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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과와 선처 요청 이후에 남은 질문들: 배재고 사건을 계기로 다시 묻는 역사, 교육, 사회정의

사과와 선처 요청 이후에 남은 질문들

배재고 사건을 계기로 다시 묻는 역사, 교육, 사회정의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배재고 야구부의 ‘탱크데이’ 응원은 단지 한 학교 운동부의 부적절한 응원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역사 왜곡 문제, 차별·혐오·폭력이 놀이가 된 온라인 문화와 청소년 문화, 그에 대한 공교육의 역할 부재,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정치권, 언론, 온라인 미디어, 처벌과 회복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상상력까지 한꺼번에 드러냈다.

배재고의 사과가 있었고, 광주일고의 선처 요청도 있었다. 이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사과와 선처 이후에야 비로소 깊게 다룰 수 있는 질문들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사용하는 “어른”이라는 표현은 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혹은 청소년들보다 성숙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아니다. 청소년들이 살아갈 사회의 언어와 제도와 문화를 만들고 유지해 온 비청소년 사회 전체를 뜻한다. 이 사건은 학생들의 잘못을 정확히 짚는 동시에, 그 학생들이 어떤 사회 속에서 그런 말을 배우게 되었는지 묻는 일이어야 한다.


배재고 야구부의 ‘탱크데이’ 사건

2026년 6월 29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열린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배재고와 광주제일고의 경기에서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이 더그아웃에서 “가야지, 가야지,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응원 구호를 외쳤다. 일부는 “탱크데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고교야구 경기 중에 상대팀 선수들의 밸런스를 깨기 위해 상대 선수들을 흔드는 말을 하곤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 사용된 말은 단순한 야유나 응원이 아니었다. 광주의 학생들이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5·18의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지난 5월 18일, 스타벅스코리아는 텀블러 광고에 ‘탱크데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탱크데이’는 온라인 극우 문화 안에서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폭력을 희화화하거나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 온 표현이다. 때로는 5·18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의 소행으로 왜곡하는 주장과 함께 소비되기도 한다. 함께 사용된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 역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국가폭력을 은폐하던 말과 겹쳐졌다. 스타벅스코리아는 사과했고, 이후 대표이사 교체까지 이어졌다. ‘각자의 생각이 다른 것’이라거나 ‘모두가 대한민국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똑같다’는 식의 말로 사태의 핵심을 흐렸지만,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역시 사과 입장을 밝혔다.

그 말은 한 달여 뒤 고교야구장의 응원 구호로 되돌아왔다. 이 사건을 배재고 야구부 학생 몇 명의 일탈로만 볼 수 없다. 물론 어떤 배경 설명을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그 말을 외친 학생들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학생들이 만들어낸 말도 아니고, 혼자 만들어낸 놀이도 아니다. 그들은 각종 미디어, 그리고 한국 사회의 문화 속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말”로 배우게 됐다. 남초 커뮤니티와 극우 커뮤니티, 쇼츠와 릴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과 유가족을 비웃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조롱하는 것이 유머로 포장되어 있는 온라인 문화, ‘멸공’이라는 낡은 용어를 다시 유행어처럼 소비하게 만든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의 언어, 대기업과 그 오너의 정치적 발언, 정치권의 역사 왜곡이 모두 이 말의 배경이다.

학생들이 외친 것은 단지 “상대팀을 흔드는 응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탱크데이’라는 표현은 광주제일고 학생들이나 광주시민들만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에게 탱크와 총칼을 들이민 국가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표현이다. 국가는 시민을 보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을 향해 폭력을 행사했다. 우리는 그 폭력을 총, 헬기, 탱크, 계엄군, 발포, 고문, 학살과 같은 말들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말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에 의해 희화화되더니, 어느새 농담이 되고 이제는 야구장의 응원이 되었다. 그 순간 야구장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청소년들이 어떤 말의 세계 속에서 자라고 있는지, 어른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어 놓았는지가 드러난 장소였다.


