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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삼성전자 노조의 잠정 승리, 모두의 승리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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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5월20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경기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삼성전자 임금협상을 마친 후 여명구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반도체 사업 담당) 피플팀장과 최승호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 위원장이 잠정 합의안에 서명한 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삼성전자 노동조합의 성과급 요구와 총파업 예고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삼성전자 노조는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 부문의 성과급 제도를 영업이익의 일정 비율로 제도화하고, 기존 성과급 상한을 폐지하라고 요구해왔다. 일부 보도는 삼성전자의 올해 영업이익 전망을 대입하면 성과급 재원이 수십조원 규모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귀족노조의 이지주의다”, “국가경제를 볼모로 잡는 행동을 해선 안된다”와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상황은 달라졌다. 파업 예정일을 불과 얼마 앞두고 삼성전자 노사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중재 속에 성과급 관련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노조는 예고했던 총파업을 유보하고 잠정합의안을 조합원 찬반투표에 부치기로 했고 찬성률 73.7%로 가결됐다. 노조의 원안이 전부 관철된 것은 아니지만, 노동조합은 분명 한 고비를 넘었다.

그러나 한 고비를 넘은 것과 오래 이기는 것은 다르다. 협상장에서 얻은 성과가 곧바로 사회적 승리를 뜻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잠정합의 이후 질문은 더 선명해졌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이번에 일정한 성과를 얻었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의 응원 속에서 이기고, 그 승리를 더 많은 사람의 승리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원칙이 있다. 노동자가 분배를 요구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 아니다. 임금 협상은 물론이고 파업도 노동자의 권리다. 기업의 이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며, 주주가 클릭 몇 번으로 매수한 주식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연구실, 클린룸, 설비, 물류, 유지보수, 야간노동, 실패한 실험, 축적된 숙련, 보이지 않는 돌봄과 재생산 노동 위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성과를 함께 나누자”고 말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 노동자의 권리는 여론의 허락을 받아야만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권리의 행사와 투쟁의 확장은 다른 문제다. 오래 이기는 투쟁은 자기 권리를 더 많은 사람의 권리로 번역할 때 가능하다.

잠정합의 이후에도 삼성전자 노동조합 앞에 남아 있는 벽은 있다. 회사와의 교섭은 한 고비를 넘겼지만, 사회적 외면이라는 벽은 그대로다. 이렇게 사회적 쟁점이 된 싸움에서 노동조합이 앞으로도 계속 승리하려면 조합원만 설득해서는 안 된다. 같은 회사 안의 다른 부문 노동자, 하청·협력업체 노동자, 지역 주민, 청년, 기후위기의 비용을 떠안는 시민, 그리고 노동권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 수많은 노동자와 시민을 설득해야 한다.

물론 몇몇 발언만으로 삼성전자 조합원 전체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적 공간에 드러난 노조의 언어가 사회적 연대를 충분히 넓혀왔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청업체와의 성과 공유를 묻는 질문에 “정규직은 공부도 많이 한 분들이고 입사할 때 채용 조건이 달랐다”는 식으로 답하는 언어는 개별 노동자의 억울함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사회적 연대를 만들지는 못한다. 학력과 입사 경로를 기준으로 노동자의 몫을 다르게 말하는 순간, 노동조합은 자본이 만들어놓은 위계의 언어를 그대로 빌리게 된다. 노동운동이 능력주의의 언어를 사용할 때, 그 투쟁은 가장 먼저 함께 싸워야 할 사람들을 밀어낸다.

노동운동은 자기 몫을 요구할 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몫을 모두의 언어로 번역할 때 강해진다. “우리가 잘했으니 우리는 더 받아야 한다”는 말은 쉽게 엘리트주의, 성과주의, 능력주의로 들린다. 그러나 “이 초과이윤은 주주와 총수 일가만의 것이 아니며, 정규직만의 것도 아니다. 이 이익을 만든 모든 노동자와 사회가 함께 나누도록 삼성의 분배 구조를 바꾸자”고 말한다면 이는 완전히 다른 정치가 된다. 이 싸움의 약점은 노조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데 있지 않다. 요구가 너무 좁게 말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반도체 부문의 성과를 특정 부문 노동자의 몫으로만 말하는 순간, 노조는 회사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분할의 논리를 되풀이하게 된다. 같은 법인 안의 다른 부문 노동자는 성과에서 배제되고, 하청·협력업체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며, 공급망 전체의 노동은 회계 장부 바깥으로 밀려난다. 반도체 생산은 본사 정규직만의 노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연구, 생산, 물류, 설비, 유지보수, 청소, 보안, 건설, 지역 인프라가 함께 맞물려 움직이는 거대한 생산공동체가 반도체를 만든다.


