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루이 서루: 인사이드 더 매노스피어>를 보고 나면 ‘저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누가 믿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몸 자랑과 돈 자랑을 하며 팔로워들을 모으고,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을 때리며, 여성을 식기세척기라고 부르는 모습. “진짜 남자”는 강하고 여성을 통제해야 하는데, 페미니즘이 남성을 약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저 기괴하고 황당한 남성 인플루언서들의 세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이 다큐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매노스피어, 즉 남성우월주의적 온라인 생태계의 입구는 대개 노골적인 여성혐오가 아니다. 입구에는 운동, 돈, 자기계발, 연애 조언, 남자가 되는 법 같은 말들이 놓여 있다.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문턱이 상당히 낮다. “너도 성공할 수 있다”, “시스템에서 벗어나라”, “진짜 남자가 되어라”라는 말은 불안한 청소년과 청년에게 강력하게 들린다. 노동으로는 집을 살 수 없고, 공부만으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며, 관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이들은 하나의 해석을 제공한다. 문제는 그 해석이 구조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불평등, 노동 착취, 교육 경쟁, 돌봄의 부재를 보게 하는 대신, 분노의 방향을 여성에게 돌린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루이 서루: 인사이드 더 매노스피어> ⓒ넷플릭스
이 세계는 “이상한 남자 몇 명”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들의 불안과 외로움, 플랫폼의 수익 구조, 성공팔이 자기계발 산업, 반페미니즘 정치, 그리고 혐오를 조직하는 알고리즘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생태계다.
해외 매노스피어의 언어는 대체로 “빨간 약”의 언어다. 페미니즘과 평등 담론에 속지 말고 진실에 눈뜨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진실은 단순하다. 여성은 상위 남성, 이른바 ‘알파 남성’만 원한다. 알파 남성들이 여성들과의 연애·섹스·결혼의 기회를 독점한다. 남성은 원래 지배해야 한다. 여성은 겉으로는 독립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강한 남성의 통제와 리드를 원한다. 남성의 강함과 남성성을 억누르는 세력이 있다. 여성은 젊음과 외모만으로 가치를 가진다. 반면 남성은 가치 없이 태어나기 때문에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말들은 과학, 진화심리학, 경제학 등으로 포장되어 유통된다. 실제로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는 외모, 돈, 경쟁, 서열을 통해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말은 완전히 낯선 거짓말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차별적 현실을 재조립한 말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남성의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면서 그 고통을 다시 여성혐오와 시장의 상품으로 바꾼다.
이 지점에서 한국 사회는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다. 한국의 매노스피어는 미국식 근육질 남성성이나 포르노 산업과 완전히 같은 얼굴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시험중심의 “공정”의 언어로 번역된다. 학교 시험, 대학 입시, 취업, 연애를 모두 경쟁의 장으로 경험해 온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이 언어는 매우 익숙하고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공부도 잘하고 시험도 잘 보는데 왜 아직 여성정책이 필요하냐는 말, 군대는 남자만 가는데 왜 남성이 차별받는 현실은 말하지 않느냐는 말, 할당제와 여성가족부가 남성의 기회를 빼앗는다는 말. 이 언어는 겉으로는 합리적 문제 제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불평등을 지우고 여성과 다른 사회적 소수자를 ‘내 몫을 빼앗아가는 존재’로 만든다.
그 결과, 학교와 온라인 공간에서 과거에는 낡은 농담처럼 보였던 말들이 새롭게 유행한다. ‘여성의 방은 주방이다’, ‘제육이나 볶아와라’와 같은 말들, 여성을 성적 도구로 환원하는 말, 성폭력과 디지털 성범죄를 장난처럼 소비하는 문화, 딥페이크 성범죄를 놀이처럼 여기는 감각이 퍼진다. 문제는 표현의 거침이 아니다. 더 깊은 문제는 타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느끼는 감각이 무너진다는 데 있다. 혐오 표현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시민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과정이다. 반복해서 웃고, 공유하고, 따라 하다 보면 폭력은 농담이 되고, 농담은 문화가 되고, 문화는 세계관이 된다.