한 번의 일탈이 아니다

이 사건을 한 번의 일탈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도와 증언에 따르면, 배재고는 광주일고와의 경기 전에도 광주에 있는 동성고, 진흥고와의 경기에서 비슷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또한 충암고 야구부가 광주일고 선수들을 향해 “내란의 요람”이라고 외쳤다는 증언도 있다. 여기서 말해진 ‘내란’은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나 최근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는 권력형 내란의 문제를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5·18을 내란으로 부르는 말이었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의 시민들을 ‘폭도’와 ‘내란 세력’으로 몰았다. 그 왜곡을 바로잡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국가폭력의 진실을 확인하고, 희생자들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런데 그 역사가 다시 청소년들의 농담과 조롱, 응원 구호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 지식의 부족이 아니다. 단순히 “잘 몰라서 한 말”이라고만 설명할 수도 없다. 물론 지금의 청소년들이 5·18의 역사적 무게를 충분히 알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지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무지와 조롱을 결합시킨 문화가 있다. 모르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도 쉽게 조롱하는 문화. 타인의 고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편하게 웃는 문화.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다.

지금 10대와 20대의 극우화는 특정 사이트에 접속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를 넘어섰다. 일베를 하지 않는 청소년도 일베 노래를 부르고, 일베 농담을 하고, 일베 코드를 알고, 일베식 조롱의 문법을 자연스럽게 공유한다. 일베 문화는 이제 더 이상 커뮤니티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야구장으로, 교실로, 단체 채팅방으로, 유튜브 댓글로, 쇼츠의 밈으로 번져간다. 혐오가 놀이가 되고, 조롱이 응원이 되고, 역사 부정이 또래 문화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군홧발만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조롱해도 된다는 감각, 국가폭력의 희생자를 웃음거리로 삼아도 된다는 감각, 여성·장애인·성소수자·이주민·빈곤층을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돌려도 된다는 감각, 역사를 왜곡하는 말이 장난으로 소비되어도 괜찮다는 감각이 민주주의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린다.


사과와 선처 요청의 의미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배재고 야구부에 전국대회 6개월 출전정지라는 징계를 내렸다. 6개월 출전정지는 자격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경기 수를 채울 수 없을 수도 있는 등 선수 생활이 어려워질 수 있을 정도의 중징계라고 한다. 징계 결정 이후 배재고 야구부 학생, 지도자, 학부모, 교직원 등이 광주일고를 찾아 사과했고, 광주일고와 함께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광주일고는 그 사과를 받아들였고, 이후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에 대한 선처를 요청했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국가폭력을 찬양하고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표현이 발생했고, 그에 대한 사과가 이루어졌고,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사과를 받아들였고, 가해자들이 받은 징계에 대해 선처를 요청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과는 자주 부재한다. 특히 진정성 있는 사과와 용서가 일어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사과해야 할 사람이 사과하지 않거나, 사과를 하더라도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오해가 있었다”, “상처를 받았다면 유감이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는 말로 책임의 중심을 흐리는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서 배재고 학생들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고, 광주일고가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전국적인 관심 속에서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수도 있다. 반복되는 폭력에도 늘 사과를 받아줄 수밖에 없는 것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는 지적도 마땅한 지적이다. 피해자는 종종 “너그럽게 용서하는 사람”이 되도록 요구받는다. 상처받은 사람이 오히려 더 큰 도덕성과 성숙함을 보여주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주일고의 사과 수용과 선처 요청을 쉽게 소비해서는 안 된다.

사과는 말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사과는 피해자가 직접 마주한 태도, 눈빛, 언어, 몸의 자세, 이후의 변화 가능성 속에서 판단된다. 외부에서 뉴스를 본 사람들은 그 현장의 감각을 모두 알 수 없다. 광주일고는 배재고의 사과 방문을 직접 맞이했다. 사과문을 읽는 목소리를 들었고, 학생들의 표정을 보았고, 지도자와 교직원의 태도를 보았다. 그 현장에서 “원래 준비했던 멘트들이 순간 다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 나올 만큼 무언가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판단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 선처 요청이 ‘피해자들이 용서했으니 다 끝났다’고 사건을 빠르게 마무리하게 해선 안된다. 광주일고의 선처 요청은 배재고 학생들을 향한 같은 선수로서의 동료애와 연민이기도 하겠지만, 한국 사회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 학생들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는 일은 우리가 바라는 길이 아니다”라는 말은 단지 배재고를 위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정의를 바라는지, 교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사과 이후의 사회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광주일고가 용서했다고 끝나는 일은 아니다

