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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김지학의 세상다양] 혐오표현이 ‘해도 되는 말’이 되는 순간: 공동체의 안전을 무너뜨리는 혐오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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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 사과 기자회견 마친 정용진 회장 ⓒ뉴시스


최근 스타벅스코리아의 ‘탱크 데이’ 사건은 단순한 기업의 실수로 넘길 수 없다. 5월 18일, 신세계그룹 계열사가 운영하는 스타벅스코리아는 텀블러 판촉 행사에 ‘Tank Day’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국가폭력의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바로 그날, 탱크를 마케팅 언어로 꺼낸 것이다. 여기에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까지 더해졌다. 의도 여부와 별개로, 이것은 역사적 국가폭력의 기억을 상업적 농담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특히 SNS에서 ‘멸공’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의 사회적 위치까지 고려하면, 이 사건은 단순한 홍보 문구의 문제가 아니다. 영향력 있는 인물과 기업의 말은 사회적 허가가 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익명으로 숨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얼굴과 이름을 걸고 공적인 장소에서 해도 되는 말처럼 힘을 얻는다. 역사 왜곡과 조롱은 그렇게 ‘해도 되는 말’이 되고, ‘해도 되는 말’은 다시 혐오와 폭력의 문턱을 낮춘다.


정용진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통해 책임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각자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말로 설명하는 순간, 문제의 핵심은 흐려진다. ‘탱크 데이’와 ‘책상에 탁’은 서로 다른 생각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폭력과 학살, 고문치사의 기억을 판촉과 농담의 언어로 바꾼 일이다. 사과가 진정 책임의 언어가 되려면, 왜 그런 표현이 기업 안에서 가능했는지, 어떤 역사 감수성과 공적 책임이 무너졌는지를 묻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 문제는 5·18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공적 인물의 말은 사회의 기준을 만든다. 정치인, 고위공직자, 재벌, 유명인의 발언은 단순한 개인 의견이 아니라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가’의 경계를 바꾼다. 그들이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말을 공적 자리에서 반복할 때, 혐오는 더 이상 숨어 있는 말이 아니다. 교실로, 직장으로, 가족 대화로, 거리의 현수막으로 이동한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여러 발언이 그랬다. 대통령 후보 TV 토론회에서 나왔던 이른바 ‘젓가락’ 발언 이후, 한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젓가락”이라는 말을 계속 외치며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사가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하자, 학생은 “왜요? 대통령 후보가 TV에서 한 말인데, 저까짓 게 무엇이라고 저는 하면 안 되는 거예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공인의 말은 어린이·청소년들에게도 기준이 된다. 혐오와 조롱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정치인의 한마디는 누군가에게는 토론 전략일지 모르지만, 학교 안에서는 누군가를 놀리고 괴롭혀도 되는 허가증이 된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대한 발언도 마찬가지다. 장애인 활동가들의 지하철 투쟁을 “시민을 인질로 잡는 행위”, “시민을 볼모로 삼는 행위”로 규정하는 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장애인 활동가들을 시민이 아닌 존재로 만들고, 더 나아가 테러리스트처럼 상상하게 만든다. 이동권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어느 순간 “시민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된다. 그러나 장애인은 시민이 아닌가.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고, 일터에 가고, 병원에 가고, 친구를 만나러 갈 권리는 누구의 권리인가. 공적 발화가 장애인의 권리 요구를 시민사회 바깥의 위협으로 만들 때, 차별은 정책이 되기 전에 이미 상식이 된다.