우리는 이 현상을 남성 청소년과 청년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물론 폭력과 혐오는 분명히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너희가 문제다”라는 말만으로는 이 구조를 바꿀 수 없다. 많은 남성들이 실제로 불안하다. 경쟁은 심해졌고, 노동은 불안정하며, 미래는 좁아졌다. 그런데 그 불안을 해석할 공적 언어가 약해졌다. 노동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시민사회운동은 분명히 존재해 왔지만, 그것이 오늘의 10대와 20대 남성에게 “내 이야기”로 들리지 않으면서 혐오 산업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페미니즘 남초 온라인 문화는 바로 그 틈을 파고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노를 사회구조적 관점으로 번역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군대 문제는 여성이 이득을 보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특정 시민의 시간, 노동, 에너지, 삶을 정당한 대가 없이 착취하는 문제다. 남성이 위험한 일터에서 더 많이 죽는 문제는 여성이 편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가 노동자의 생명을 값싸게 다루는 문제다. 연애와 관계에서 느끼는 좌절은 여성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친밀성마저 외모와 경제력의 경쟁으로 만든 사회의 문제다. 남성의 고통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이 여성혐오로 번역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이런 지점들을 성폭력예방교육, 성교육, 성평등교육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질문하시는 분들이 많다.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린다. 첫째, 성별만 이야기하는 교육은 부족하다. 성별 구분만으로 교육이 진행되면, 남성 참여자들은 자신이 언제나 특권집단(Privileged Group)의 위치로만 호명된다고 느끼기 쉽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살지 않는다. 나이, 가족 배경, 사회경제적 계급, 학력, 학벌, 지역, 장애, 질병, 노동 조건 등 수많은 정체성과 그에 따른 권력이 서로 교차한다. 어떤 자리에서는 특권을 갖고, 어떤 자리에서는 억압을 경험한다. 교육은 바로 이 복잡한 위치를 사유하게 해야 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어떤 역할을 강요하는가”, “우리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어떤 일을 경험하고 있는가”를 함께 묻는 교육이어야 한다.
둘째, 강연만으로는 부족하다. 혐오의 세계관은 정보 부족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소속감, 인정 욕구, 외로움, 분노, 수치심을 먹고 자란다. 그렇다면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시간을 넘어 자기 경험을 말하고, 감정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장이어야 한다. 빠르게 판단하고 조롱하는 알고리즘의 리듬에서 벗어나, 느리게 생각하고 연결되는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남성들에게는 약함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드러내도 조롱받지 않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게임과 커뮤니티 밖에서, 경쟁과 서열 밖에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정치와 언론의 책임도 크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혐오는 표가 되고 돈이 된다. 플랫폼은 오래 머물게 하는 콘텐츠를 밀어주고, 정치인은 분노를 조직해 지지율로 바꾸며, 언론은 갈등을 자극적인 장면으로 팔아넘긴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청소년에게만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길러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책임, 플랫폼의 책임, 정치의 책임을 함께 물어야 한다. 혐오를 공론장의 언어로 승인하는 정치인을 비판하고, 디지털 성범죄와 온라인 괴롭힘을 장난이 아니라 폭력으로 다루는 제도적 대응도 강화해야 한다.
루이 서루의 다큐가 보여준 매노스피어는 바다 건너 먼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한국의 교실, 단톡방, 유튜브 쇼츠, 정치 언어, 시험중심의 공정담론 안에 다른 얼굴로 들어와 있다. 해외에서는 “진짜 남자 되기”라는 언어로, 한국에서는 “역차별과 공정”이라는 언어로 작동할 뿐이다. 핵심은 같다. 구조가 만든 불안을 소수자에 대한 분노로 바꾸고, 그 분노를 다시 돈과 권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남성들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되, 그 고통이 여성을 향한 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에게 혐오보다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공해야 한다.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온 노동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평화운동의 언어가 오늘의 남성 청소년과 청년들에게도 자기 삶을 해석하는 언어로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경쟁이 아니라 돌봄, 조롱이 아니라 경청, 각자도생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남성들과 함께 이 말을 나눠야 한다. 당신이 해방될 길은 누군가를 다시 아래로 밀어내는 데 있지 않다. 우리 모두를 억압하는 구조를 함께 바꾸는 데 있다.