광주일고가 사과를 받아들였고 선처를 요청했다. 이 과정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광주일고가 용서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이 사건은 광주일고만의 피해가 아니며 광주만의 피해도 아니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상처를 받은 이들은 광주일고 학생들, 교직원, 동문, 광주 시민들, 5·18 희생자와 유가족들이다. 그러나 5·18은 광주만의 역사가 아니다. 5·18은 국가가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다. 국가가 보호해야 할 시민을 향해 총을 쏘고, 탱크로 밀고, 헬기에서 조준사격을 했던 사건이다.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 전체의 상처이고, 한국 시민 모두의 역사다. 그러므로 그 사건을 농담으로 만들고 조롱의 소재로 삼는 일은 광주만을 향한 폭력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민주주의를 향한 폭력이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방향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사건을 ‘광주 사람들이 상처받았고, 광주 사람들이 용서했으니 끝났다’는 방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광주일고의 용서와 선처 요청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한국 사회 전체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용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왜 청소년들은 국가폭력의 기억을 조롱의 언어로 배우는가. 왜 혐오와 역사 왜곡은 놀이가 되는가. 왜 어른들은 학생들을 진심으로 보호하기보다 자기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는가. 왜 학교는 이런 문제를 다룰 교육적 힘을 충분히 갖지 못했는가.

나는 이러한 말들이 듣는 사람만 파괴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는 사람도 파괴한다. 타인의 고통을 조롱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그 순간 자신의 감각도 훼손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상태, 국가폭력의 희생자를 웃음거리로 삼는 상태, 사회적 소수자를 문제의 원인으로 돌리는 상태는 그 사람의 인지와 감정, 그리고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에도 깊은 손상을 남긴다. 우리는 가해 학생들을 “괴물”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배운 언어와 감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분명히 말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회는 결국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혐오가 놀이가 되는 사회

이 사건은 역사 왜곡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혐오가 놀이가 되는 사회의 문제다. ‘여성 때문에 힘들다, 장애인 때문에 불편하다, 성소수자가 사회를 망친다, 이주민이 일자리를 빼앗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았다, 지방은 뒤처졌다’와 같은 말들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구조를 가진다. 구조적 억압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 책임을 사회적 소수자나 특정 지역, 특정 집단에게 돌린다. 

청소년들이 이런 말을 단지 “웃기려고” 한다고 해서 가볍게 볼 수는 없다. 혐오는 처음부터 거대한 이념의 얼굴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혐오는 농담으로 등장한다. 밈으로 등장한다. 친구들끼리의 장난으로 등장한다. “왜 이렇게 예민하냐”는 말과 함께 등장한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에게는 “선비충”, “진지충”, “프로불편러”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렇게 혐오는 방어막을 얻는다. 말하는 사람은 “장난이었다”고 빠져나가고, 상처받은 사람은 “예민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이 사건은 단순히 ‘나쁜 말을 했다’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말이 웃음이 되고, 어떤 고통이 장난이 되고, 어떤 사람이 조롱의 대상이 되는지를 정하는 문화의 문제다.

이것은 오래된 극우 정치의 전략이기도 하다. 역사 왜곡 세력은 늘 진실을 부정하는 동시에 조롱을 활용해 왔다. 5·18을 폭동으로 부르고, 세월호 참사를 조롱하고,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들을 희화화하고, 여성과 성소수자와 장애인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말들은 모두 공통된 정동을 만든다. 그 정동은 “나는 속지 않는다”, “나는 너희의 위선을 꿰뚫어 본다”, “나는 약자를 보호한다는 말 뒤에 숨은 권력의 거짓말을 안다”는 감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감각은 권력을 향하지 않는다. 더 약한 사람들에게 향한다. 구조를 향하지 않고 피해자를 향한다. 국가폭력과 자본과 정치의 책임을 묻는 대신, 이미 상처받은 사람들을 다시 조롱한다.