물론 주주 역시 이해관계자다. 국민연금과 소액주주도 삼성전자의 성과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주주가 이해관계자라는 말과 주주가 초과이윤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말은 전혀 다르다. 주주자본주의는 기업의 남는 몫을 주주가 가져가는 것이 자연법칙인 것처럼 말하지만, 기업은 주주의 물건이기 전에 사회적 제도다. 특히 삼성전자는 한국 사회에서 그냥 하나의 사기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법적으로는 사기업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국가전략산업의 중심이며 사회적 자원 위에서 성장한 거대한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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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23일 평택사업장 앞에서 삼성전자 직원 약 4만 명이 모여 결의대회를 열었다. 사진=삼성전자 노조 공동투쟁본부


반도체 산업은 값싼 전기와 물, 도로와 산업단지, 대학과 공공 연구, 세액공제와 규제 완화의 혜택을 받는다. 국민의 세금과 지역의 희생, 미래세대가 감당할 기후 비용이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면, 초과이윤 역시 사적으로만 배분될 수 없다. 공공이 위험을 나누었다면 공공도 성과를 나눌 권리가 있다.

다만 국가전략산업이라는 말이 파업권을 제한하는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다. 국가전략산업이라면 더 많은 민주주의, 더 투명한 분배 기준, 더 강한 공공 환류 장치가 필요하다. “국민경제를 위해 노조는 참아라”가 아니라 “국민의 자원이 들어갔으니 기업과 산업을 더 민주적으로 통제하자”고 말해야 한다. 국가전략산업의 이름으로 노동권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국가전략산업이기 때문에 노동자·하청업체·지역사회·미래세대가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이번 잠정합의 과정은 국가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다시 묻게 한다. 정부는 파업권을 제한하는 감시자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막대한 공공 지원을 받은 전략산업의 초과이윤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방관자로 남아서도 안 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파업을 막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공공 지원과 공공 환류의 원칙을 제도화하고, 반도체 산업에 사회 전체의 자원을 계속 집중시키는 것이 정말 지속가능한 일인지 재검토하는 일이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히 “반도체로 번 돈을 국민에게 얼마씩 나누어주자”는 식의 배당 상상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반도체 산업의 흥망에 더 깊이 묶어두는 방식일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이 초과이윤을 낼 때는 모두가 환호하고, 불황이 오면 노동자와 하청업체와 지역사회가 위험을 떠안는 구조라면, 그것은 분배 정의가 아니라 산업 종속이다. 국가는 반도체 산업의 성과를 어떻게 나눌지만 물을 것이 아니라, 왜 한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반도체 산업 하나에 삶과 재정과 미래를 의존하게 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따라서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이번 잠정합의 이후 해야 할 일은 요구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이미 얻은 성과를 더 넓은 정의의 언어 속에 놓는 일이다. 성과급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노동자가 자기 성과에 대한 몫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다만 지금 필요한 것은 성과와 위험, 임금과 투자, 정규직과 하청, 현재세대와 미래세대를 함께 고려하는 민주적 분배 산식이다.

예컨대 노조는 영업이익 기반의 투명한 성과급 산식을 요구하되, 동시에 초과이윤의 일정 부분을 하청·협력업체 노동자에게 직접 돌아가게 하는 공동기금으로 만들자고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공동기금은 원청이 하청 사장에게 시혜적으로 넘기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핵심은 하청노동자에게 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하청노동자가 자신의 몫을 직접 말하고 교섭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는 것이다. 원청 노동조합이 해야 할 일은 하청노동자를 대신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자리를 함께 여는 일이다. 하청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시혜가 아니라 교섭권이고, 위로부터의 배분이 아니라 당사자의 권리다.

물론 이 책임을 노조에게만 떠넘길 수는 없다. 하청과 공급망의 불평등을 만든 것은 원청 중심의 산업 구조이고, 그 구조를 가능하게 한 것은 정부의 산업정책과 노동정책이다. 그러나 노조가 그 문제를 자기 의제로 열 때, 회사와 정부의 책임도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만 더 받겠다”는 요구는 고립되지만, “삼성의 초과이윤을 공급망 전체와 사회적으로 다시 설계하자”는 요구는 더 많은 사람을 투쟁의 안으로 부른다.

