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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교육의 위기, 이제는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 차례

지금 한국 사회의 교육(공교육)의 목표가 무엇인가? 한국 공교육의 목표는 오로지 입시다. 서열화 되어 있는 대학에 맞춰서 학생들에게 순서대로 보내기 위해 공교육에서는 그 근거를 마련한다. 국영수사과 중심, 암기 중심의 시험 성적에 따라 학생들의 등급을 매긴다. 초중고 12년을 지나면 치르는 시험이 있다. 한 명 한 명의 특성(개성, 성격, 취미, 장점, 장애, 지역, 양육자의 소득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저 한 날 한 시에 치르는 시험이라는 이유로 “공정한 시험”이라고 여겨진다. 그 시험을 잘 치게 하는 것이 공교육의 목표다.

 

그 시험을 잘치고 소위 “좋은” 대학교에 보내는 것이 공교육의 유일한 목표라면 인권교육, 시민교육, 노동교육, 정치교육, 성평등교육, 성교육과 같은 교육들이 필요하다고 여겨질 이유가 없다. 필요없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차별, 억압, 폭력의 사회구조를 알게 하는 "위험한 교육"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기득권자들에게 인권교육, 시민교육, 노동교육, 정치교육, 성평등교육은 좌편향된 좌파교육이고 이념교육이고 공산주의교육이고 빨갱이들의 선동으로 쉽게 매도되곤 한다.

 

지난 7월 21일, 정부는 재벌 대기업의 세금의 4조 1천억원 깎고 다주택자 중과세율 폐지 등으로 고가 주택 보유자의 종합부동산세를 1조 7천억원 깎아주기로 했다. 자그마치 6조에 해당하는 부자감세다. 연 소득 7,600만원 초과 고소득자 감세(1조 2천억원)를 포함하면 7조원이다. 이외에도 부자감세는 계속되고 있어 그 결과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세수결손이 생겼고 이는 5년간 60조원의 세수 감소라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한다. 부자들에게 거두어 들이는 세금을 줄여준 것에 대한 계획은 무엇인고 하니, 공교육 예산이 크게 삭감되었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지원하는 예산, R&D(기초연구) 사업에 대한 예산이 줄지어 삭감되었다. 기초연구 없이 반도체 최강국이 되라는 현실이다. 공교육도 반도체 산업 역군을 만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아동, 청소년, 청년, 노인, 여성, 장애인, 빈곤층 등을 지원하기 위해 쓰이는 예산이 대폭 감소되었고 일부는 완전히 사라졌다. 일례로, 장애인 성인권교육 예산 5억이 전액 삭감된다. 이 교육은 이는 공지영 작가가 쓰고 영화로 만들어 진 ‘도가니’라는 작품의 모티브가 된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5년간 일어난 성폭력/성착취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교육이다. 아예 사라져버린 이 교육의 예산은 기존에도 전국에서 쓰인 예산이 겨우 5억이다. 관련 종사자들은 이 일을 하며 인건비도 책정받지 못했다. 아주 적은 강사비를 제외하곤 5억은 전부 사업비다. 서울의 아파트 값 평균 7-8억이고 10억, 20억하는 아파트도 많다는걸 생각하면 5억은 누군가에겐 집값도 안된다. 대학교 입시가 목표인 공교육에 성평등교육/성교육은 필요없다. 비장애인 학생들에게도 필요없다고 여기는 교육을 장애인 학생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길 리 없다. 이러니 성폭력예방교육과 중복이라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국가"를 만들어 함께 사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안전하고 평등하게 살기 위해서다. 공교육은 모든 시민들에게 그 가치 전하고 실천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학교는 시장에 양질의 '힘써 일하는 근로자'를 납품하는 공장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한다. 교실은 경쟁이 아니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연습하는 곳이어야 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놀고 먹고 배우고 협력을 연습하고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놀고 먹고 배우고 협력을 연습하고 성소수자와 비성소수자가 함께 놀고 먹고 배우고 협력을 연습하고 여성과 남성이 함께 놀고 먹고 배우고 협력을 연습하고 양육자들의 사회경제적 계급과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 놀고 먹고 배우고 협력을 연습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교실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익히는 곳이 돼야 한다. 경쟁은 그렇게 협력을 할 수 있는 시민들이 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교사의 역할은 공교육의 목표와 함께 갈 수 밖에 없다. 공교육의 목표가 대학교 입시라면 그것을 잘 하게 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학생들이 오로지 입시를 위한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교실을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교사는 모든 학생들이 함께 놀고 먹고 배우고 협력을 연습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교사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교육의 목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정부는 학생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이유로 교사 수를 줄여가겠다고 한다. 이미 임용고시에 합격한 사람들도 발령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니다. 학생 수가 줄어도 교사를 더 많이 뽑아야 한다. 교사 한 명이 함께 생활해야 하는 학생의 수가 적어야 한다. 한 학급 당 학생 수를 20명을 목표로 계속 줄여가야 한다. 한 학급에 담임교사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면 어떨까? 학 학급에 장애인 학생의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교사도 한 명씩 있으면 어떨까? 한 학급에 이주배경 학생을 지원할 수 있는 교사도 한 명씩 있으면 어떨까? 상담교사도 한 학급 당 한 명씩 있으면 어떨까? 교실은,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 축소판이어야 한다. 배제되는 존재 없이 모든 청소년이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