이런 문화가 10대와 20대 사이에서 강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청소년과 청년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의 결과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어른들의 삶을 아주 정확히 본다. 말로는 민주화와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부동산 투기와 사교육 경쟁, 각자도생과 능력주의를 삶의 원리로 삼는 어른들, 인권을 말하면서도 자기 자녀의 입시와 계급 이동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어른들,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를 말하면서도 차별금지법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한 정치. 청소년들은 그 이율배반을 본다. 그리고 냉소한다.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다 똑같다”, “진보도 결국 내로남불이다”, “정의와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도 결국 말뿐이다”라는 냉소가 퍼진다.

그 냉소의 빈자리를 극우와 반페미니즘, 혐오의 언어가 채운다. “공정한 시험으로 경쟁하면 된다”는 말은 구조적 불평등을 지우고, 개인 간 경쟁만 남긴다. 그렇게 공정 담론은 불평등한 출발선과 과정을 지우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게 만든다. 반페미니즘은 청년 남성의 불안과 상실감을 여성 탓으로 돌린다. 반이주민 정서는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복지의 부재를 이주민 탓으로 돌린다. 역사 왜곡은 민주주의의 상처와 국가폭력의 책임을 피해자 탓으로 돌린다. 그렇게 각자도생의 사회는 더 나빠지고, 사람들은 더 외로워지고, 취약한 사람들은 더 위험해진다.


어른들은 무엇을 했는가

배재고 사건 이후 충격적이었던 장면들 중 하나는 배재고 앞에 놓인 근조화환과 응원화환이었다. 사건의 직접 당사자인 배재고와 광주일고가 사과와 화해의 과정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에, 어떤 이들은 배재고는 죽었다며 배재고 앞에 근조화환을 보냈다. 어떤 이들은 배재고 학생들이 받은 징계가 과하다며 배재고 앞에 응원화환을 보냈다. 정치인들도 이 흐름에 올라탔다. 나는 이것을 미숙한 어른들의 사회가 청소년들을 다시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장면으로 보았다. 배재고 학생들의 행위는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 잘못은 어른들이 만든 문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작 어떤 어른들은 책임을 함께 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을 이용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징계 수위에 대한 토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말이 피해의 의미를 지우고, 5·18 조롱의 심각성을 흐리고, 배재고를 정치적 상징으로 세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학생 보호가 아니다. 그것은 청소년을 이용하는 일이다. 특히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이 이런 사건을 자기 정치의 무대로 삼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자신의 지역구의 보수적 정서에 기대어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메시지, ‘우리가 너희를 지켜주겠다’는 식의 진영 정치, 폭력을 옹호하는 표현, 5·18과 광주에 대한 혐오표현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과도한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로 몰아가는 언어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준다. ‘우리가 한 말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었나 보다.’ ‘힘 있는 사람들도 우리 편을 들어준다.’ ‘5·18을 조롱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장난이었는데, 정치적으로 공격당한 것이다.’ 이런 신호는 반성과 배움의 가능성을 약화시킨다.

학생들을 진심으로 보호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말해야 한다. 그 말이 누구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 말의 역사적 맥락을 배울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공동체적 절차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영원히 낙인찍히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교육이다.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보호가 아니다. 잘못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보호다.

배재고 앞에 놓인 화환은 그런 의미에서 교육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쟁의 언어였다. 사과와 회복의 과정에 뛰어들어 피해자와 가해자, 학생과 학교, 광주와 서울, 민주주의와 역사교육의 문제를 다시 편 가르기의 소재로 만든 행위였다. 학생들을 보호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을 더 거친 정치의 전장으로 끌어들인 행위였다.


