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 존중되고 모두를 포함하는 세상 돼야”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2017년 ‘미투 운동’부터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까지, 한국 사회는 성폭력 성차별 성평등이란 단어로 요동쳤다. 오랫동안 쉼없이 외쳤으나 듣는 이가 없었던 목소리에 세상은 이제야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만드는 데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했다. 숭의동에 있는 ‘한국다양성연구소’도 큰 힘을 보태고 있다. -심혜진 명예기자-
“헌법재판소는 이제서야 비로소 여성을 출산의 도구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환영하며 앞으로는 여성을 비롯한 청소년, 성소수자 등 모든 사람의 자기결정권이 충분히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소식이 들리던 날,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위의 글이 올라왔다.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이 쓴 글이다.
한국다양성연구소는 김 소장이 2015년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는 비영리기관이다. “그동안 사회는 모든 여성이 결혼하고 애를 낳아야만 하는 것처럼 여겼죠. 임신했을 때 낳지 않으면 형벌로 처벌까지 하도록 했고요. 임신은 혼자 할 수 없는데, 낙태죄에 남성의 책임을 묻는 조항이 있나요? 또 아기를 낳아 키우기 어려운 환경을 만든 국가의 책임도 쏙 빠져있는 나쁜 법이죠. 낙태죄 폐지를 응원하고 있어요.”
김 소장은 여성을 비롯한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이주민, 난민, 노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관심을 갖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연구소를 만들었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모두를 포함하는 세상’을 연구소의 비전으로 정하고 교육과 캠페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작년 한 해 동안 전국을 돌며 진행한 강의와 교육 프로그램만 해도 100회가 넘는다. 몇몇 대학의 강의하는 교수로, 서울시 인권교육 자문위원으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로, 때론 집회 사회자로, 직책과 역할이 많아 그의 일정표는 언제나 빼곡하다.
“한국 사회가 변해야 할 부분이 많죠. 그래도 교육 현장에 가보면, 사회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다양성을 포용하는 방향으로요. 물론 백래시(반발 심리)도 있지만 결국엔 좋은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정체,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의사가 되라는 부모의 압박이 더해져 중고교 시절 내내 우울했다. 원치 않는 학과 공부를 하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상담사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자신처럼 힘들게 청소년기를 보내는 이들을 상담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미국에서 ‘편견의 심리학’ 강의를 듣고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다루는 과목이었어요. 성별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죠. 이전까진 차별과 억압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는 자신의 전공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대학원에서 ‘인간의 다양성과 사회 정의’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최초의 ‘다양성’ 전공자가 됐다.
그가 말하는 ‘다양성’은 ‘여러 가지’라는 뜻과 차이가 있다. “’다양성’은 ‘여러가지 생각이 다 맞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여성이나 성소수자, 장애인을 향해 쏟아내는 편견과 차별, 억압은 ‘혐오 표현’일 뿐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어요. 혐오까지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는 건 아니에요.”
그는 다양성을 “자기가 가진 억압과 특권을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관점, 즉 렌즈와 같은 것”이라 설명했다.
“억압과 특권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해요. 남성이라는 특권그룹에 속해있다 하더라고 비정규직이라는 억압 그룹일 수 있고, 여성이라도 부자일 수 있고, 성소수자이지만 비장애인일 수도 있거든요.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를 알면 이 특권 뒤에 착취와 폭력을 당하는 누군가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특권을 내려놓아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연구소 설립 5년 차에 접어든 요즘, 그는 오랫동안 꿈꿔 온 일을 하나씩 펼치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 땐 3박4일 과정의 ‘청소년 다양성 캠프’를 열 생각이다. 미국의 한 인권기관에서 2년동안 7박8일 과정의 캠프 진행자 일을 하면서 그는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수자에 대한 관점이나 차별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캠프에 참여한 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이후의 삶이 바뀌는 걸 수없이 목격했어요. 청소년으로 시작해 학부모나 교사 등 성인 대상의 캠프도 진행하고 싶어요.”