지난해 경기 안양시의 한 고등학교 체육대회 중 학생들이 든 여성 혐포 손 피켓 ⓒ온라인 커뮤니티
매노스피어가 파는 빨간 약은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분노를 상품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감옥이다. 우리가 건네야 할 것은 다른 약이 아니라 다른 관계다. 서로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언어를 배우며,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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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루이 서루: 인사이드 더 매노스피어>를 보고 나면 ‘저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누가 믿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몸 자랑과 돈 자랑을 하며 팔로워들을 모으고,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을 때리며, 여성을 식기세척기라고 부르는 모습. “진짜 남자”는 강하고 여성을 통제해야 하는데, 페미니즘이 남성을 약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저 기괴하고 황당한 남성 인플루언서들의 세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이 다큐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매노스피어, 즉 남성우월주의적 온라인 생태계의 입구는 대개 노골적인 여성혐오가 아니다. 입구에는 운동, 돈, 자기계발, 연애 조언, 남자가 되는 법 같은 말들이 놓여 있다.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문턱이 상당히 낮다. “너도 성공할 수 있다”, “시스템에서 벗어나라”, “진짜 남자가 되어라”라는 말은 불안한 청소년과 청년에게 강력하게 들린다. 노동으로는 집을 살 수 없고, 공부만으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며, 관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이들은 하나의 해석을 제공한다. 문제는 그 해석이 구조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불평등, 노동 착취, 교육 경쟁, 돌봄의 부재를 보게 하는 대신, 분노의 방향을 여성에게 돌린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루이 서루: 인사이드 더 매노스피어> ⓒ넷플릭스
이 세계는 “이상한 남자 몇 명”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들의 불안과 외로움, 플랫폼의 수익 구조, 성공팔이 자기계발 산업, 반페미니즘 정치, 그리고 혐오를 조직하는 알고리즘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생태계다.
해외 매노스피어의 언어는 대체로 “빨간 약”의 언어다. 페미니즘과 평등 담론에 속지 말고 진실에 눈뜨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진실은 단순하다. 여성은 상위 남성, 이른바 ‘알파 남성’만 원한다. 알파 남성들이 여성들과의 연애·섹스·결혼의 기회를 독점한다. 남성은 원래 지배해야 한다. 여성은 겉으로는 독립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강한 남성의 통제와 리드를 원한다. 남성의 강함과 남성성을 억누르는 세력이 있다. 여성은 젊음과 외모만으로 가치를 가진다. 반면 남성은 가치 없이 태어나기 때문에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말들은 과학, 진화심리학, 경제학 등으로 포장되어 유통된다. 실제로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는 외모, 돈, 경쟁, 서열을 통해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말은 완전히 낯선 거짓말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차별적 현실을 재조립한 말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남성의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면서 그 고통을 다시 여성혐오와 시장의 상품으로 바꾼다.
이 지점에서 한국 사회는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다. 한국의 매노스피어는 미국식 근육질 남성성이나 포르노 산업과 완전히 같은 얼굴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시험중심의 “공정”의 언어로 번역된다. 학교 시험, 대학 입시, 취업, 연애를 모두 경쟁의 장으로 경험해 온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이 언어는 매우 익숙하고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공부도 잘하고 시험도 잘 보는데 왜 아직 여성정책이 필요하냐는 말, 군대는 남자만 가는데 왜 남성이 차별받는 현실은 말하지 않느냐는 말, 할당제와 여성가족부가 남성의 기회를 빼앗는다는 말. 이 언어는 겉으로는 합리적 문제 제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불평등을 지우고 여성과 다른 사회적 소수자를 ‘내 몫을 빼앗아가는 존재’로 만든다.
그 결과, 학교와 온라인 공간에서 과거에는 낡은 농담처럼 보였던 말들이 새롭게 유행한다. ‘여성의 방은 주방이다’, ‘제육이나 볶아와라’와 같은 말들, 여성을 성적 도구로 환원하는 말, 성폭력과 디지털 성범죄를 장난처럼 소비하는 문화, 딥페이크 성범죄를 놀이처럼 여기는 감각이 퍼진다. 문제는 표현의 거침이 아니다. 더 깊은 문제는 타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느끼는 감각이 무너진다는 데 있다. 혐오 표현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시민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과정이다. 반복해서 웃고, 공유하고, 따라 하다 보면 폭력은 농담이 되고, 농담은 문화가 되고, 문화는 세계관이 된다.