공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이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민주시민교육, 인권교육, 역사교육의 필요성을 말한다. 그러나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그 교육이 왜 공교육의 핵심이어야 하는지, 교사들이 그 교육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까지 말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 인권교육, 성평등교육, 정치교육, 노동교육, 역사교육, 다양성훈련은 정권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주변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축소되거나 이름이 바뀌거나 학교 현장에서 밀려나는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공동체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할 기본 역량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은 선거일에 투표하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권리와 타인의 권리를 이해하고, 권력의 작동 방식을 읽고, 차별과 혐오를 구별하고, 역사적 상처를 기억하고, 노동과 돌봄의 가치를 알고, 갈등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정치교육도 필요하다. 정치교육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게 만드는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정당 선전과 가장 멀리 있는 교육이다. 정치교육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시민이 어떻게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지, 법과 제도가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지, 공적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배우는 교육이다. 정치가 멸칭이 된 사회일수록 정치교육은 더 필요하다. 정치가 혐오와 조롱, 진영 싸움으로만 소비될수록 민주주의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역사교육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암기 과목이 아니다. 역사는 현재를 읽는 힘이다. 5·18을 배운다는 것은 단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외우는 것이 아니다. 국가폭력이 무엇인지, 시민 저항이 무엇인지, 언론 왜곡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왜 피해자에게 오랫동안 침묵이 강요되었고 낙인이 주어졌는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왜 중요한지, 기억이 왜 민주주의의 조건인지 배우는 것이다. 제주4·3, 국가보안법의 피해,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장애인 시설 수용, 성소수자와 이주민에 대한 국가적 배제의 역사,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도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교사들은 이 교육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평등, 페미니즘,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5·18, 4·3, 세월호, 이태원 참사를 언급하면 곧바로 “정치적이다”, “편향됐다”, “선생님 페미냐”는 말이 따라온다. 학생이 집에 가서 이야기하면 학부모 민원이 들어온다. 조직화된 민원은 학교 업무를 마비시킨다. 교사 한 사람이 하루에 수십 통, 수백 통의 항의 전화를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교장과 교감, 교육청과 교육부가 교사를 지켜주지 않으면 교사는 혼자 남는다. 어떤 교사들은 정신과 약을 먹고, 병가를 내고, 학교를 떠난다. 더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 교사의 자질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교사 개인에게 ‘용기 내서 가르치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교사가 안심하고 교육해야 할 것을 교육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학교장이 교육의 가치를 분명히 지지해야 한다. 교육청은 민원 폭탄 앞에서 교사를 혼자 두지 않아야 한다. 교육부는 인권교육과 역사교육, 성평등교육과 시민교육이 공교육의 핵심 가치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공교육의 방향을 다시 세워야 한다. 공교육은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을 길러내는 장치가 아니어야 한다. 공교육은 민주주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토대다. 아이들이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지 않는 시민으로 자라게 하는 일, 권력과 폭력을 구별하는 일, 구조적 불평등을 읽는 일, 혐오에 휩쓸리지 않는 일,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 공교육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왜 필요한가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차별이 무엇인지, 혐오표현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필요하다. 법은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지만, 공동체가 무엇을 용인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세운다.

차별금지법은 혐오표현을 하나하나 직접 처벌하는 만능의 처벌법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은 ‘표현’ 자체를 일반적으로 금지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배재고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은 이런 사건을 줄이고,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공동체가 무엇을 기준으로 대응해야 하는지를 세우는 중요한 기본법이다.

차별금지법은 차별이 무엇인지, 어떤 말과 행동이 누군가의 평등한 참여를 가로막는지, 학교와 공동체가 어떤 기준으로 대응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 차별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분명해질수록, 차별을 조장하고 선동하고 정당화하는 말도 힘을 잃는다. 혐오표현은 결국 차별을 조장하거나 정당화하거나 선동하는 말이다. “차별하면 안 된다”는 기준이 학교와 사회에 분명히 자리 잡으면, “누군가는 모욕해도 된다”, “특정 지역이나 집단은 조롱해도 된다”, “역사적 피해자는 놀림의 대상이 되어도 된다”는 말은 지금보다 훨씬 더 쉽게 제지될 수 있다.

