은 다음 영상을 볼 것인지 묻지 않는다. 알림은 내가 앱을 찾기 전에 앱이 나를 부른다. ‘좋아요’와 연속 접속 보상은 인정받고 싶고 소속되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붙잡는다.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사람의 습관과 감정을 분석해 멈추기 어려운 환경을 만든다. 그런 환경에서 개인에게만 “왜 절제하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은 불공정하다.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플랫폼이 강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판결이 나왔다. 올해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민사 배심원단은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의 설계·운영상 과실과 경고 의무 위반이 케일리 글렌밀스의 피해를 일으킨 중요한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특정 게시물의 내용이 아니라 무한 스크롤·자동 재생·알림·맞춤 추천처럼 기업이 만든 기능에 책임을 물었다. 아직 항소 중인 1심 민사 평결이지만, 청소년과 가족에게 돌려지던 책임을 플랫폼의 설계로 옮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이다.


내부 문건에는 구글의 ‘2016년까지 하루 10억 시청 시간’과 메타의 ‘3개년 동안 이용시간 12% 증가’ 목표가 담겨 있었다. 메타는 청소년, 여성,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있거나 정서적으로 취약한 사람이 문제적 이용에 더 취약하다는 조사 결과도 가지고 있었다. 기업들은 누가 더 취약한지 알면서도 이용시간을 늘리는 설계를 유지했다. 취약성은 보호의 근거여야지 착취의 대상이나 책임을 떠넘길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청소년만의 문제도 아니다. 비청소년(성인)들도 알고리즘의 추천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고 각자의 ‘진실’ 안에 갇힌다. 이는 우리 사회를 서로 다른 생각에 대해 대화가 불가능한 사회로 만들고 있다. 추천을 끄고 자신이 구독한 채널, 자신에게 필요하고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검색해서 볼 권리가 모든 이용자에게 보장돼야 한다.


다만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 크고 불균등할 수 있다. 또래의 평가에 민감하고 정체성과 신체 이미지가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여성 청소년에게는 획일적인 외모 기준과 극단적 다이어트가, 남성 청소년에게는 여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해로운 남성성’을 은연중에 주입하는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제시될 수 있다.


성소수자·장애·이주배경 청소년에게 온라인은 혐오의 공간이면서, 오프라인에서 만나기 어려운 동료와 지지 공동체를 발견하는 생명선이기도 하다. SNS에는 위험만 있는 것도 가능성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전면 금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알고리즘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비추기만 하는 중립적인 거울이 아니라, 기업이 우리에게 무엇을 더 오래 보게 할지 선택해 우리의 관심의 방향까지 바꾸는 편집자다. 헬스 영상, 축구 영상, 게임 영상 같은 스포츠 영상 뒤에 여성 비하적인 연애 조언이나 스포츠 도박이, 다이어트 정보 뒤에 극단적인 식단과 성형 광고가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축구를 보면 혐오에 빠지고 게임을 하면 도박을 한다는 공포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분노·공포·조롱처럼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콘텐츠가 사람을 더 오래 붙들고 더 많은 이윤을 만들기 때문에 우선 추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복된 말이 사회 전체의 상식처럼 느껴지는 순간, 알고리즘은 민주주의의 문제가 된다.


나는 SNS와 스마트폰을 처음 사용하는 나이를 늦추는 데 동의하는 편이다. 어린 시기에 수면과 놀이, 운동, 직접 만나는 관계, 지루함과 상상, 깊이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용을 늦추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준비 기간이어야 한다. 미루어진 기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열네 살이나 열여섯 살이 되는 날 갑자기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저 그 위험이 연기된 것뿐이다.


규제가 기술적으로 완벽할 수도 없다. 부모 명의로 가입하거나 다른 서비스로 옮겨갈 수 있고, 강한 차단은 더 폐쇄적인 공간으로 청소년을 밀어낼 수 있다. 또한 연령 확인을 위해 신분증이나 얼굴 정보를 과도하게 수집하면 개인정보와 익명성을 침해한다. 정책이 청소년 보호라는 이름으로 청소년을 감시하는 시장을 키워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청소년에게도 자기결정권이 있으니 마음껏 쓰게 하자”고 말하는 것 역시 적절치 않다. 교육도 안전장치도 없이 중독을 설계한 플랫폼 앞에 혼자 세워 놓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임에 가깝다. 자기결정권은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고, 상업적 의도와 권력관계를 분석할 수 있으며, 다른 선택을 실제로 할 수 있는 시간·공간·관계가 있을 때 실질적인 권리가 된다.


정부가 우선 규제해야 할 것은 플랫폼이다. 어린이·청소년 계정에서는 개인 맞춤 추천, 자동 재생, 무한 스크롤, 연속 접속 보상, 과도한 알림을 기본적으로 꺼야 한다. 청소년의 몸에 대한 불안, 성적 호기심, 외로움과 경제적 결핍을 이용한 맞춤형 광고도 제한해야 한다. 독립적인 연구자와 공공기관이 알고리즘을 감시할 수 있도록 데이터 접근을 보장하고, 피해 신고와 구제 절차를 실제로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플랫폼 규제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청소년이 언젠가는 디지털 세계에 들어갈 것이라면 공교육은 그 세계를 해석하고 바꿀 수 있는 시민을 길러야 한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도 출처와 날짜를 확인하는 가짜뉴스 판별법을 넘어야 한다. 누가 이 메시지를 만들었는가, 어떤 몸과 삶을 정상적이고 성공적이라고 제시하는가, 누구의 목소리는 지워지는가, 이 메시지가 불러낸 공포와 분노는 누구의 이익으로 연결되는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스마트폰 사용법 교육이 아니라 세상을 해석하는 교육이다. 인권교육, 성평등교육, 다양성교육, 시민교육, 정치교육, 노동교육이 미디어 리터러시와 만나는 자리다. 무엇을 클릭하는지는 관심에 달려 있고, 관심은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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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청소년 ⓒpixabay



가정에서는 어린이·청소년인 자녀에게만 금지 명령을 내리기보다 ‘우리 집 미디어 협약’을 만들어 함께 지키는 것이 좋다. 식사 시간에는 기기를 치우기, 침실에는 휴대폰을 가져가지 않기, 영화, 드라마, 유튜브 등은 스마트폰으로 보지 않고 TV나 빔프로젝터로 보기 등의 규칙을 만들어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지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의논해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가정에 모든 책임을 맡겨서는 안 된다. 디지털 기기 없이 놀 수 있는 안전한 공공공간, 도서관과 청소년시설, 스포츠와 예술 활동, 또래 공동체, 충분한 방과후 시간과 돌봄이 있어야 한다. 여유 있는 양육자만 자녀의 사용을 늦추고 그 시간을 풍부한 경험으로 채울 수 있다면 디지털 보호마저 계급화된다. 국가가 화면을 금지하려 한다면 화면 밖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관계도 보장해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들의 손에서 스마트폰만 빼앗는다고 그들의 삶을 지킬 수는 없다.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어린이 청소년들이 아니라 그들의 불안과 외로움, 호기심과 관계 욕구를 수익으로 바꾸는 플랫폼의 구조와 다른 곳에서 연결감, 소속감, 충만함, 만족감을 느낄 수 없는 사회다. 우리가 길러야 할 것은 금지 명령에 순응하는 청소년이 아니라 미디어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타인을 해치는 메시지에 균열을 내며, 자신의 삶과 공동체를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시민이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무제한의 방임도 전면적인 통제도 아니다. 정확한 정보를 충분히 배우고, 함께 결정하며, 안전하게 시행착오를 겪고, 필요할 때 도움받을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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