조전혁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성소수자 혐오 현수막도 같은 문제다. 서울 시내 곳곳에는 동성애, 퀴어, 성교육, 성평등 교육을 공교육에서 쫓아내겠다는 취지의 문구가 걸렸다. 교육의 이름으로 성소수자 학생과 교사를 학교 밖으로 밀어내겠다는 말이 거리 한복판에 당당하게 전시된 것이다. 이런 현수막은 단지 선거 홍보물이 아니다. 학교 안팎에 존재하는 성소수자 어린이·청소년에게 “너는 드러나면 안 된다”, “너는 교육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추방의 대상이다”라고 말하는 사회적 신호다. 동시에 주변 학생들에게는 조롱과 따돌림이 허용될 수 있다는 위험한 메시지를 준다. 혐오 표현은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등굣길, 교실, 화장실, 급식실, 상담실을 위험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혐오 표현을 단지 ‘상처 주는 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혐오 표현은 안전을 무너뜨리는 말이다. 국가는 안전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해 왔다. 그러나 진짜 안전은 체제의 평온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존엄이 지켜지는 상태다. 광주에서 국가가 지키려 했던 안전은 시민의 생명이 아니라 권력의 안정이었다. 반대로 시민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서로의 몸과 삶, 공동체의 존엄이었다. 하나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안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체제를 바꾸려는 안전이다. 5·18 정신은 후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이 질문은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노동재해, 기후재난,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도 연결된다. 재난은 결코 모두에게 평등하게 닥치지 않는다. 사회가 이미 약하게 만들어놓은 사람들이 더 먼저 다치고, 더 늦게 구조되며, 더 쉽게 잊힌다. 혐오 표현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같은 농담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웃고 지나가는 말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내일 학교에 갈 수 있을지, 지하철을 탈 수 있을지, 거리에서 안전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안전은 공권력 투입과 통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중심에 놓고 공동체를 다시 설계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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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전혁 서울시교육감 후보가 내건 현수막 ⓒ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5·18 왜곡, 이주민 특히 중국인을 향한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에 대해 강력한 대응을 주문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세 가지 질문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왜 5·18 왜곡과 조롱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는 같은 만큼 반응하지 않는가. 조전혁 후보의 현수막과 수많은 정치인·종교인의 성소수자 혐오 발언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문제가 아닌가. 어떤 혐오는 국가적 문제이고, 어떤 혐오는 논쟁적 사안으로 남겨두어도 되는가.


둘째, 혐오표현금지법을 말하면서 정작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은 피하려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문제다. 혐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5·18을 조롱하는 문화, 이주민을 범죄자로 만드는 가짜뉴스, 장애인 권리 투쟁을 시민에 대한 위협으로 만드는 언어, 성소수자를 교육에서 추방하려는 정치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다. 누구를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낼 것인가를 정하는 같은 구조의 언어다. 어떤 혐오는 금지하고 어떤 혐오는 방치하는 방식으로는 공동체의 안전을 만들 수 없다. 차별금지법은 바로 이 기준을 세우는 기본법이어야 한다.


셋째, 법은 필요하지만 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5·18과 제주4·3에 대한 왜곡과 조롱, 세월호 참사 희생자 조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조롱을 막기 위한 법과 처벌이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법으로만 모든 혐오를 잡아낼 수는 없다. 혐오는 법망을 피해 밈이 되고, 농담이 되고, 암시가 되고, ‘그냥 장난’이 된다. 그래서 법적 책임과 함께 교육, 캠페인, 시민사회의 행동, 언론의 윤리, 학교의 인권교육ᄋ다양성훈련ᄋ성평등 교육ᄋ노동교육ᄋ정치교육이 필요하다. 무엇이 폭력인지, 무엇이 차별인지, 무엇이 누군가의 삶을 위축시키는 억압인지 분별할 수 있는 시민을 길러야 한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어떤 말을 ‘해도 되는 말’로 둘 것인가. 공인의 혐오 발언과 기업의 조롱을 방치하는 사회는 차별을 문화로 만든다. 반대로 그런 말을 멈춰 세우고, 피해자의 존엄을 중심에 놓고,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기준을 세우는 사회는 안전을 다시 만든다.


오월 정신을 지킨다는 것은 광주를 역사 속에 박제하는 일이 아니다. 국가폭력의 언어가 다시 피해자들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며, 지금 여기에서 다른 사람을 버리지 않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경쟁보다 돌봄을, 배제보다 포함을, 체제보다 생명을 선택하는 일. 인간이 인간을 끝내 버리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일. 그것이 우리가 오늘 다시 이어가야 할 민주주의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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