특히 학교와 같은 공간에서는 어떤 말이 단순한 의견 표명에 그치지 않는다. 학교는 학생들이 생활하고 배우고 관계를 맺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특정 지역, 역사적 피해, 성별, 장애,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이주 배경, 경제적 조건 등을 이유로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모욕하는 말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단지 말이 아니라 차별적 환경을 만드는 행위가 된다. 차별금지법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학교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어떤 교육과 예방 조치를 마련해야 하는지, 피해를 어떻게 구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스포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학교운동부, 프로스포츠, 생활체육, 응원문화, 관중문화 안에서 어떤 말과 행동이 용납될 수 없는지 기준을 만드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물론 차별금지법이 없어도 스포츠계 내부 규범은 만들 수 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학교체육, 프로스포츠 단체, 교육청과 학교는 당장이라도 혐오표현과 차별적 응원, 역사적 피해자 조롱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차별금지법은 개별 사건 하나하나를 해결하는 처벌법이라기보다, 우리 사회가 차별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방향으로 줄여나갈 것인지 정하는 기본법이다. 배재고 사건을 차별금지법 하나로 막을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차별금지법이 있는 사회였다면 학교와 스포츠계는 이 문제를 훨씬 더 분명한 기준 속에서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차별과 혐오가 왜 문제인지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을 것이고, 학교는 혐오표현을 단순한 장난이나 응원문화로 넘기지 않을 근거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며, 스포츠 단체는 재발 방지 규범을 만드는 데 더 강한 사회적 기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차별금지법으로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다. 차별금지법 제정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차별을 금지하는 사회적 기준을 세우고, 혐오표현이 힘을 얻지 못하는 학교와 경기장과 공동체를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시민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육은 학교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역사 왜곡은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고 무섭고 흥미로운 콘텐츠로 교과서보다 빠르게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단체 채팅방, 게임 채팅, 댓글로 퍼지며 청소년과 청년의 정치적 감각을 형성한다. 극우는 이미 이 경로를 잘 알고 있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 조롱 섞인 밈, 분노를 건드리는 문장, 피해자와 약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편집이 빠르게 퍼진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단지 “혐오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 왜 사람들이 혐오에 끌리는지, 왜 사회적 불안을 약자 탓으로 돌리게 되는지, 어떤 구조가 우리를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지 알고 접근해야 한다. 혐오가 유통되는 경로를 이해하고, 그 경로 안에 다른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다른 해석과 적용이 가능한 관점과 감각을 기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다양성훈련이 이러한 관점과 감각을 기르는 데 탁월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다양성훈련은 서로의 다른 경험과 생각에 대해 대화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시간이다. 머리로만 배우는 교육이 아니라 삶과 사회를 몸으로, 감각으로, 경험으로 배우는 교육이다. 다양성훈련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권력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내가 당연하게 여긴 기준이 누구를 배제했는지, 어떤 말이 누구에게는 폭력이 되는지,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듣고 응답할 수 있는지 배우는 훈련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감각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공감은 선천적 성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길러야 할 역량이다. 역사적 기억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배제와 포함의 감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청소년들을 비난하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 청소년들은 이미 우리가 만든 사회의 언어 속에서 자라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을 계기로 해야 할 일은 ‘요즘 애들이 문제다’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언어와 어떤 문화를 만들었는가’라고 자문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물어야 한다. ‘혐오와 역사 왜곡이 놀이가 되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물어야 한다.


처벌은 필요하지만, 처벌만으로는 부족하다

배재고 야구부에 대한 징계를 두고도 의견이 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6개월 출전정지가 너무 과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더 강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징계 수위가 늘 격렬한 논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사람들이 ‘이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폭력, 학교폭력, 혐오표현, 국가폭력 피해자 조롱, 직장 내 괴롭힘, 차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가해자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피해자가 회복되고, 공동체가 바뀌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믿지 못한다. 당연하다. 너무 많은 사건에서 사과는 형식적이었고, 피해자는 회복되지 못했으며, 가해자는 다시 돌아왔고, 공동체는 바뀌지 않았다. 많은 경우 피해자가 떠나게 된다.

그 속에서 정의는 점점 ‘가해자를 없애버리는 것’으로 좁아졌다. 정의가 실현되는 방법은 가해자를 영원히 격리하는 것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다시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학교에서 쫓아내야 한다, 직장에서 잘라야 한다, 감옥에 보내야 한다, 더 심하게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몰아붙여야 한다는 방식으로 정의가 상상된다. 이것은 사람들이 잔인해서만은 아니다. 다른 길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고, 가해자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없고, 공동체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없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을 때, 사회가 상상할 수 있는 정의는 제거와 추방뿐이다.