내년엔 연구소 로비를 인권도서관으로 만들 계획이다. “제가 미추홀구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다들 왜 서울로 안가고 여기 있느냐고 묻는데, 저는 지역사회의 변화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지역에 다양성의 렌즈로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다양성 존중되고 모두를 포함하는 세상 돼야”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2017년 ‘미투 운동’부터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까지, 한국 사회는 성폭력 성차별 성평등이란 단어로 요동쳤다. 오랫동안 쉼없이 외쳤으나 듣는 이가 없었던 목소리에 세상은 이제야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만드는 데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했다. 숭의동에 있는 ‘한국다양성연구소’도 큰 힘을 보태고 있다. -심혜진 명예기자-
“헌법재판소는 이제서야 비로소 여성을 출산의 도구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으로,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환영하며 앞으로는 여성을 비롯한 청소년, 성소수자 등 모든 사람의 자기결정권이 충분히 존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소식이 들리던 날,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위의 글이 올라왔다.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이 쓴 글이다.
한국다양성연구소는 김 소장이 2015년 설립해 운영해오고 있는 비영리기관이다. “그동안 사회는 모든 여성이 결혼하고 애를 낳아야만 하는 것처럼 여겼죠. 임신했을 때 낳지 않으면 형벌로 처벌까지 하도록 했고요. 임신은 혼자 할 수 없는데, 낙태죄에 남성의 책임을 묻는 조항이 있나요? 또 아기를 낳아 키우기 어려운 환경을 만든 국가의 책임도 쏙 빠져있는 나쁜 법이죠. 낙태죄 폐지를 응원하고 있어요.”
김 소장은 여성을 비롯한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이주민, 난민, 노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관심을 갖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연구소를 만들었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모두를 포함하는 세상’을 연구소의 비전으로 정하고 교육과 캠페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작년 한 해 동안 전국을 돌며 진행한 강의와 교육 프로그램만 해도 100회가 넘는다. 몇몇 대학의 강의하는 교수로, 서울시 인권교육 자문위원으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로, 때론 집회 사회자로, 직책과 역할이 많아 그의 일정표는 언제나 빼곡하다.
“한국 사회가 변해야 할 부분이 많죠. 그래도 교육 현장에 가보면, 사회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느껴요. 다양성을 포용하는 방향으로요. 물론 백래시(반발 심리)도 있지만 결국엔 좋은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정체,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의사가 되라는 부모의 압박이 더해져 중고교 시절 내내 우울했다. 원치 않는 학과 공부를 하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상담사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자신처럼 힘들게 청소년기를 보내는 이들을 상담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미국에서 ‘편견의 심리학’ 강의를 듣고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다루는 과목이었어요. 성별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죠. 이전까진 차별과 억압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는 자신의 전공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대학원에서 ‘인간의 다양성과 사회 정의’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최초의 ‘다양성’ 전공자가 됐다.
그가 말하는 ‘다양성’은 ‘여러 가지’라는 뜻과 차이가 있다. “’다양성’은 ‘여러가지 생각이 다 맞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여성이나 성소수자, 장애인을 향해 쏟아내는 편견과 차별, 억압은 ‘혐오 표현’일 뿐 다양성과는 거리가 멀어요. 혐오까지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는 건 아니에요.”
그는 다양성을 “자기가 가진 억압과 특권을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관점, 즉 렌즈와 같은 것”이라 설명했다.
“억압과 특권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해요. 남성이라는 특권그룹에 속해있다 하더라고 비정규직이라는 억압 그룹일 수 있고, 여성이라도 부자일 수 있고, 성소수자이지만 비장애인일 수도 있거든요.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를 알면 이 특권 뒤에 착취와 폭력을 당하는 누군가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특권을 내려놓아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연구소 설립 5년 차에 접어든 요즘, 그는 오랫동안 꿈꿔 온 일을 하나씩 펼치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 땐 3박4일 과정의 ‘청소년 다양성 캠프’를 열 생각이다. 미국의 한 인권기관에서 2년동안 7박8일 과정의 캠프 진행자 일을 하면서 그는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수자에 대한 관점이나 차별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캠프에 참여한 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이후의 삶이 바뀌는 걸 수없이 목격했어요. 청소년으로 시작해 학부모나 교사 등 성인 대상의 캠프도 진행하고 싶어요.”
내년엔 연구소 로비를 인권도서관으로 만들 계획이다. “제가 미추홀구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다들 왜 서울로 안가고 여기 있느냐고 묻는데, 저는 지역사회의 변화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지역에 다양성의 렌즈로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