우리는 이 현상을 남성 청소년과 청년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물론 폭력과 혐오는 분명히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너희가 문제다”라는 말만으로는 이 구조를 바꿀 수 없다. 많은 남성들이 실제로 불안하다. 경쟁은 심해졌고, 노동은 불안정하며, 미래는 좁아졌다. 그런데 그 불안을 해석할 공적 언어가 약해졌다. 노동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시민사회운동은 분명히 존재해 왔지만, 그것이 오늘의 10대와 20대 남성에게 “내 이야기”로 들리지 않으면서 혐오 산업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반페미니즘 남초 온라인 문화는 바로 그 틈을 파고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노를 사회구조적 관점으로 번역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군대 문제는 여성이 이득을 보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특정 시민의 시간, 노동, 에너지, 삶을 정당한 대가 없이 착취하는 문제다. 남성이 위험한 일터에서 더 많이 죽는 문제는 여성이 편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가 노동자의 생명을 값싸게 다루는 문제다. 연애와 관계에서 느끼는 좌절은 여성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친밀성마저 외모와 경제력의 경쟁으로 만든 사회의 문제다. 남성의 고통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이 여성혐오로 번역되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이런 지점들을 성폭력예방교육, 성교육, 성평등교육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 질문하시는 분들이 많다.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린다. 첫째, 성별만 이야기하는 교육은 부족하다. 성별 구분만으로 교육이 진행되면, 남성 참여자들은 자신이 언제나 특권집단(Privileged Group)의 위치로만 호명된다고 느끼기 쉽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의 정체성으로만 살지 않는다. 나이, 가족 배경, 사회경제적 계급, 학력, 학벌, 지역, 장애, 질병, 노동 조건 등 수많은 정체성과 그에 따른 권력이 서로 교차한다. 어떤 자리에서는 특권을 갖고, 어떤 자리에서는 억압을 경험한다. 교육은 바로 이 복잡한 위치를 사유하게 해야 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어떤 역할을 강요하는가”, “우리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어떤 일을 경험하고 있는가”를 함께 묻는 교육이어야 한다.
둘째, 강연만으로는 부족하다. 혐오의 세계관은 정보 부족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소속감, 인정 욕구, 외로움, 분노, 수치심을 먹고 자란다. 그렇다면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시간을 넘어 자기 경험을 말하고, 감정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장이어야 한다. 빠르게 판단하고 조롱하는 알고리즘의 리듬에서 벗어나, 느리게 생각하고 연결되는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남성들에게는 약함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드러내도 조롱받지 않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게임과 커뮤니티 밖에서, 경쟁과 서열 밖에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정치와 언론의 책임도 크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혐오는 표가 되고 돈이 된다. 플랫폼은 오래 머물게 하는 콘텐츠를 밀어주고, 정치인은 분노를 조직해 지지율로 바꾸며, 언론은 갈등을 자극적인 장면으로 팔아넘긴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청소년에게만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길러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책임, 플랫폼의 책임, 정치의 책임을 함께 물어야 한다. 혐오를 공론장의 언어로 승인하는 정치인을 비판하고, 디지털 성범죄와 온라인 괴롭힘을 장난이 아니라 폭력으로 다루는 제도적 대응도 강화해야 한다.
루이 서루의 다큐가 보여준 매노스피어는 바다 건너 먼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한국의 교실, 단톡방, 유튜브 쇼츠, 정치 언어, 시험중심의 공정담론 안에 다른 얼굴로 들어와 있다. 해외에서는 “진짜 남자 되기”라는 언어로, 한국에서는 “역차별과 공정”이라는 언어로 작동할 뿐이다. 핵심은 같다. 구조가 만든 불안을 소수자에 대한 분노로 바꾸고, 그 분노를 다시 돈과 권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남성들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되, 그 고통이 여성을 향한 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청소년과 청년에게 혐오보다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공해야 한다.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온 노동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평화운동의 언어가 오늘의 남성 청소년과 청년들에게도 자기 삶을 해석하는 언어로 닿을 수 있어야 한다. 경쟁이 아니라 돌봄, 조롱이 아니라 경청, 각자도생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남성들과 함께 이 말을 나눠야 한다. 당신이 해방될 길은 누군가를 다시 아래로 밀어내는 데 있지 않다. 우리 모두를 억압하는 구조를 함께 바꾸는 데 있다.
지난해 경기 안양시의 한 고등학교 체육대회 중 학생들이 든 여성 혐포 손 피켓 ⓒ온라인 커뮤니티
매노스피어가 파는 빨간 약은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분노를 상품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감옥이다. 우리가 건네야 할 것은 다른 약이 아니라 다른 관계다. 서로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언어를 배우며,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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