그러나 제거와 추방만으로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지 않는다. 물론 책임은 필요하다. 징계도 필요하다. 잘못의 무게를 공동체가 분명히 말하는 절차도 필요하다. 그러나 처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한다. 처벌이 회복으로 이어져야 한다. 처벌이 재발 방지로 이어져야 한다. 처벌이 교육과 성찰로 이어져야 한다. 처벌이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가해자를 하나씩 제거하면서도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사회에 계속 머물게 된다. 처벌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책임을 다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책임을 더 깊게 묻기 위해서는 처벌 이후의 교육, 회복, 재발 방지 절차가 필요하다.

피해 회복은 단순히 “괜찮다”는 말을 듣는 일이 아니다. 피해자가 겪은 모욕과 두려움이 공적으로 인정되고, 다시 안전하게 경기하고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며, 공동체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제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가해자의 반성 역시 미안하다는 감정의 표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무엇을 잘못 배웠는지,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앞으로 어떤 말과 행동을 다르게 선택할 것인지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배재고 사건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징계가 세냐 약하냐”만이 아니다. 배재고 학생들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과연 광주일고 학생들은 회복되었는가. 무엇이 어떻게 회복되었는가. 배재고는 학교 전체의 역사교육과 인권교육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고교야구의 조롱 응원 문화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와 학교운동부 문화는 어떤 기준을 세울 것인가. 정치권과 언론은 이 사건을 이용하는 대신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공교육은 이런 사건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

선처는 책임 면제가 아니다. 선처는 망각이 아니다. 선처는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이 아니다. 선처는 오히려 더 어려운 길이다. 잘못을 분명히 인정하되, 그 사람을 영원히 그 잘못 안에 가두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피해의 의미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가해자가 책임을 지고 다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열어두는 선택이다. 그 선택이 가능하려면 공동체는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사과 이후의 교육, 피해 회복, 재발 방지, 공동체 성찰, 제도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

배재고 사건은 한국 사회의 역사가 어떻게 기록되고 어떻게 기억되었는지, 한국 사회가 어떤 기억과 감각을 잃어가고 있는지, 어쩌다 혐오가 놀이가 되었는지, 청소년들이 어떤 정치적·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는지, 공교육이 무엇을 놓쳤는지, 어른들이 어떤 방식으로 청소년을 이용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보고 싶다.

첫째, 사건이 터진 뒤에야 후회하고 분노하는 사회가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5·18, 제주4·3, 세월호, 이태원 참사의 기억은 특정 진영의 역사교육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민교육이다.

둘째, 차별과 혐오를 개인의 인성 문제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 혐오는 억압의 구조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사회적 소수자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빈곤층, 비서울지역, 학력과 사회경제적 계급의 경계에 놓인 사람들을 향한 혐오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인권교육, 성평등교육, 노동교육, 정치교육, 다양성훈련으로 이 구조를 읽는 힘을 길러야 한다.

셋째, 교사들이 안심하고 사회구조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교사를 민원 앞에 홀로 세워두면서 좋은 교육을 기대할 수는 없다. 교육부와 교육청, 학교장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분명히 지지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이 사회가 누구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약속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넷째, 어른들은 청소년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을 한 학생들을 영원히 낙인찍어서는 안 되지만, 그 잘못을 응원하거나 피해의 의미를 지워서도 안 된다. 학생을 보호한다는 말은 학생이 책임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학생을 보호한다는 것은 책임질 수 있도록 돕고, 배울 수 있도록 돕고,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다섯째, 처벌을 넘어 회복을 상상해야 한다. 피해자가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 가해자가 책임지고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 공동체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 믿음은 말로 생기지 않는다. 실제 절차와 제도, 교육과 문화가 있어야 생긴다. 우리가 그런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면, 정의는 계속 격리, 제거, 추방의 언어로만 상상될 것이다.

광주의 5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이 광주가 계속 상처를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한국 사회 전체가 그 기억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 광주가 다시 너른 용서와 공적인 언어를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그 용서를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용서가 가능하도록 만든 고통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고, 다시는 광주가 그런 성숙함을 강요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사과와 선처 요청 이후,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사회의 몫이다. 누구도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 자신이 속한 그룹만으로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사과와 선처 이후,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곳은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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