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 예수 역으로 캐스팅 된 신시아 에리보가 23일 로스앤젤레스의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제31회 연례 미국 배우 조합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작품에서 흑인 여성(신시아 에리보)이 예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이슈가 되고 있다. 여러 언론들에게 “논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소식을 접한 사람들도 ‘백인 남성인 예수를 흑인 여성이 연기해도 되는가?’, ‘신성모독이다’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예수는 많은 성화에서처럼 미남인 백인 남성이었을까?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평범한 외모로 역사적 예수를 추정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백인이 되었을까? 권력자들의 인종이 백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종교로 정한 것이 그리스도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신)은 성화에서처럼 백인 노인일까? 신이 있는지부터 논할 문제지만,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신의 모습은 권력자들의 모습과 닮아야 했기 때문에 신은 백인 노인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미남”일까? 그래야 사람들이 더 감정이입을 하고 몰입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신은 남성일까? 남성이어야만 할까? 그렇지 않다. 2018년도에 ‘인권옹호자 예수’라는 책을 내며 간단히 다루기도 했는데,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예수는 남성으로부터 유전자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Y염색체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는 XX인 사람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는 남성으로 인식된 것 같은데, XX 성염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남성으로 보이는(패싱되는) 간성(Intersex, 인터섹스)이었던 것일까?
나는 사람들이 예수나 신의 모습을 그릴 때, 유색인종인 예수가 피부색에 의한 차별과 싸우고 나그네인 예수가 이주에 의한 배제와 억압과 싸울 때 그리고 여성의 모습을 한 신이 여성과 성소수자 그리고 다른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로하고 동행하며 목소리 내는 모습을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삶이 느껴지고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라는 신의 사랑을 느껴진다. 그런데 누군가는 예수의 모습이 흑인으로, 혹은 여성으로 그리는 것을 ‘모욕적’이라고 한다. 나는 예수(또는 하나님/신)의 인종이나 성별을 단 한 가지(백인 남성)로 정하는 것은 차별과 배제와 싸웠던 예수의 삶 그리고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그동안 맡지 못했던 배역(역할)을 맡게 되는 것을 “PC주의”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PC주의란 Political Correctness의 약자로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한다. 이는 정확한(혹은 좋은)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양성과 포함(Diversity and Inclusion)을 공격하고 폄하하려는 사람들이 쓰는 용어다. ‘정치적’이라는 표현도 ‘올바름’이라는 표현도 적절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PC주의자”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은 ‘PC주의자들은 너무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을 내세운다’와 같은 말을 하곤 한다. 그렇다. 모든 억압에 반대하고 모두를 포함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다양성운동은 의도적이고 의식적이다.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운동을 하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게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부의 사람들만이 자리를 독차지하고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한다. 그런 세상에 저항하고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누구나 있는 모습 그대로 환영받고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몫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책 ‘인권옹호자 예수’의 내용 ⓒ필자 제공
신의 모습이 백인으로만 상상되는 세상이 누구에게 좋겠는가? 신의 모습이 남성으로만 상상되는 세상이 누구에게 좋겠는가? 유색인종, 여성, 퀴어, 장애인, 이주민, 청소년, 빈민 등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흑인 여성 예수와 신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 경영인, 방송인으로 유색인종, 여성, 퀴어, 장애인, 이주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나와 같은 동료 시민으로 학교, 직장, 일터, 공동체에서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간성과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고 장애인을 배제하고 이주민과 난민을 없애고자 하는 시도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젊고 아름다운 건강한 비장애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고학력/고학벌 고소득인 사람들만 “정상”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나는 언제까지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사람답게 그리고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 누구든 있는 모습 그대로 환영 받고 함께 살 수 있는 사회 속에서 나 역시도 더 사람답게 안전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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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작품에서 흑인 여성(신시아 에리보)이 예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이슈가 되고 있다. 여러 언론들에게 “논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소식을 접한 사람들도 ‘백인 남성인 예수를 흑인 여성이 연기해도 되는가?’, ‘신성모독이다’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예수는 많은 성화에서처럼 미남인 백인 남성이었을까?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평범한 외모로 역사적 예수를 추정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백인이 되었을까? 권력자들의 인종이 백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종교로 정한 것이 그리스도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신)은 성화에서처럼 백인 노인일까? 신이 있는지부터 논할 문제지만,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신의 모습은 권력자들의 모습과 닮아야 했기 때문에 신은 백인 노인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미남”일까? 그래야 사람들이 더 감정이입을 하고 몰입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신은 남성일까? 남성이어야만 할까? 그렇지 않다. 2018년도에 ‘인권옹호자 예수’라는 책을 내며 간단히 다루기도 했는데,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예수는 남성으로부터 유전자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Y염색체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는 XX인 사람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는 남성으로 인식된 것 같은데, XX 성염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남성으로 보이는(패싱되는) 간성(Intersex, 인터섹스)이었던 것일까?
나는 사람들이 예수나 신의 모습을 그릴 때, 유색인종인 예수가 피부색에 의한 차별과 싸우고 나그네인 예수가 이주에 의한 배제와 억압과 싸울 때 그리고 여성의 모습을 한 신이 여성과 성소수자 그리고 다른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로하고 동행하며 목소리 내는 모습을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삶이 느껴지고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라는 신의 사랑을 느껴진다. 그런데 누군가는 예수의 모습이 흑인으로, 혹은 여성으로 그리는 것을 ‘모욕적’이라고 한다. 나는 예수(또는 하나님/신)의 인종이나 성별을 단 한 가지(백인 남성)로 정하는 것은 차별과 배제와 싸웠던 예수의 삶 그리고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그동안 맡지 못했던 배역(역할)을 맡게 되는 것을 “PC주의”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PC주의란 Political Correctness의 약자로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한다. 이는 정확한(혹은 좋은)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양성과 포함(Diversity and Inclusion)을 공격하고 폄하하려는 사람들이 쓰는 용어다. ‘정치적’이라는 표현도 ‘올바름’이라는 표현도 적절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PC주의자”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은 ‘PC주의자들은 너무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을 내세운다’와 같은 말을 하곤 한다. 그렇다. 모든 억압에 반대하고 모두를 포함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다양성운동은 의도적이고 의식적이다.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운동을 하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게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부의 사람들만이 자리를 독차지하고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한다. 그런 세상에 저항하고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누구나 있는 모습 그대로 환영받고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몫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신의 모습이 백인으로만 상상되는 세상이 누구에게 좋겠는가? 신의 모습이 남성으로만 상상되는 세상이 누구에게 좋겠는가? 유색인종, 여성, 퀴어, 장애인, 이주민, 청소년, 빈민 등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모두가 포함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흑인 여성 예수와 신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 경영인, 방송인으로 유색인종, 여성, 퀴어, 장애인, 이주민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나와 같은 동료 시민으로 학교, 직장, 일터, 공동체에서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간성과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고 장애인을 배제하고 이주민과 난민을 없애고자 하는 시도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젊고 아름다운 건강한 비장애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고학력/고학벌 고소득인 사람들만 “정상”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나는 언제까지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사람답게 그리고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 누구든 있는 모습 그대로 환영 받고 함께 살 수 있는 사회 속에서 나 역시도 더 사람답게 안전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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