노조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 문제를 더 중심에 놓아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화려한 성과 뒤에는 장시간 노동, 교대제, 수면의 파괴, 정신건강의 악화만이 아니라 직업병과 죽음의 역사가 있다. 유해물질에 대한 알권리, 직업병 산재 인정, 안전한 작업장에 대한 요구는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오랫동안 목숨을 걸고 제기해온 문제였다. 반도체 초과이윤이 사회적 부라면, 그 부는 먼저 반도체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회복하는 데 쓰여야 한다. 직업병 예방, 피해자 보상, 유해물질 정보 공개, 하청노동자 건강권 보장, 장시간 노동 축소는 성과급 논의의 부속 의제가 아니라 핵심 의제여야 한다.

기후정의의 관점도 필요하다.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전기와 물을 쓴다. 송전선은 누군가의 마을을 지나고, 산업용수 확보는 누군가의 강과 농지와 생태계를 바꾼다. 탄소와 오염, 지역 불평등의 비용을 사회가 감당한다면, 반도체 초과이윤의 일부는 정의로운 전환 기금으로 돌아가야 한다. 재생에너지 전환, 지역 주민 보상, 물 사용 감축, 위험 공정의 안전 강화, 하청노동자의 건강권 보장에 쓰여야 한다. 기후정의 없는 분배 정의는 반쪽짜리다.

돌봄의 관점도 필요하다. 노동자의 삶은 성과급 통장으로만 회복되지 않는다. 교대제 노동자의 수면 파괴와 가족 돌봄의 공백은 결국 누군가의 무급 돌봄으로 메워진다. 좋은 투쟁은 더 많은 돈만이 아니라 더 안전한 시간, 더 예측 가능한 삶, 아플 권리, 쉴 권리, 돌볼 권리를 함께 요구해야 한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성과급 몇 퍼센트”만 말할 때 사람들은 숫자만 본다. 그러나 “모든 노동자의 생명과 시간과 돌봄을 지키는 산업협약”을 말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민주주의의 문제도 있다. 삼성의 오래된 무노조 경영은 노사관계를 성숙하게 만들 기회를 빼앗았다. 갈등을 제도화하고, 협상 규칙을 만들고, 신뢰를 쌓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갈등은 갑자기 터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 억눌린 관계의 폭발이다. 해결 역시 단기 조정이나 행정권 동원이 아니라 산업민주주의의 확장이어야 한다. 노동자 대표가 이사회와 투자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하청·협력업체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전략산업의 의사결정에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 기업은 주주의 물건이 아니라 사회적 제도다. 사회적 제도라면 사회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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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 연합뉴스


물론 노동조합을 향한 조롱에는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자동화로 일자리 잃어봐야 정신 차린다”와 같은 말은 노동 혐오, 노동조합 혐오다. 오늘 생산직 노동자가 조롱당하는 자리는 내일 사무직, 연구직,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의 자리가 된다. AI와 자동화의 시대에 노동조합을 비웃는 것은 결국 자신의 보호막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노조 혐오와 노동권 공격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은 이번 잠정합의로 한 고비를 넘었다. 그러나 한 고비를 넘은 것과 온전히 이기는 것, 모두와 함께 이기는 것은 다르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앞으로도 계속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강한 파업 결의만이 아니다. 더 넓은 상상력이다. 문제는 금액의 크기가 아니라 주어의 크기다. “우리만 더 받겠다”가 아니라 “삼성의 초과이윤을 사회적으로 다시 설계하자”고 말해야 한다. “정규직 성과급”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의 이익공유”를 말해야 한다. “우리는 엘리트”가 아니라 “우리는 이 거대한 생산공동체의 일부이며, 그래서 모두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고 말해야 한다.

그때 이번 잠정합의는 일부 조합원의 성과급 확보로 끝나지 않고, 한국 사회의 분배 질서를 다시 묻는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된다. 노동조합의 승리는 회사가 얼마를 양보했느냐로만 판단되지 않는다. 진짜 승리는 시민들이 그 투쟁 속에서 자기 권리를 발견할 때 온다.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이 싸움에서 오래 이기고 싶다면, 가장 먼저 승리의 주어를 바꿔야 한다. “나”에서 “우리”로. “조합원”에서 “모든 노동자”로. “성과급”에서 “사회적 분배”로. 그리고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반도체의 성공”에서 “모두의 지속가능한 삶”으로.

그 전환이 없다면 성과급의 숫자가 커질수록 투쟁의 고립도 커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삼성의 성과급 논쟁은 한국 사회가 오래 미뤄온 질문인 “누가 만들었고, 누가 가져가야 하는가”를 다시 여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AI와 로봇, 기후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어떤 노동을 지키고, 어떤 삶을 보호하며, 어떤 사회를 준비할 것인가라는 더 큰 질문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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