 

교사도 학생도 양육자도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공교육을 끝내고,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학교를 상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줄 세우기에 급급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두의 행복을 핵심 가치로 여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특히 입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입시는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될 수 있을 때 사라질 수 있다.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는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때 가능하다. 대학을 나오든 나오지 않든, 장애가 있든 없든, 이주배경이 있든 없든, 성별이 어떻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에 관계없이 충분히 자신을 긍정하며 살 수 있는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자본을 위한 효율성(자본가들이 돈을 많이 버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가지는 것이 정상성의 기준이자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여겨질 때 우리는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자본가를 위해 군말없이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를 만드는 것이 공교육의 목표일 때 우리는 지금과 똑같은 학교의 모습밖에 가질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육 체제 속에서 교육의 3주체라고 하는 학생, 학부모, 교사 중 행복한 사람이 있나?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원인은 공부, 성적, 입시에 대한 압박이다. 양육자들은 행복할까? 내 자녀가 조금이라도 뒤처질까 손해볼까 불안하다. 자신의 노후도 불투명한데 자녀를 위한 사교육 경쟁에 나의 노후자금을 도박으로 걸어야 한다. 자신의 “투자”가 손해나지 않도록 자녀들을 죽음의 경쟁에 내몬다. 자녀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교사들도 죽어가고 있다. 교사를 죽이고 있는 것은 교육제도이자 교사의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다. 전국의 교사들 20여만명이 모여서 한 목소리로 외쳐도 무책임한 국가는 이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수많은 학생 및 어린이 청소년들이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있으며(10대 10만명당 7.1명이 자살하고 있으며(2022년) 이는 한 해 330명 정도의 10대가 자살을 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학교 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식당노동자, 청소노동자, 교육복지사, 학교사회복지사, 초등돌봄전담사, 상담사, 방과후강사, 기간제교사, 특수교사 등)이 처우 개선을 위해 투쟁해왔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이러한 현실을 바꿔내고자 전국의 20여만명의 교사가 모인 적은 없었다.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자살 사건으로 인해 교사들의 목소리가 모아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악성민원 처리 창구 단일화’ 수준이나 ‘아동복지법 개정’이나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통한 교권회복’ 같은 게 아니라, 공교육과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완전히 뜯어 고쳐야 할 때다.

 

지난 달, 미국 뉴욕주에서 열린 다양성훈련 컨퍼런스에 참석한 뒤 소개를 통해 시라큐스(뉴욕주)에서 변호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손동후 변호사를 만났다. 손 변호사는 자녀가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공부했던 뉴욕주의 발달장애인에 대한 정책과 문화를 잘 알고 있기에 뉴욕주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나로서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워낙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이들이 “큰 형님” 국가로 여기는 곳이면서 한국의 서울처럼 느껴지는 곳이 뉴욕이다 보니, 이러한 결정이 잘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손 변호사에게 “뉴욕주에서 발달장애인이 학교 다니기가 좋나요? 뉴욕주가 장애인에 대한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었나요?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답변은 재산세에 그 핵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뉴욕주의 재산세(Property Tax)는 자신이 속한 행정구역(County(카운티), City(시티), Town(타운), Village(빌리지) 그리고 학군(School District)에서 징수된다. 재산세는 뉴욕주에서 부동산 공시지가의 2-3%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재산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학군에 내는 세금이다. 재산세의 55-65%정도 된다. 재산세를 3년이상 미납하면 해당주택은 경매처리된다. 주택이 어느 학군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라큐스 주변에서 37-40만 달러(한화 약 5억원 정도)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면 재산세는 매년 2만 달러, 한화 2천7백만원 정도다. 그 중 학군에 내는 세금은 1만 1천 달러, 한화 1천5백만원 정도라고 가늠할 수 있다. (공시지가는 주택면적에 따라 부과되는데 주택가격은 면적의 크기에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부과되는 재산세가 그 지역의 학교 운영에 쓰이게 된다는 의미다. 이는 재산세를 내는 주택 보유자가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혹은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지 없는 지와 상관없다. 그 지역에서 자산(자본)을 보유하고 있으니 그 지역의 교육(공동체)에 이바지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장애인에게 필요한 개별화된 수업도 필요와 욕구에 따라 진행된다. 재산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고 그 세금은 교육에 쓰이고 교육은 장애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상관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권리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미국이 무조건 좋다는 말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끝판왕 같은 미국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한다는 말이다.

 

동시에 미국은 전 세계에서 난민 신청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다. 미국의 여러 주들 중에서도 뉴욕 주는 이주민들과 난민들이 이미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주민과 난민들을 위한 정책도 마련되어 있고 이주민과 난민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문화도 있어서 뉴욕 주는 난민들이 선호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이주민과 난민이 자국의 일자리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긍정적인 정도까지만 계산하여 수용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혐오가 세계적으로 커져가고 있는 상황인지라 뉴욕 주는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또한 뉴욕주는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정책만 잘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에 대한 정책도 기본적인 것들은 갖추어져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임신중단을 포함한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 평등결혼을 포함한 원하는 사람들과 원하는 방식대로 가족을 구성할 권리,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없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을 기본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 시스템 속에서 온전히 자신을 긍정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나? 착취의 굴레, 억압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자. 공교육의 위기를 넘어서, 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학교에서부터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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